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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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카루소, 디지털로 부활하다

  • 입력2006-02-15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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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의 카루소, 디지털로 부활하다
    테너 엔리코 카루소(1873~1921)의 새 음반이 나왔다. 이 말을 들으면 대다수 음악애호가들은 어리둥절할 것이 틀림없다.

    이미 80여년 전에 타계해서 고향인 나폴리에 묻힌 카루소가 무슨 재주로 새로운 음반을 녹음했다는 말인가. 그러나 RCA에서 내놓은 ‘카루소 2000’ 음반은 분명 그의 신보이자 신보가 아니기도 하다.

    이쯤 되면 적잖은 독자들은 이 음반이 디지털 편집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고단수의 ‘장난’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카루소 2000’에 수록된 곡들은 1906년부터 1920년 사이에 녹음된 카루소의 노래들과 1999년에 녹음된 오케스트라 반주의 혼합물이다.

    RCA의 프로듀서 로버트 워바는 카루소의 기존 녹음에서 오케스트라 반주를 모두 걷어내 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 빈 방송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새로운 반주를 덧입혔다. 오래된 녹음의 잡음들이 이 과정에서 말끔하게 사라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카루소의 음성과 오케스트라 반주가 완전히 똑같은 음을 연주할 때는 컴퓨터도 두 가지 소리를 분리해내지 못했다. 이 경우에는 빈 방송 오케스트라가 음량을 키워서 원래의 반주를 덮어 버렸다.

    ‘여자의 마음’ ‘청아한 아이다’ ‘오 낙원이여’ ‘의상을 입어라’ 등 오페라 아리아 16곡을 수록하고 있는 ‘카루소 2000’ 음반은 유럽보다 미국에서 환영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루소는 1903년부터 은퇴하던 1920년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대표하는 가수였다. 카루소가 세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시즌 개막공연 17회 출연기록은 지난해 플라시도 도밍고가 깨뜨릴 때까지 난공불락의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RCA는 이 음반을 필두로 카루소의 새 음반을 연이어 제작할 것을 검토중이다. 예를 들어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의 ‘3 테너’ 중 카레라스 대신 카루소를 넣어 새로운 3테너 음반을 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카루소의 노래를 음표 단위로 모두 해체한 뒤 재편집해서 완전히 새로운 노래를 구성할 수도 있다. 아예 가사의 언어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카루소의 목소리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이나 엘비스 프레슬리와의 2중창을 듣는 날이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성급한 예측이 과연 실현될지, 아니면 예측으로만 끝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카루소의 목소리로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듣기 전에 왜 음악애호가들이 한 세기 전에 타계한 카루소를 여전히 찾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보자.

    그것은 카루소의 노래가 가진 고답적인 뉘앙스, 현대의 가수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영웅적인 신비감에 대한 동경일 것이다.

    카루소는 20년이 채 못되는 짧은 전성기에 불꽃 같은 인상을 남기고 48세의 나이로 타계한, 오페라 무대의 제임스 딘 같은 존재다. 컴퓨터 기술로 제임스 딘을 스크린에 되살려 놓는다면 영화팬들은 과연 이를 환영할까? 마찬가지로 카루소의 신비감을 간직하고자 하는 음악애호가들에게 이번 ‘카루소 2000’이 반드시 반가운 선물만은 아닐 것이다.

    ‘카루소 2000’ 음반의 커버는 앤디 워홀의 팝 아트를 연상시키는 기법으로 그려진 카루소 초상화를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처럼 그려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카루소의 초상이 첨단 기술과 예술간의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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