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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공대사碑 역마살 끼었나

신라 명필 金生의 글씨 기록된 문화재 불구 이리저리 유랑생활

낭공대사碑 역마살 끼었나

낭공대사碑 역마살 끼었나
비(碑)의 궤적을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무더위가 맹위를 떨친 지난 7월27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청량산의 한 자락을 붙들고 앉은 이 골짜기 마을엔 그러나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1)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는 비의 흔적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신라시대 고찰로 조선 중기에 이르기 전 일찍이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태자사 절터. 이곳에 있었다는 낭공대사비 대신 기자를 맞은 것은 비신(비의 몸체)이 달아난 채 남아 있는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와 이수( 首·용이 새겨진 비석 덮개돌). 수년간 손대지 않은 듯한 퇴락한 비닐하우스와 지난 93년 폐교된 태자초등학교의 낡은 건물 사이로 숨겨지다시피 놓인 이 석조물들은 한눈에 보아도 1000년의 풍상을 겪었음직한 것들이었다.

‘이 석조물은 신라 말기 왕사(王師)인 낭공대사의 백월서운탑비의 귀부와 이수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제작 연대는 확인 못함… (중략) …우리나라 금석학상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 안동시청이 석조물 옆에 세워둔 안내표지판은 이 귀부와 이수가 ‘경북도 문화재자료 68호’란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표지판 내용대로라면 이 귀부와 이수는 낭공대사비의 부속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청량산 일대 김생 유적을 답사하고 있는 대구의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67)는 “이 귀부와 이수는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낭공대사비의 것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씨의 말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낭공대사비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낭공대사비의 기구한 유전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식 명칭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인 이 비는 원래 신라시대 명필로 ‘해동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며 중국 송나라의 최고 명필 왕희지와 비견되던 김생의 글씨들을 고려 광종 때인 954년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해 새긴 비석. 명승이자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낭공대사(832∼916)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에 남겨진 낭공대사비의 운명은 순탄치 않다. 건립 당시 경북 봉화군 태자리(일제강점기에 안동 땅으로 편입됐다)의 태자사에 세워져 있던 이 비는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당시 영주군수 이항(李沆)에 의해 영주군청 정자인 자민루(字民樓) 앞으로 옮겨져 400여년을 보낸 것으로 비의 측면에 기록돼 있다.

제자리를 잃은 낭공대사비의 수난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이 비를 총독부 박물관이 있던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놓여 있던 이 비는 다시 1986년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의해 구 중앙청 건물로 이전해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창고로 옮겨진 후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

7월28일 기자는 낭공대사비의 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신광섭 유물관리부장(49)은 “낭공대사비 비신은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포장이 씌워져 있다는 이유로 사진촬영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의 도록을 보여줬다. 도록엔 가운데가 절단된 낭공대사비의 사진이 있었다. 인수 당시의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 박물관측의 답변.

중앙박물관엔 현재 12만여점의 소장유물 중 5000여점만 상설 전시되고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유물은 특별전시 계획이 없는 한 낭공대사비처럼 수년간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낭공대사비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가치는 매우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김생 글씨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신품(神品)으로 불릴 만큼 출중해 낭공대사비는 김생의 글씨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 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유물관리부 학예연구사 조용중씨(40)는 “우리나라 비석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수준이 높지만 수장고 내에 있는 전체 비석 수는 10점도 안 될 만큼 희소하다”고 말했다.

제자리를 떠나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낭공대사비엔 몇 가지 의문이 따른다.

총독부는 왜 낭공대사비를 서울로 옮겼을까. 조씨는 박물관에 남아 있는 각종 자료를 통해 낭공대사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했다. 그가 제시한 박물관 유물관리 카드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9년 6월11일 누군가로부터 이 비를 당시 돈 100원에 사들여 경복궁 정원에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구입했는지, 왜 구입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또 여러 금석학 문헌에서 밝히고 있는 ‘1918년’이란 비석 이전 시기도 1년이나 차이가 난다.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박물관측이 낭공대사비에 대해 아는 사실은 이 비가 191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진 이후 1959년에도 여전히 경복궁 정원에 있었고 1986년에 비로소 박물관 창고로 직행했다는 것 정도다.

다행히 낭공대사비는 조만간 ‘세상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측은 2003년 말 준공 목표로 서울 용산에 건립 중인 새 중앙박물관이 완성되면 낭공대사비를 일반에 공개할 전시계획을 잡아두고 있다는 것. 17년여에 걸친 ‘지하 유배생활(?)’을 끝내게 되는 셈이다.

이젠 귀부와 이수를 찾아보자. 박물관측은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는 원래부터 사라지고 없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현재 안동에 있는 귀부와 이수는 무엇인가. 안동시의 추측대로 낭공대사비의 것일까.

아쉽게도 중앙박물관측은 물론 대다수 학자들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석조물의 명예관리인인 태자리 주민 김점수씨(53)는 “일부 대학생이나 서예 동호인들의 현장 답사는 간간이 이어지고 있으나 전문 학자들이 찾아온 적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점에 의문을 품어온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는 이미 2년 전 귀부와 이수의 치수를 재보았다. 이씨의 실측 결과에 따르면 이 귀부와 이수에 맞는 비신의 크기(높이는 알 수 없다)는 폭 85cm, 두께 14.5cm. 중앙박물관측이 밝힌 낭공대사비의 실측 결과인 비신 높이 208.5cm, 폭 102cm, 두께 26cm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비석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도대체 태자사터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어떤 비석의 것일까. 그리고 그 비석은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동시 문화재계 관계자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래 태자사터엔 낭공대사비와 함께 통진대사(通眞大師)비라는 비석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며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이 통진대사비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장유물 중 통진대사비라는 것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중앙박물관측은 “해당유물 자체는 물론 그에 관한 기록조차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결국 언제인지 모르지만 귀한 비석 하나가 일찌감치 사라져버렸다는 얘기다.

어쨌든 같은 절터에 나란히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비석의 엇갈린 운명은 오랜 우리 문화재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혹 우리의 유물 조사연구가 너무 크고 화려한 유물들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두 비신의 크기 차가 확연한데도 아직 일부 문헌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가 낭공대사비의 것이라고 단정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국 잃어버린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를 찾는 일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인 또 다른 비석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일도 과제로 남는다. 문화재는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2000.08.10 246호 (p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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