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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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꾸러기야, 순한 양이 돼라”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3-02-12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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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썽꾸러기야, 순한 양이 돼라”

    박헌영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양면 죽천2구(위).죽천1구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양 석상은 박헌영의 고향마을인 죽천2구 쪽을 향하고 있다.

    충청도 양반’ 하면 흔히 ‘점잖은 사람’의 대명사처럼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충청남도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한용운, 김좌진, 유관순, 윤봉길 등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사실 충남 지방의 산세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위엄과 강기(剛氣)를 지닌 땅’이라는 게 공통적인 품평이다. 점잖음과 굳셈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충남이 배출한 숱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아직도 입에 담기를 꺼리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남한과 북한 모두가 배척한 박헌영이 바로 그다. 1900년 5월1일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서 영해 박씨 박현주와 서산 출신의 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박헌영은 첩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인 박현주가 본처와의 사이에 열 살 난 아들을 두었음에도 집안에 딸이 없다는 이유로 첩을 들였던 것. 그러나 첩은 딸이 아닌 아들 헌영을 낳았다.

    박헌영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와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때 미국 유학도 꿈꾸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면서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됐다. 1945년 광복 이후 남로당 당수를 지냈고 월북해서는 북한 부수상까지 지냈으나 1955년 김일성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현재 그의 고향인 예산군 신양면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면사무소에 그의 호적이 없는 데다 친척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박헌영으로 인해 집안 전체가 ‘멸문’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해 박씨 문중에서 1966년 족보를 다시 만들 때도 박헌영이란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렸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박헌영에 대한 언급을 꺼린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생가조차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예산군 신양면 죽천2구라고도 하고, 신양면 면소재지라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죽천2구가 원래 박헌영의 아버지가 살았던 곳이고, 신양면 소재지는 박헌영의 어머니가 본가에서 나와 주막집을 차렸던 곳이라는 점이다.



    박헌영의 고향을 답사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죽천2구와 이웃해 있는 죽천1구 마을회관 앞에 양(羊) 석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마을사람들은 어느 문중에서 무덤 석상으로 쓰다가 버린 것을 주워와 회관 입구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입지를 보면 우연 이상의 어떤 상징이 담겨 있는 듯하다. 우선 양 석상이 정확하게 박헌영의 고향마을인 죽천2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방향이 미방(未方)이다. 미는 십이지상 양(羊)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영해 박씨 문중뿐 아니라 고향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한 세기의 말썽꾸러기”(박갑동씨의 표현)에게 ‘순한 양이 돼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을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것을 ‘말(馬)’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왜 말로 표현할까? 한국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를 겪었던 고향사람들은 그가 1900년 경자(庚子)생 쥐띠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쥐를 상징하는 십이지의 ‘자(子)’는 말을 상징하는 ‘오(午)’와 상극관계다. 박헌영의 기운을 눌러서 이기라는 의미일 수 있다.

    물론 양 석상을 세운 것도, 양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미향(未向)인 것도, 또 양을 말로 생각하는 것도 모두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풍수는 땅과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빚어지는 숱한 사연들이 어떻게 현상(現象)하는가를 살피는 학문이다. 그래서 풍수가의 눈에는 박헌영의 고향마을을 바라보는 양 석상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 박헌영으로 인한 상처의 반영으로 보이는 것이다.



    실전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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