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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벤처열풍과 한국경제

벤처, 희망인가 무덤인가

코스닥 거품론·제조업 천덕꾸러기론·장기호황론 집중해부…“2, 3년내 벤처 구조조정될 것”

벤처, 희망인가 무덤인가

벤처, 희망인가 무덤인가
2000년에 접어들면서 벤처기업 숫자는 이미 5000개를 넘어섰다. 1월말 현재 중소기업청이 집계하고 있는 벤처기업 숫자는 모두 5212개. 불과 1년전인 98년 12월말 2000개를 겨우 넘었던 것에 비하면 1년 남짓한 기간에 벤처기업은 두 배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자연스레 ‘벤처 거품론’도 제기되고 있다.

코스닥 시장, 거품인가 아닌가

코스닥시장의 시가총액은 이미 100조원을 오르내리고 있다. 시가총액으로만 보면 99년 1월 8조원 정도에서 1년만에 무려 10배 이상 늘어났다. 이미 거래소 시장의 30% 수준을 차지하고 있는 것.

‘코스닥 거품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들이대는 논거는 바로 이 시가총액 규모가 실제 기업가치에 비해 과대평가돼 있다는 것이다. 해당 기업의 실제가치를 반영하는 적정가격보다 부풀려진 시장가격은 언젠가는 꺼질 수밖에 없고 거품이 터지면 시장가격은 폭락하게 마련이다. 코스닥시장이 상한가 행진을 계속하면서 이러한 우려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가 하면, 벤처기업이란 미래가치를 위주로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의 시가총액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해서 거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맞서고 있다.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에서 최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유승민박사는 정부가 거품론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벤처기업 진흥을 위한 인프라에 돈을 쏟아붓는 것은 모르겠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이나 연구실에만 있던 교수들에게 무이자나 저리 융자 자금을 대주는 것은 위험하다. 누군가 망하고 난다면 그때부터 정부는 책임론 때문에라도 시장에서 발을 빼기 힘들 것이다.”

반면 경제정보 전문업체인 와이즈인포넷의 김철환박사는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는 기업을 평가하는 잣대가 달라진 것이다”고 주장했다. 코스닥시장을 거품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코스닥시장에 몰리는 유동성을 거품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인터넷 비즈니스에 뛰어든 온라인 기업들은 과거의 전통산업과는 모델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매출액과 수익률 위주의 전통적 잣대로는 평가하기 어렵다는 논거를 깔고 있다. 온라인기업은 매출액이 늘어날 때마다 투입 비용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출액과 수익률만으로 기업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수석연구원은 인터넷 기업과 전통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한국과 미국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엔 마이크로소프트나 시스코처럼 뚜렷한 성과를 내면서 시장을 주도하는 몇 개의 기업이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 코스닥시장에 국가경제를 짊어질 만한 선도 기업이 과연 있다고 보는가.”

결국 그렇다면 ‘대박’을 터뜨리는 스타급 벤처기업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에 현재의 코스닥시장이 거품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달려 있는 셈이다. 아무튼 코스닥에 몰리는 돈뭉치는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한 벤처기업들에 낙타가 들어가야 할 바늘구멍의 크기를 넓혀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코스닥시장과 관련한 정부의 역할에는 각종 주문사항이 줄을 잇고 있다. 물론 코스닥 열풍은 저금리 기조가 지속됨으로써 기댈 언덕을 찾지 못한 시중 자금이 자연스레 몰리면서 생겨난 현상이지만 정부가 ‘벤처입국’ ‘임기내 벤처기업 2만개 육성’ 등을 내세우면서 기름을 부은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강대 조윤제교수(경제학)는 코스닥시장에서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의 역할은 공정한 거래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에 맞추어져야 한다. 투자자를 호도하거나 투자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정부가 이러한 것들을 눈감아주게 되면 결국 그 피해는 납세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유승민박사도 “현재 코스닥시장에는 사기성이 농후한 불투명한 정보들이 난무하고 있다. 단기적 충격이 있더라도 코스닥시장에서 회계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강, 전기-전자, 섬유 등 지난 30년간 한국 경제 성장의 엔진 역할을 해왔던 제조업 종사자들은 요즘 힘이 빠진다. 인력이나 자금 모두 벤처기업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제조업은 이제 천덕꾸러기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대학 졸업예정자들이나 한참 일할 나이의 30대 직장인들이 제조업을 기피하는 현상은 제조업 종사자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서울의 명문대 K교수(경영학)의 최근 경험담은 이런 현실을 잘 설명해 준다.

“4년 중 절반을 장학금을 받고 다니던 한 학생이 졸업을 앞두고 찾아왔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돼 가는 시점이라 삼성 현대 등 대기업에서 추천의뢰도 상당히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몇 군데 추천서를 써주려고 했지만 대기업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코스닥에서 상한가를 치고 있는 S사나 D사에 추천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최근 각광받는 벤처기업에 인맥이 없으면 학생들도 교수를 얕보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경제전문가들은 제조업 분야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반도체, 조선, 철강 등 지난 10여년간 한국경제의 성장을 주도해 온 산업군이 앞으로도 경제성장을 이끌어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우천식박사도 “한국의 제조업 성장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고부가가치화가 필요한 부분도 있고 싱가포르 네덜란드 아일랜드 등 선진국 사례들도 결국 제조업에서 뚜렷한 실적이 안나올 경우 선진국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이미 향후 10여년간 국내산업의 주축을 이룰 부문은 △전기-전자 △자동차 △화학 △기계 △섬유 △정밀기기 등 기존의 6대산업이라고 단정짓는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첨단 전자 산업이나 생명과학, 신소재 등 이른바 첨단기술산업은 주로 자본재나 중간재 개발, 생산에 집중되어 있어 부가가치창출이나 고용창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수석연구원은 “인터넷 관련 산업의 가능성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벤처 비즈니스에만 매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벤처 열풍에 가려 국가경제의 대동맥을 이루는 제조업 분야가 자금이나 인력 배분에서 소외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국책 연구기관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KDI 우천식박사는 “일반 물리학이 뒷받침되어야 신소재 산업도 뜨고 생명공학 산업도 발달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물론 제조업 분야에서도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한 고부가가치화가 필요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 산업을 온라인화하는 작업 역시 더욱 가속화돼야 할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의 경기 순환 이론을 비웃으며 무려 9개월째 계속되는 미국 경제 장기 호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신경제’론은 정보통신산업의 주도적 역할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벤처 입국’으로 표현될 정도로 정보통신 열풍이 일고 있는 한국 경제에도 이러한 미국식 모델이 적용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한국식 신경제의 과제’라는 보고서에서 한국식 신경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보통신 기술 투자 및 활용 강화 △한은 독립성 확보 △지나친 원화절상 억제 △정리해고 규제 완화 △벤처 캐피털 활성화 등 다섯 가지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LG경제연구원 오문석연구위원은 “결국 신경제의 핵심은 생산성이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서도 전반적인 생산성 향상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미국을 단순 비교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부총리를 지냈던 김종인 전청와 대경제수석은 “원천 기술에 있어서 절대적 우위를 보이는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이야말로 미국에서 군사 목적으로 개발된 것인 만큼 비용 개념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과감한 투자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대우경제연구소 주 윤 연구위원은 “미국 기업들이 80년대에 단행했던 경영혁신이 90년대 신경제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생산공정의 효율성이나 경영 능력 면에서 선진국과는 격차가 분명한 상황인데 이를 순식간에 따라잡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 최근까지 배럴당 30달러를 넘나들고 있는 유가상승 움직임 등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 역시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는 작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물가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면 당연히 통화당국은 통화 환수에 나서려고 할 것이고 코스닥을 중심으로 열기를 더하고 있는 자본시장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가안정과 성장이 공존하는 신경제 모델은 적지 않은 난관에 부닥칠 것이다.

결국 최근 한국 경제를 들뜨게 하고 있는 정보통신 산업의 비약적 성장은 물가안정과 함께 진행되는 고성장 장기 호황시대를 의미하는 신경제를 이룩하는 데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2, 3년 안에 벤처에도 반드시 구조조정의 시기가 도래하리라는 것이다. 불과 몇년 전 모든 대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뛰어들었던 이동통신 진출 시장 러시가 최근 들어 신세기통신 인수 등을 거치면서 구조조정을 맞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또 ‘대다수 몰락, 극소수 성공’은 거부할 수 없는 ‘벤처’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수많은 벤처기업이 몰락하고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억대의 스톡옵션으로 벤처행을 선택했던 젊은 인력들이 다시 거리로 나설 때 바로 이를 ‘코스닥 거품론’의 증거로 들이댈 수 있을 것인가. 거품론자들이 이런 시나리오를 펴며 좋아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개별 기업의 가치는 급등락을 거듭하겠지만 이는 거품의 붕괴라기보다는 오히려 벤처기업을 둘러싼 시장 메커니즘이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 증거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벤처 신화는 성공의 열매를 따기 전에 실패의 쓴맛을 보면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주간동아 224호 (p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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