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4

..

‘유럽 도감청’ 피고석에 선 미국

유럽연합, ‘에셸론’ 실체 공식화 …佛-獨 등 “입찰가격 등 정보 샜다” 암호변경 등 대책 고심

  • 입력2006-02-09 14: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유럽 도감청’ 피고석에 선 미국
    유럽연합이 2월22, 23일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전세계 통신시스템 감시장치에 대해 논의하면서 ‘에셸론’(Echelon)이라는 미국의 통신 도감청 장치의 실체가 공식화됐다. 특히 프랑스의 ‘르 몽드’는 2월23일자 신문에서 사설과 함께 1면 톱, 2∼3면 전부를 관련기사로 채워 미국이 어떻게 유럽을, 그리고 일반 개인들을 감시하고 있는지 상세히 보도했다. 미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구상의 모든 일들을 손바닥 보듯이 감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첩보영화 속에서나 있음직한 얘기들이 구체적인 증거들과 함께 현실로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놀랄 만한 현실 앞에서 유럽 각국이 보인 반응은 경악이나 충격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대부분의 국가가, 미국처럼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을지라도, 각자 고유한 통신 감시체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의 에셸론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알려진 일종의 공개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전화-이메일 등 하루 200만개 도청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의회는 이미 98년 가을 에셸론에 대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증거 불충분으로 인해 에셸론의 존재 여부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할 수 없었다. 르 몽드 보도에 의하면 이 장비의 존재가 명확해진 것은 99년 가을 호주의 한 비밀요원이 개인의 전자메일에 대해 검열이 가능한 시스템의 존재를 영국 BBC에 알리면서부터다.

    미국의 전세계 통신감시시스템은 구소련의 정치-외교-군사 관련 통신을 도감청하기 위해 1947년 미국 국가안보위원회(NSA) 주도로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5개국이 ‘유쿠사’(UKUSA)란 이름의 비밀협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문제의 에셸론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70년대 이후 그 성능이 급격히 향상됐다.



    99년에 유럽의회에 제출된 ‘미국의 도청능력’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청장비는 무선전파 설비로, 60년대 초에 이미 유럽지역의 도청 안테나가 터키 이탈리아의 미군기지와 영국에 설치됐다. 70년대 초부터는 인공위성과 해저케이블이 도청장비로 이용돼 영국의 위성기지가 대서양과 인도양 상공에서 교환되는 통신을, 지중해 해저케이블이 유럽과 서부 아프리카간의 통신을 담당했다. 자기장이 없는 공간에서는 광섬유가 도청에 활용된다. 90년대 초부터는 인터넷상에서 공개 사이트들이나 메일 교환 등을 검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다. AP통신이 에셸론에 관한 광범위한 보고서를 작성한 영국인 캠프벨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프로그램들과 IBM이나 미국의 컴퓨터프로세서 생산 거대기업들의 제품들이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이용되고 있다.

    에셸론 시스템은 첩보위성 120여개를 골격으로 해 전화 팩시밀리 무선통신 이메일 등 모든 종류의 통신을 하루에 200만여개까지 도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이용해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르 몽드에 따르면 에셸론 설비는 유쿠사 협정 관련 5개국뿐 아니라 독일과 일본에도 존재한다. 또한 도청된 모든 정보는 미국 안보보장위원회로 보내져 정보의 구분, 번역, 선택 과정을 거쳐 백악관을 경유해 필요한 경우 일반 기업들에까지 전달된다.

    유럽연합이 직접 나서 이 문제를 논의할 정도로 유럽을 들끓게 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냉전 당시 외교-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돼 온 미국의 통신도청시스템은 미-소간 경쟁과 갈등의 시대가 끝나면서 경제적 첩보활동에 이용되기 시작됐다. 미국의 상업적 이해관계를 위해 라이벌인 유럽국가들의 정치가와 주요 기업들, 개인들의 통신활동이 에셸론의 주요 타깃이 된 것이다. 현재 확인되는 에셸론 설비들은 관련국가 영토내 11개 장소에 배치되어 있고, 이중 유럽을 담당하는 영국 요크셔의 맨위드 힐(Menwith Hill)에 있는 설비가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에셸론이 산업스파이 활동에 이용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물론 프랑스다. 프랑스는 90년대 중반 군수산업체인 톰슨사가 브라질에 레이더망을 판매하려 했을 때와, 에어뷔스사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항공기를 팔려고 했을 때 입찰가격을 도청당해 미국의 군수산업체와 보잉사에 입찰경쟁에서 패배했다. 르 몽드는 WTO(세계무역기구) 회담 당시에도 에셸론을 이용한 정보수집으로 미국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고 보도했다.

    독일 기업들 역시 도감청의 피해자였다. 풍력발전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업인 독일 에네르콘(Enercon) 기업은 95년 미국 텍사스주에 풍력발전기를 판매하려다 계약 직전에 미국의 국제무역위원회(ITC)와 캘리포니아 법원에 의해 기업 내부의 다른 활동이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했다고 고발당해 미국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난 2월 유럽연합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영국의 역할 문제는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무엇 보다도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가 에셸론이 유럽에서 경제적 목적의 첩보활동에 이용됐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이터 통신은 “정보기관들은 법의 틀 내에서 활동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것에 만족한다”는 영국 고위관료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재 영국의 법률이 국가안전이나 주요범죄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경제문제에도 감청을 허락하고 있으며 이러한 감청허용 기준이 영국의 산업스파이 활동을 은폐할 수 없게 한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에셸론과 관련된 영국의 역할이 비공식적이나마 확인되고 있지만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영국을 포함해 어떤 관련국에 대해서도 비난을 삼가기로 했다. 유럽의회가 유럽연합 집행위에 권고한 것은 앞으로 에셸론에 맞서 유럽의 이해관계를 보장할 실질적인 방법을 연구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럽연합본부 내 논의의 초점은 두가지로 모아졌다.

    첫째, 경제전쟁의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는 미국의 통신망 감시시스템을 방해하면서 유럽연합 국가들의 이해를 보호할 유럽 차원의 새로운 암호체계 확립이다.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정보를 지키기 위해 이미 각종 정보를 새로운 암호코드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기존에 외교나 군사 분야에만 사용되던 암호화 작업이 주요 기업들의 민감한 정보들에까지 확대됐다. 여성 법무부 장관 엘리자베스 기구는 이미 지난 1월 하순의 하원 연설에서 “정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들이 위성을 통해 중계되는 모든 통신활동의 내용에 주요 정보를 결코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둘째, 첨단 도청 장비들이 시민들의 주요 권리들 가운데 하나인 개인 사생활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유럽 차원에서 새롭게 입법화하는 작업이다. 유럽의회 산하 ‘시민의 권리와 자유 위원회’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결정됐다. 사생활의 자유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 양도할 수 없는 인간 개개인의 소중한 권리라는 사실이 유럽의회 의원들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된 것이다.

    시애틀 뉴라운드협상 등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신경전을 벌여온 유럽과 미국은 이번 ‘에셸론 파동’ 에서도 여전히 미묘한 갈등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밀고당기는 다자간 협상과 달리 에셸론 사건에서만큼은 유럽이 보다 명확한 피해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이러한 가해자-피해자 논쟁보다 중요시하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이 무엇보다 고귀하게 취급돼야 한다는 진리인 것 같다. 이는 유럽이 미국의 공세에도 끄떡하지 않는 자존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