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메밀꽃은 마음을 맑게 해준다.
저절로 잘 자라는 생명력
농사를 지어보면 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이 적잖다. 그런데 저 알아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니 새삼 메밀꽃이 더 예뻐 보인다. 예전에는 산간지대에서 화전으로도 일궈 먹었던 곡식. 뿌리가 땅속 1m 남짓 깊이 뻗어 가뭄에도 강하다.
메밀의 야성은 자라는 시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떨어진 메밀씨는 휴면기를 거쳐 이듬해 환경이 적당하다 싶으면 싹을 틔운다. 5월에 싹을 틔워 6월이면 꽃을 피우기도 하고, 길에서 내가 본 메밀꽃은 7월 무렵 피었다. 하지 무렵 감자와 밀을 거두고 나서 이모작으로 8월 초 심은 메밀은 날이 선선한 9월에 꽃을 피운다. 그렇다. 메밀은 씨앗을 뿌렸다 싶은데 금방 자라 꽃을 피운다. 웬만한 곡식은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둔다. 하지만 메밀은 생육 기간이 두 달 조금 넘는다.
우리가 먹는 낟알 곡식은 볏과다. 쌀, 보리, 밀, 수수, 옥수수, 조, 기장, 율무까지 전부 볏과 외떡잎식물이다. 그렇다면 메밀도 볏과일까. 아니다. 메밀은 쌍떡잎식물로 마디풀과다. 생물학적 특성이 남다른 곡식이다. 메밀꽃은 딴꽃가루받이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독특하다. 메밀꽃은 두 종류로 피는데 암술이 수술보다 긴 장주화(長柱花)와 수술보다 짧은 단주화(短柱花)가 있다. 단주화 암술은 워낙 작은 데다 기다란 수술에 가려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루페를 가지고 봐야 할 정도로 작다. 장주화는 암술이 수술보다 길고, 암술머리가 세 가닥이라 찬찬히 보면 가는 실같이 보인다.
위가 메밀 장주화이고 아래가 단주화. 메밀꽃이 핀 밭에는 온갖 곤충이 찾아와 수정을 돕는다. 시멘트 벽 틈에서 자라 꽃을 피운 메밀꽃(왼쪽부터 시계 방향).
메밀꽃은 왜 이렇게 꽃술에 길이 차이를 둘까. 딴꽃가루받이를 한결 더 엄격하게 하고자 함이다.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해 심한 환경 변화에도 잘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이랄까. 장주화 암술은 수술이 긴 꽃의 꽃가루를 받아야 한다. 비록 딴꽃이라도 같은 장주화끼리는 수정을 꺼린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짧은 암술의 꽃은 짧은 수술의 꽃가루를 받아야 씨앗을 맺는다. 한마디로 쉽지 않은 사랑이다. 전문용어로 적법수분(適法受粉)이라 한다.
이렇게 독특한 꽃가루받이를 하려면 곤충들 도움이 절실하다. 사실 9월 넘어 날이 선선해지면 자연에서는 꽃이 크게 감소한다. 곧이어 겨울이 닥치기에 새롭게 꽃을 피운다는 건 그만큼 모험이 된다.
메밀꽃은 곤충들을 위해 기꺼이 꿀을 준비한다. 호박꽃이나 참깨꽃 같은 경우는 곤충을 가려서 받아들인다. 메밀꽃은 곤충을 가리지 않는다. 벌만이 아니다. 파리도 날아들고, 나비도 많이 날아든다. 작은 개미도 꿀을 찾아든다. 자신들의 꽃가루받이를 도와주는 곤충이라면 누구든 기꺼이 환영한다. 많이 자주 찾아와 자신들의 ‘쉽지 않는 사랑’을 도와주길 바란다.
곤충들 처지에서 가을에 피는 메밀꽃밭은 천국이라 하겠다. 곤충들 역시 부지런히 가을 준비를 해야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을 테니까. 이럴 때 메밀꽃은 더없이 좋은 밀원이 된다.
예전에는 구황작물로 가난한 이들의 배를 채워주던 메밀. 이제는 별미로 막국수나 메밀묵을 먹는 세상이다. 또한 메밀 속에는 루틴이란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이는 성인병을 예방하며 특히 메밀싹과 꽃에 많단다. 메밀은 꽃축제에서도 인기다. 무리 지어 하얗게 피는 그 꽃을 보노라면 우리네 마음이 저절로 맑아진다. 메밀꽃은 이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구실까지 한다. 가을 정취를 살려주는 메밀밭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다시 살아나길 빌어본다.
메밀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