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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 보낸 내 남편 찾아주세요”

북파공작원 가족들의 피끓는 절규…정부 ‘실체’ 부인으로 생사 확인·보상 깜깜

“북에 보낸 내 남편 찾아주세요”

“북에 보낸 내 남편 찾아주세요”
“선배님, 또 왔습니다.”

9월21일 서울 삼성동 봉은사. 절 내 충령각을 찾은 박부서씨(66)는 이곳에 봉안된 200여위의 위패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계급도, 직급도 없이 이름만 달랑 쓰인 이 위패의 주인공은 바로 박씨의 전우들.

박씨는 이른바 ‘북파 무장공작원’ 출신. 황해도 은율이 고향인 그는 18세 때인 1952년 10월 육군첩보부대(육군 4863부대·일명 HID) 제1교육대에 입대해 특수훈련을 받은 뒤 해상을 통해 북파됐다. 요인납치, 북한군 장비획득 등 공작임무를 1년여간 수행하고 귀환한 그는 그러나 54년 12월 제대 후 지문채취까지 당한 뒤 경찰에 인계돼 줄곧 사찰대상이 돼야만 했다. 그의 이런 궤적은 북파공작원 생존자들의 전형에 다름아니다.

이산가족 교환방문, 비전향장기수 북송 등 최근의 잇따른 남북교류에도 불구하고 북파공작원 문제는 아직 분단체제의 마지막 ‘그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진정한 남북 화해를 위해서라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둬서는 안될 현안이다. ‘남파간첩(공작원)’이 대다수인 장기수들과 대칭을 이룬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국전쟁 이후 북파됐다 사망-실종한 공작원은 군이 파악하고 있는 인원만 7726명. 이중 2150명은 60년대 이후 북파됐다. 북파는 53년 7월 종전 직후부터 72년 7·4남북공동성명 전까지 계속됐다. 공작원 대다수는 48년 국군이 미군과 별도로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 HID(Higher Intelligence Department)와 60대말의 AIU(Army Intelligence Unit) 소속.



현재 실종-사망된 공작원들의 위패는 봉은사와 강원도 양양의 영혈사, 서울 우이동 모 군부대 내 충령각에 봉안돼 있다. 그러나 이들을 찾는 발길은 거의 없다. 첩보부대를 유지해온 국군정보사령부 군인들이 6·25 등 기념일에 간혹 들를 뿐이다.

“왜 우리는 남편과 아버지, 형제, 자식의 생사 확인을 위해 목청 한번 높일 수 없습니까.” ‘드러나지 않는 국지전’을 위해 체제의 ‘소모품’으로 ‘활용’됐던 이들의 존재가 수십년전 잊혀진 그대로이듯, 그 가족들 또한 사무친 한을 가슴에 품은 채 30, 40년간 삶을 고난에 저당잡혔다.

윤정순씨(66·의정부시 장암동)도 그런 경우다. 그는 남편 이준영씨(68)의 사진만 바라보며 지난 39년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군제대 후 실업상태였던 이씨는 61년 7월 “HID에 입대한다”는 한마디만 남긴 채 소식이 끊겼다. 한달 후 “잘 있다”는 편지 한통과 두달치 생활비가 송금됐을 뿐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국방부에 애타게 남편의 생사확인을 호소했지만 “근거없음”이란 답변만 돌아왔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아들이 마흔이 되도록 윤씨는 생선 장사, 막노동 등으로 고난의 세월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당뇨 합병증과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 지금도 일당 1만7000원 하는 취로사업으로 근근히 생계를 잇고 있다.

이명숙씨(52·서울 이문동)의 큰오빠 이성구씨(71·해병대 출신)도 62년 “강원도 탄광에 돈벌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북파된 뒤 연락이 두절됐다. 집을 나선 지 얼마 뒤 “병역관계 서류를 떼서 보내달라”는 편지 한 통이 고작이었다. 편지를 근거로 국방부에 생사확인을 요청했지만 “자료가 없다”는 회신만 왔다. 이성구씨의 위패는 현재 영혈사에 있다.

강인모씨(51·인천시 용현동)는 지난 4월에야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발급된 선친의 전사확인서를 받을 수 있었다. 강씨의 아버지 강용재씨(1929년생)는 CIA한국지부가 창설한 미군첩보부대인 ‘잭’(Jack) 소속으로 북파됐다 53년 12월 황해도 근해에서 공작선에 불이 나 사망했다. 이마저 어렵사리 찾아낸 선친의 동료 이모씨(76)를 목격자로 내세워 청와대에 탄원한 결과였다.

“30여년간 혼자 수소문하며 헤매는 동안 그 어떤 국가기관으로부터도 전사 사실을 통보받은 적이 없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게릴라전을 수행한 대가가 기껏 철저히 ‘버림받는 일’뿐인가.” 강씨는 “국립묘지에 선친의 위패라도 모시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북파공작원 생존자 모임인 ‘한국첩보전전몰장병추모회’ 대표 박부서씨가 현재 소재를 확보한 공작원 가족은 10여 가족 안팎. 나머지 가족들은 현황 파악조차 안 되고 있다. 그들 상당수가 자신의 가족이 ‘북파간첩’이었음을 숨기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이를 보다못한 박씨는 지난 9월15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북파공작원의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냈다. 군인 신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정전협정과 함께 군번과 계급을 박탈당한 채 ‘민간인’ 신분으로 훈련받고 재북파된 공작원들의 대다수는 원래 군인 신분이었다. 뻔한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국가에 어떻게 애국심을 느끼겠는가.”

박씨는 자신도 당시 계급이 이등상사(중사)였으며 ‘S000201’이란 군번을 가졌다고 밝힌다. 일정한 편제로 조직화돼 훈련받고 총과 실탄, 수류탄, TNT로 무장해 전투를 벌인 공작원들이 어떻게 ‘비군인’일 수 있냐는 것이다. 군에 수소문해 받아낸 그의 ‘입대 후 경력기록’ 사본에는 귀대일자가 ‘무기’(無期)로 기록돼 있다. 적지에서 산화하라는 국가의 명령인 셈이다.

전사 사실이 인정돼 지난 94년 국립 현충원(대전)에 안장된 170여 공작원들의 비석에서도 그들의 계급과 군번은 찾아볼 수 없다. 비석 앞면엔 ‘육군 종군자 ○○○’, 뒷면엔 전사일자가 기록돼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사망 사유가 ‘전사’로 기록된 점. 1958년 교전 중 사망한 김윤탁씨의 경우 54년 원산 근처에서 한 인민군 대좌(대령)를 생포해 ‘북파 전과 1호’를 기록한 공작원. 그의 비석 뒷면엔 ‘1958년 전사’라고 표기돼 있다. 이미 53년 정전협정으로 공식적인 전쟁이 종결된 마당에 ‘전사’라는 표현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군당국이 사실상 대북 첩보전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박씨의 주장이다.

명예회복과 함께 공작원들의 생사 확인도 시급한 사안이다. 비록 시간은 흘렀지만 과거 그들의 행적을 목격했다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남파간첩 출신의 한 인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1959년 회색분자로 낙인찍혀 함경북도 제3노동교양소(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중 미군부대에서 훈련받았다는 20대 초반의 북파공작원 2명과 두만강변 철로보수공사에 투입돼 1년여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들은 ‘간첩 1, 2호’란 별명으로 불렸다”며

“북에 붙잡힌 북파공작원 중 생존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정부는 북파공작원의 ‘실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국방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자에게 “국방부는 북파공작원에 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며 보상문제도 보훈처와 협의한 적이 없고 계획도 잡혀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실체를 자인할 경우 무력도발을 못하도록 규정한 정전협정을 어겨 불법전투행위를 자행한 사실을 시인하게 되므로 이 때문에 대북관계에 상당한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다분히 엿보이는 대목이다.

국가보훈처도 공작원 문제의 언급을 회피하는 분위기다. 보훈처 심사정책과 관계자는 “50년대 실종-사망 북파요원에 대한 보상은 전(戰)사망자 처리를 통해 일부 이뤄졌다. 또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을 수 있는 전몰-전상 군경을 1959년 이전 전투 또는 이에 준하는 직무수행 중 사망이나 상이를 입은 자로 한정한 현행법상 60년대 이후 공작원들의 보상은 불가능하다”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방부가 북파공작원의 지위를 ‘계약직 비군인’에서 군인이나 군무원 신분으로 인정해주거나 국가유공자법을 개정하기 전에는 보상이 어렵다는 것이다.

10월1일은 건국 52주년 국군의 날이다. 그러나 ‘군인’도 ‘유공자’도 아닌 ‘돌아오지 않는 노병’들은 아직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다.



주간동아 2000.10.05 253호 (p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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