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8

2016.05.18

북한

7차 당대회로 본 북한 핵 전략

유럽에서 찾아낸 최적 소프트웨어…‘부산항 공중 핵폭발’이 의미심장한 이유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6-05-13 1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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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공화국은 책임 있는 핵 보유국으로서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핵으로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이미 천명한 대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국제사회 앞에 지닌 핵 전파 방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세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7차 당대회 3일 차였던 5월 8일 대표자 전원 찬성으로 채택했다는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결정서. ‘우리의 조국을 ‘동방의 핵 대국’으로 빛내어나갈 것’을 강조한 당대회였던 만큼, 5만5000자에 가까운 결정서 곳곳에는 핵과 관련한 언급이 알알이 박혀 있다.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강조한 이 문단은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대목. 중국과 인도 등 기존 핵 보유국이 공통적으로 채택한 ‘핵 선제 불사용(No First Use)’과 ‘핵 비확산(Non-proliferation) 원칙’을 따르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들과 동등한 지위임을 자임하려는 취지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조항이다. 통상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은 ‘상대가 우리를 핵으로 공격하지 않는 한 우리가 먼저 핵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구성된다. 다른 비핵국가들에게 ‘당신들에게는 핵을 쓸 일이 없으니 핵 개발에 나서지 말라’는 메시지이자, 핵 보유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이를 핵전쟁으로 비화하지는 말자는 약속의 촉구다. 반면 북한이 사용한 문구는 뒤집으면 ‘자주권을 침해하면 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자주권 침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언급이 없다. 언뜻 선제 불사용 원칙을 흉내 낸 듯 보이는 이 문장이 실은 선제 사용이 가능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유다.

    이 간단한 차이에는 실제로는 전혀 간단하지 않은 배경이 담겨 있다. 바로 ‘확전의 주도권(Escalation Dominance)’ 문제다. 기존 핵 보유국들은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을 통해 재래식 전쟁을 핵전쟁으로 확전하지 말자는 묵계를 맺으려 하지만, 평양은 전쟁이 벌어지면 언제든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방아쇠를 쥠으로써 개전 후에도 김정은 체제의 생존을 지켜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북한이 그간 다양한 ‘핵 보유 선배’들의 운용전략을 심도 있게 연구해 만들어낸 최선의 핵 운용전략이다.





    선제 불사용인 듯 선제 불사용 아닌

    잠시 개념을 정리하자. 서구 전문가들은 흔히 강대국 핵 운용교리의 가장 큰 두 줄기를 ‘응징억제(Deterrence by Punishment)’와 ‘거부억제(Deterrence by Denial)’로 나눈다. 공격을 받으면 훨씬 큰 보복을 가하겠다고 위협해 상대의 결심을 어렵게 만드는 게 응징억제의 논리구조라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함으로써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거부억제의 얼개다. 이 때문에 응징억제는 주로 인구나 산업시설이 밀집된 전략목표를 타깃으로 설정하고, 거부억제는 상대의 주력 부대나 군사기지 같은 전술목표를 타깃으로 정한다.

    냉전 초기에는 당연히 응징억제만이 유일한 시나리오였다. ‘한 발이라도 발사되면 모두가 함께 죽는다’는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MAD)가 대표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핵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르는 순간 나 역시 상대로부터 핵 보복공격을 받아 파멸을 피할 수 없게 되므로 오히려 우리 측에서 핵 사용을 주저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지난한 토론을 거쳐 비로소 ‘핵을 이해하게 된’ 미국 측 전략가들이 만들어낸 고도로 정교한 개념이 제한핵전쟁(Limited Nuclear War·LNW)이었다. ‘소규모 전술핵으로 서로의 주요 전력을 격파해나간다’는 거부억제의 극단적 전쟁 수행 방식이다.

    이렇게 보면 ‘워싱턴 불바다’로 상징되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경로는 그간 전적으로 응징억제를 향해 달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 전역은 물론 일본열도를 사정권에 둔 스커드·노동미사일을 완성한 후에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온 흐름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적의 핵심을 타격해 최대의 충격을 노린다’는 원칙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시절부터 북한의 군사전략 DNA에 뿌리 박힌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냉전 기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핵 전략을 연구해온 미국 측 전문가들은 평양의 이러한 주장을 평가절하해왔다. 당장 ICBM에 핵을 장착할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완성한다 해도 압도적인 수량의 핵무기를 가진 자신들을 상대로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한 발이라도 더 많은 핵을 가진 쪽이 확전 여부를 결정한다’는 핵 억제전략의 오랜 공리(公理)다.

    당대회 사업총화 결정서에 드러난 북측의 핵 운용교리는 바로 이러한 미국 측 인식에 균열을 가하겠다는 회심의 한 수다. 미국은 더 많은 핵을 가진 쪽이 확전을 결정한다고 믿지만, 자신들은 재래식 전장에서도 얼마든지 먼저 핵을 사용해 확전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 이 경우 전쟁이 벌어진 후에도 최소한 ‘패배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계산이다.

    예를 들어보자. 전쟁이 벌어져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대규모 핵 타격을 가한다면 평양 역시 미국의 강력한 전략핵 보복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위력이 약한 전술핵으로 남측 후방 군사기지나 미군 전시 증원 통로를 타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미국이 평양에 대규모 핵 공격으로 응징할 경우 북한 역시 서울 등을 상대로 핵 보복에 나설 공산이 크기 때문.

    이를 감수하기 어려운 한미 양국은 공격당한 군사시설에 상응하는 북측 후방 군사기지에 전술핵 보복을 가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공산이 커진다. 바로 이러한 상황 전개가 앞서 설명한 제한핵전쟁의 기본 전개 방식. 미국과 소련이 서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등의 군사시설만 제한적으로 타격하고, 워싱턴이나 모스크바 같은 전략 핵심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보복은 피하는 핵전쟁 수행교리다.

    3월 10일 평양이 진행한 단거리미사일 발사훈련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당시 ‘조선중앙TV’는 이 훈련이 ‘해외침략무력이 투입되는 적 지역의 항구들을 타격하는 것으로 가상하여 목표지역의 설정된 고도에서 핵 전투부(탄두)를 폭발시키는 사격방법’으로 실시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간 ‘워싱턴 불바다’ ‘서울 불바다’ 등 응징억제 개념에 입각한 언급은 부지기수로 쏟아냈지만, 핵무기를 전시 증원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부억제 용도로 사용할 것이라는 언급은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평양이 제한핵전쟁 개념을 흉내 내려 시도한 첫 행보인 셈이다.

    실제로 핵 개발 국가는 대부분 초기에는 상대 수도를 주로 노리지만, 핵과 미사일 능력이 일정 궤도에 오른 뒤 거부억제로 초점을 옮기는 패턴을 보였다. 고위력 핵탄두와 ICBM에 집중하던 나라들이 10kt 내외 전술핵 개발에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3~4월 북한이 과시하느라 바빴던 무기체계 가운데 상당수가 이러한 거부억제용 전력이라는 점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3월 2일과 21일, 29일 세 차례 실시한 300mm 방사포 발사와 4월 1일 발사한 KN-06 지대공요격미사일이 대표적이다.

    이번 당대회 사업총화 결정서가 ‘국방공업 강화’를 주문하며 거론하는 무기체계 역시 딱 두 가지, 전술핵과 대공방어미사일이다. ‘핵무기의 소형화·다종화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는 한편, ‘국가 반(反)항공 방어체계를 좀 더 높은 전략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언급이 그것이다. ‘워싱턴 불바다’를 위한 핵전력은 이미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이제는 ‘전쟁에서 써먹을 수 있는 핵무기’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겠다는 취지. 서두에서 살펴본 ‘선제 불사용 아닌 선제 불사용 언급’과 동전의 앞뒤처럼 이어진 논리구조다.



    ‘패배하지 않는’ 전략

    확전의 방아쇠를 손에 쥠으로써 전쟁이 터진 후에도 참혹한 패전은 피하겠다는 이러한 전략을 북한이 처음 고안해낸 것은 아니다. 냉전 시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국가들이 채택했던 유연반응전략(Flexible Response Strategy)이 바로 이 같은 방식이었다. 압도적인 핵 전력을 갖춘 옛 소련과 재래식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언제든 이를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함으로써 패전을 막겠다는 계산식이다. 주인공이 옛 소련에서 미국으로, 무대가 중부 유럽 평원지대에서 부산과 포항 등 남한 항구로 바뀌었을 뿐 개념 자체는 동일하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이러한 전략이 세 차례에 걸친 무수단 발사 실패로 미 본토에 대한 핵 타격 능력이 극히 의심스러워진 현재로서도 얼마든 구사할 수 있는 옵션이라는 점이다. 5월 6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한미 양국은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해 노동 등 중거리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국방부는 공식 인정을 꺼리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북한이 이미 입증한 기술과 미사일만으로도 남한 전역에 핵 공격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다는 의미다.

    결국 당대회를 전후해 일단을 드러낸 평양의 핵 운용교리는, 미 본토를 타격할 ICBM 능력이 완성되기 전에라도 핵을 군사적으로 활용할 길을 열겠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의 결정서에서 경제 등 다른 부문에 대한 언급이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과 는 전혀 다른 정교한 계산의 결과물이다. 조악한 핵무기 1~2기로 서울, 도쿄를 인질로 삼는 초보적인 전술 대신, 미·소는 물론 옛 유럽 사례까지 뒤져가며 핵무기라는 하드웨어를 활용할 최적의 소프트웨어를 날카롭게 벼려온 셈이다. ‘동방의 핵 대국’을 향한 그 집요한 노력 앞에서, 우리만이 무심한 채 남아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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