”세상의 모든 장벽들은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33년 전 종교의 벽을 넘어 함께 손을 잡았던 아일랜드인들처럼 남북한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념의 벽을 넘어 함께 손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1977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코리건 매과이어(56·여)는 지난해 10월 열렸던 ‘서울 NGO 세계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노벨평화상이라는 영광을 가져다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조국 북아일랜드를 갈라놓은 가톨릭 신도와 기독교 신도 사이의 ‘종교 전쟁’. 아일랜드민족해방군(IRA)과 영국군의 무력 충돌로 인해 그의 조카 2명이 목숨을 잃자 그는 “이제 이런 비극을 끝낼 때가 됐다”고 절규하며 평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마침내 노벨평화상을 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10월13일 오슬로의 노벨위원회 청사에서 “남북대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해 노력을 기울여 한반도에 평화 무드를 조성한 공로를 인정해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노벨상 100주년인 새천년 첫해의 평화상 수상이자 한반도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다. 코리아의 위상이 전세계적으로 높아졌다. 개인의 영광 이전에 민족적인 경사가 아닐 수 없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정착에 기여한 김대통령이 세계 평화의 전도사가 됐다”고 말했고,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는 “남북 화해와 협력을 향한 새로운 조류를 만들었다”고 축하했다.

경제문제 등 국민 기대 수준 높아져

그러나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은 아일랜드인 매과이어의 경우처럼 한반도 분단이란 ‘역설적 상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란 비극이 만들어낸 ‘눈물의 노벨상’일 수 있다.



김대통령도 이런 배경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짧은 수상소감을 통해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들의 성원 덕분”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비서실은 10월14일 국내외로부터 쇄도하는 축하전화에 응대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였지만, 김대통령은 별다른 소감 없이 경제문제 등 산적한 국정현안을 챙기면서 평소처럼 하루를 보냈다. 노벨평화상 수상에 실리는 무게와 부담을 김대통령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0월14일 하루 동안 청와대 홈페이지의 ‘열린 마당’ 게시판에는 무려 1600여건에 달하는 글이 올라왔다. 물론 대부분이 김대통령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마치 자신의 일인양 기뻐하는 글이었다.

“어제 청와대 근처를 걸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좋았습니다. 존경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얼굴이십니다…”(장덕원) “저희 집은 이번 주를 노벨상 주간으로 정해서 매일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고 완전히 축제 분위기입니다. 대통령 할아버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휴머니즘, 역사에 대한 안목, 정의, 끝없는 노력과 공부… 이 모든 것들을 저는 존경하고 정말 본받고 싶습니다. 너무너무 사랑해요”(양다혜) 등등 수 없는 축하 인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이런 축하의 말 가운데는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날카로운 비판과 질책의 글 역시 상당수 섞여 있었다. “이젠 국민에게 봉사할 차례입니다. 그동안 대통령님의 노벨상을 위해 우리 국민은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동안 외치로 인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의 희생과 불편에 이제는 정부에서 보답할 때입니다. 훌륭하다고 칭송받을수록 작은 허물이 더욱 크게 보인다는 점을 인지하시고 더욱 바른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몸소 힘써 주시길…”(한궁민) “남은 임기 동안 밖보다 안을 더욱 챙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인권, 평화 모두 다 중요하지만 현재 위태로운 경제를 살려주셔야 합니다”(김동옥) “과거 대통령들은 모든 것을 자기 임기에 완성시키려고만 했습니다. 개혁도 민주화도… 그 결과 성급한 졸속개혁으로 개혁보다는 개악이 더 많았던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홍세룡) 등 이제 내치에, 특히 경제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주문이 제일 많았다.

노벨상 수상이 김대통령의 통치 차원뿐만 아니라 정권 차원의 부담이 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여권 핵심 관계자들이 “노벨상 수상은 국가적 경사와 국민의 기쁨이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동안 해오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14일 민주당의 당 4역회의에서도 “노벨상 수상의 의미를 충분히 새겨 앞으로 민생문제에 더욱 주력해나간다”는 선에서 김대통령의 수상 의미를 정리했다.

그러나 여권의 이런 분위기와 상관없이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 수준은 더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솔직히 김대통령이 내년에 상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임기가 절반 정도 남은 상태에서 노벨상을 받게 돼 통치와 정국 운용 과정에 심리적 부담이 크다. 엄청나게 잘 하지 않으면 조그만 잘못에도 비난과 비판이 노벨상 수상 이전보다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한다.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온 한 시민의 글은 여권의 이런 부담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노벨평화상이 그간 고생했으니 애썼다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 아닌, 과거와 현재를 통해 양심적인 인류애를 실현했고 분명 앞으로도 실천해야 한다는 인류 전체의 염원을 함께 담아주는, 무겁고 힘겨운 족쇄지 영광 그 자체만은 아닙니다. 대통령도 아마 그 부분에서 상당한 부담을 가지실 것이라 여깁니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서로 갈라진 한반도의 안정이 인류의 미래 비전에 중요함을 노벨평화상 심사위원들은 철저하게 계산(?)했겠지요. 그리고 그 부담의 책임을 김대통령께 넘겼습니다.”(부산 자갈치 횟집 아저씨)

물론 평화상이 부담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 무대에서는 한층 높아진 김대통령의 위상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쥐어줄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은 이러한 이니셔티브를 발판 삼아 강화된 ‘주권 외교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할 새로운 원군을 만난 셈이다. 또한 이번 노벨상 수상이 햇볕정책에 대한 국제적 지지 및 공인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북정책에 대한 야당의 공격에 억지력을 담보해준 성격도 강하다.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 현상이 억제될 여지도 많아졌다.

그러나 복잡하게 뒤얽힌 국내 정치 현상을 타개해 나가는 데는 노벨상 수상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차기 대권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김대통령의 행동반경이 오히려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정권재창출 같은 국지적 국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길을 가라는 요구가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계재편이나 개헌 시도가 더 어려워진 측면도 강하다. 정국주도력 확보에 별로 보탬이 안된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은 김대통령에게 당적을 떠나 초당적 국정운영을 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최병렬 부총재도 “평화상이 정국과 절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과 함께 김대통령이 세계적인 정치 지도자로 부상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른바 ‘신 DJ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수상이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일관된 동방정책을 펼쳐 결국 독일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듯 김대통령 또한 퇴임 후에도 한반도 통일을 위한 역할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의미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디딤돌을 한층 더 다졌다는 차원에서 찾는 것이 순리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