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총회, 19대 국회 3기 원내대표 선거에서 신임 원내대표로 당선된 박영선 의원이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5월 8일 오후 3시 반 국회 246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경선이 열린 의원총회장. 1차 투표가 끝나고 득표수가 발표됐다. 그 순간 회의장에 있던 의원과 기자가 모두 술렁거렸다. 역대 원내대표 선거 사상 가장 치열하고 박빙의 승부가 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1차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가 나왔기 때문이다. 박영선 의원은 미소를 지었지만 다른 후보들의 얼굴은 굳어졌다. 2차 결선 투표에서 과반을 획득한 박 의원은 헌정 사상 첫 여성 원내대표가 됐다.
당선 직후 원내대표실에서 기자와 만난 박영선 신임 원내대표는 담담했다. 1차 경선 투표에서 이 정도 표가 나올 걸 예상했느냐는 질문에 “저 자신은 이 정도 표가 나올 것을 예상했다”고 했다. 그는 “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모아진 거 같다. 당당한 야당, 존재감 있는 야당을 바라는 국민 목소리가 함께 담겨 있는 거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3개월간 개인별 의원 접촉…엽서도 보내
박 원내대표의 당선에는 본인의 치밀한 노력과 당 안팎의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측면이 컸다. 그는 다른 후보들을 압도할 만큼 치열한 선거운동을 펼쳤다. 1월 가장 먼저 원내대표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다른 후보들보다 최대 3개월 이상 출발이 앞섰다.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개인별로 지역구에서 한 번, 국회 의원회관에서 두 번을 원칙으로 모든 의원을 최소한 세 번 이상 만났다. 한 의원 보좌관은 “우리 의원과는 원래 친한데도 다섯 번을 만났다. 우리 의원이 자기 대신 중진의원들을 만나라고 권유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는 박 원내대표는 각 그룹을 공략할 의원들을 선정해 맞춤형 선거운동을 펼쳤다. 2년간 손발을 맞췄던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친노(친노무현),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호남, 수도권 등 계파와 지역별로 밀착 선거운동을 벌였다.
자기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략도 효과를 발휘했다. 박 원내대표는 당 소속 의원 129명 전원에게 맞춤형 엽서를 선물했다. 의원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가장 잘 나온 사진을 선택하고 그 의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문구까지 직접 선택했다. 그동안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던 ‘쎈 여자’라는 이미지를 불식한 셈이다.
이 전술은 원내대표 경선 연설에서도 이어졌다. 박 원내대표는 경선 당일 방송 앵커 같은 머리스타일과 메이크업으로 나타났다. 의원들에게 이미지를 확실하게 전달하려고 MBC 앵커 시절 자신을 전담했던 담당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정확한 논리와 감정을 적절히 섞어가며 의원들의 마음을 공략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를 언급하면서 “가장 슬픈 어버이날”이라고 울먹일 때 한 동료 여성의원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또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는 주변 평가를 겨냥해 “저 박영선은 강하다. 그러나 그렇게 센 여자가 아니다. 저도 눈물 많은 여자”라며 “어머님의 마음으로 보살피듯 그렇게 다가가겠다”고 말할 때는 의원 사이에서 웃음도 터져 나왔다. 연설을 바라보던 상대 후보 측 보좌관들 사이에선 이번 선거는 진 거 같다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신임 원내대표(오른쪽)가 5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 및 여객선 침몰 사고 대책위원장단 연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 원내대표는 당분간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와 공조 체제를 이어갈 개연성이 크다. 세월호 관련 국정조사와 특별법 등 정국 현안에서 이견이 노출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초반 행보도 세월호 사고에 집중돼 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세월호 특별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고 5~6월 국회를 ‘세월호 국회’로 가져갈 계획이다. 또 세월호 특별법에는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공무원이나 정부기관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조항을 넣기로 했다. 국가정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도 반드시 특검을 하겠다는 생각이다.
더 큰 정치인? 위기이자 기회!
그러나 6·4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지도부 책임론이 불거질 경우 김·안 공동대표와 박 원내대표는 다른 목소리를 낼 개연성도 있다. 5월 12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총회에서는 이윤석 의원과 정청래 의원 등이 공천 과정에 불만을 품고 ‘공동대표 퇴진론’까지 제기했다. 이 의원은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지도자는 순리대로 가야 한다. 소탐대실해선 절대 안 된다”며 “6·4 지방선거에 최적, 최강 후보를 내야 하는데 거꾸로 지나친 ‘지분 챙기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특히 안 대표를 지목해 “진정으로 새 정치를 하려 한다면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며 “‘나만 대통령 후보’라는 생각을 버려야 국민이 지지할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 당직자는 “친노 세력처럼 당내 절대적 지분이 없는 김·안 공동대표 체제는 지방선거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혹독한 책임론에 시달릴 수 있다는 걸 예고하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이 경우 박 원내대표의 소임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박 원내대표는 필요에 따라 자기 목소리를 굽히지 않는 스타일이다. 지난해 연말 여야가 외국인투자촉진법 처리를 합의했음에도 끝까지 처리를 반대하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특별검사법 도입을 얻어낸 전력도 있다. 7월 재·보궐 국회의원 선거 공천 시점에 공동대표가 힘이 빠질 경우 당연직 최고위원인 박 원내대표가 중요한 캐스팅보트를 쥘 수도 있다. 다만 그가 더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면 그동안 당 내부에 쌓인 불신의 벽을 제거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한 당직자는 “지금까지 박 원내대표의 고집과 독자적 행보는 ‘박영선’이라는 정치인을 차별화하는 긍정적 행보로 작용했다. 하지만 원내대표는 여당의 협상 파트너가 정해져 있고 여당과의 협상 결과를 바탕으로 당 내부 의원을 설득하는 협상력이 더 중요한 자리”라고 말했다. 원내대표 진출은 그가 더 큰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본격적으로 판가름할 기회이자 위기라는 얘기다. 실제로 1차 투표에서 54표를 얻은 박 원내대표는 결선 투표에서 69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를 바라보는 불안한 시각이 아직 존재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