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36

2022.04.22

윤석열 당선인이 지역 순회 첫 행보로 남인의 후예 ‘안동 유림’ 찾은 까닭은?

파평 윤씨 10대조 종조부 ‘윤증’으로 이어진 탕평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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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입력2022-04-2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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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가운데)이 2월 11일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을 방문해 파평 윤씨 파평 윤씨 계통 주요 내용 종친회 윤시오 회장(왼쪽)과 파평 윤씨 죽호공 51대 종손 윤철재 씨로부터 족자를 선물 받았다. [동아DB]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가운데)이 2월 11일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을 방문해 파평 윤씨 파평 윤씨 계통 주요 내용 종친회 윤시오 회장(왼쪽)과 파평 윤씨 죽호공 51대 종손 윤철재 씨로부터 족자를 선물 받았다. [동아DB]

    “저를 안동의 아들, 경북의 아들로 생각해주십시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4월 11일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을 방문해 유림 인사들에게 “비록 태어나진 않았지만 안동과 경북을 고향과 같이 생각한다”며 한 말이다. ‘◯◯의 아들’ ‘◯◯의 딸’ 등은 정치인이 선거 전후로 으레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날 윤 당선인이 말한 “안동의 아들, 경북의 아들”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윤 당선인의 문중인 파평 윤씨 집안이 안동지역 유림들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백의정승 윤증

    파평 윤씨와 안동 유림의 인연은 35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윤 당선인의 10대조 종조부인 명재 윤증(尹拯·1629~1714)이 시작이다(표 참조). 윤증은 조선시대 유학자로 파평 윤씨 가문의 25세(世)다.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의 모친은 윤선거-윤증으로 이어지는 직계다.

    윤증은 ‘소론’의 영수로 평생 지방에 거주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아 ‘백의정승’으로 불렸다. 임금이 여덟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사양했다. 이조참판과 공조판서는 물론, 우의정까지 제수했으나 모두 고사했다. 그 대신 윤증은 고향에서 문중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는 지금도 1643년 지어진 문중 자제 교육기관 종학당이 있다. 윤 당선인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정년퇴직 후 이곳에서 2년간 후학을 가르친 바 있다.

    윤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9월 13일에도 안동을 방문해 지역 유림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윤증이 언급됐다. 당시 박원갑 경상북도향교재단 이사장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명재 윤증 선생 후손으로 영남과 관계가 깊다”며 “사색당파 시절 특히 영남 남인에 대한 탄압이 있었을 때 명재 선생이 이를 저지해 몇몇 선비의 문중이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이날 자리에 있던 안동 유림들 역시 “350년 전 윤증 선생에게 진 빚을 이번에 우리가 윤 후보에게 갚아야 한다”고 말하며 윤 당선인을 지지했다.



    안동 유림들이 윤증을 언급한 배경에는 그의 ‘탕평 철학’이 있다. 윤증이 살았던 때는 붕당 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예송 논쟁과 각종 환국도 이때 발생했다. 집권한 정파는 상대 정파를 역모 혐의 등으로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율곡 이이가 문묘에서 출향된 일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정서가 만연한 시기, 윤증은 상대 정파였던 남인을 배척하지 않고 “공생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였다.

    윤증의 탕평 정신은 경신환국 국면에서 두드러졌다. 우암 송시열을 필두로 집권 세력이던 노론이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을 주장했다.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온건론을 내세우며 이에 정면으로 맞섰다. 윤증은 1683년 숙종의 부름으로 경기 과천시까지 왔으나, 박세채에게 ‘3대 명분론’을 전한 후 도로 귀향했다. 3대 명분론의 첫 번째는 ‘남인과 서인의 화해’였고, 두 번째는 ‘정치에 부당하게 관여하는 외척 축출’, 세 번째는 ‘반대 당 사람 등용’이었다. 당대로서는 파격적 제안이었다. 당시 남인 다수가 영남에 터를 두고 생활했는데, 윤 당선인이 만난 안동 유림들도 이들의 후예다.

    당시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묘문을 두고 비화한 ‘회니시비’로 송시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집권 여당의 대표였던 송시열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었지만 “바른말을 해야 한다”는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윤증이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바른말을 한 덕분에 영남 남인은 일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통합과 협치로 나아가야”

    ‘은진 송씨’ 문중과 관계는 이후 잘 마무리됐다. 두 문중의 냉각된 관계는 후대 노력으로 풀렸다. 그 중심에는 송시열의 후손인 송종의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의 노력이 있었다. 송 이사장이 1991년 대전지검장으로 부임하자 파평 윤씨 문중 사람들은 긴장했다. 송 이사장은 4월 20일 기자와 통화에서 “당시 ‘송시열의 후손이 검사장을 지낸다는데 혹여 문중에 큰 해가 발생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파평 윤씨 문중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파평 윤씨 관련 문제가 있을 경우 나에게 즉각 보고하라고 했다. 관련 사건들이 되도록 원만히 해결될 수 있게 신경 썼다”고 덧붙였다. 송 이사장을 비롯한 후대 노력으로 구원(舊怨)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안동 유림들을 만나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통합과 협치’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윤 당선인은 주변에 여러 번 당시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는 4월 14일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윤진식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등 특별고문과 오찬에서도 “지난해 그분들(안동 유림)의 이야기를 듣고 (당선 후) 제일 먼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역 순회 첫 행선지로 안동을 택한 이유다.

    차기 정부를 꾸리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이어졌다. 윤 당선인은 공·사석에서 윤증의 탕평 철학을 언급했다고 한다. “통합과 협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윤 당선인은 과거 임금의 부름을 받은 윤증이 ‘남인 등용’을 요구한 사실을 언급하며 “지금으로 치면 총리 지명을 받았는데, 부총리는 다른 당파 사람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격”이라 말했다고 한다.

    내각 인선 과정에서도 이 같은 고민이 없지 않았다. 윤 당선인의 한 측근은 “2차 내각 후보까지 정한 후 (윤 당선인이) ‘남은 농림축산식품부,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호남 쪽에서 찾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역 안배보다 실력을 중시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용적 가치를 우선시하다 보니, 분배 가치가 다소 밀려났다는 설명이다. 다만 해당 관계자는 “주요 각료 인사가 남은 만큼 국민이 좀 더 지켜봐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윤석열 사전에 정치보복 없다”

    2월 16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광주 송정매일시장 앞 유세 현장에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동아DB]

    2월 16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광주 송정매일시장 앞 유세 현장에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동아DB]

    윤 당선인은 대선 기간부터 보수 정당이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온 호남지역에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등 ‘통합’을 표방해왔다. 수차례 호남을 찾아 지지를 호소한 것은 물론, 보수 정당의 텃밭인 대구에서도 호남을 외쳤다. 윤 당선인은 2월 18일 “내가 왜 (대구) 달성에 와 광주 이야기를 하느냐면 민주당이 잘되고, 호남도 잘되는 것이 우리 국민의힘에도 좋고, 또 이 달성에도 좋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이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윤 당선인이 호남을 거듭 찾으면서 당내 일각에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회의적 시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결과 이전 보수 정당 후보들과 비교할 때 광주(12.72%), 전남(11.44%), 전북(14.42%) 등에서 높은 득표율을 기록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통합 행보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

    여권에서는 윤 당선인의 ‘통합과 협치’ 중시에 회의적 시각을 보인다. “검사총장 출신인 만큼 훗날 정치보복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수통’ 출신인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이 같은 논란이 더 거세졌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는 4월 13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 담당 간사단 공개회의에서 “통합을 바라는 국민에 대한 전면적이고 노골적인 정치보복 선언”이라고 말했다.

    다만 윤 당선인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월 10일 “나 윤석열 사전에 정치보복이라는 단어는 없다”며 “권력형 비리와 부패는 늘 법과 원칙, 공정한 시스템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려왔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당선되면 어떤 사정과 수사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는 말씀을 지난해 여름부터 드렸다”고 덧붙였다.

    대통력직인수위원회 측은 윤 당선인의 말이 단순 선언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동관 당선인 특별고문은 “윤 당선인은 통합과 협치를 자주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윤증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통합 정신이 가풍으로 체화돼 DNA에 각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파평 윤씨는 어떤 집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오른쪽)이 4월 11일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을 방문해 박원갑 경상북도향교재단 이사장과 맞절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오른쪽)이 4월 11일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을 방문해 박원갑 경상북도향교재단 이사장과 맞절을 하고 있다. [뉴스1]

    “모이면 고스톱 치면서 재미있게 떠드는 집안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재미없는 집안이라고 할 수도 있죠. 다만 청렴을 제일로 합니다.”

    파평 윤씨 문중을 설명해달라는 말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사촌 윤석만 씨가 내놓은 대답이다. 윤 씨는 “조선시대 문중에서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은 적이 있다. 언덕 위에 올라간 후 눈에 보이는 땅을 모두 갖는 식이었다. 당시 조상은 땅을 받은 뒤 (원주인에게) 다 돌려줬다”고 덧붙였다.

    윤 씨 설명대로 파평 윤씨 문중은 재물에 연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10대조 종조부인 명재 윤증이 “윤씨 집안은 양잠을 하지 마라”고 지시한 사실이 대표적이다. 양잠이란 뽕나무에서 누에를 길러 고치를 생산하는 일을 일컫는다. 비단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인데, 당대에는 쏠쏠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윤증은 돈벌이가 된다고 성급히 뛰어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서민을 위한 양보였다.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정신은 후대에도 이어진다. 윤 당선인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한 번은 조상들 무덤이 자리한 산이 매매됐다. 산 주인이 윤 교수에게 “이장 비용을 줄 테니 묘를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윤 교수는 “산소 옮기는 데 돈 받는 것 아니다”라면서 비용을 받지 않고 이장한 일화가 있다. 윤 씨는 “윤 교수는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다. 부동산 투기는 물론, 불로소득 자체를 멀리했다. 윤 당선인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진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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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최진렬 기자입니다. 산업계 이슈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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