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때의 클라우디오 아바도.
1933년 6월 26일 밀라노에서 태어난 아바도는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부모가 유능한 음악가였고, 명문 베르디 음악원과 빈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유수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데뷔했다. 일찍이 레너드 번스타인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독일 유력 평론가 요아힘 카이저는 40세였던 그를 “우리 시대 품위 있고 영향력 있는 몇 안 되는 지휘자”로 지목했다.
그는 30대 중반부터 최정상 자리를 두루 섭렵했다. 1968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 자리에 오른 뒤 79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82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수석객원), 86년 빈 국립오페라 지휘를 차례로 맡았다. 또 관행상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70년대부터 그를 ‘주(主)지휘자’로 불렀다. 그리고 89년 카라얀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베를린 필) 수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경력은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 직후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베를린 필의 체질을 바꾸고 프로그램에 현대음악을 적극 편성하는 등 혁신을 감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단원과 청중이 반발했고, 언론은 비판을 가했으며, 특유의 ‘민주적 리더십’도 논란을 일으켰다.
아바도의 지휘는 ‘탁월한 모범생’을 연상하게 했다. 광범한 레퍼토리를 지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그의 음악은 언제나 반듯하고 견고하며 충실하고 치열했다. 그래서 한편으론 유연함과 자연스러움, 심오함이 부족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독설가로 유명했던 거장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는 그런 그를 가리켜 “세 시간만 듣고 있으면 심근경색이 올 지경”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2000년 여름 위암 판정을 받은 아바도는 수술 후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가 그대로 비극적 최후를 맞는 건 아닌지 염려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부쩍 수척해지긴 했어도 보란 듯 부활했고, 자기 인생과 예술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나갔다.
베를린 필에서 물러난 이듬해부터 아바도는 스위스에서 만년의 고고한 경지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2003년 이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진행한 일련의 공연은 영상물로도 발매돼 전 세계 음악팬에게 그의 원숙한 음악세계를 전파했다. 그중에서도 이제 미완으로 남게 된 ‘말러 사이클’은 현대 연주사의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담은 감동적인 기록이다. 그것은 아마도 첼리비다케 마음마저 움직였을 진실의 음악이었고, 영혼의 음악이었다.
만년에 아바도는 친한 후배인 사이먼 래틀(현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내 병은 끔찍했어. 그러나 결과가 꼭 나쁘지만은 않았지. 내 안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됐으니 말이야. 마치 위를 잃은 대신 내면의 귀를 갖게 된 것 같았지. 그 느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설명할 순 없지만, 난 아직도 그때 음악이 내 삶을 구했다고 느낀다네.”
이제 그는 떠났지만, 그의 진실과 영혼이 담긴 유산들은 오래도록 남아 많은 이의 가슴에 깊고 진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