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9일 서울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서 이지수 양과 어머니가 ‘사람 책’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00년 덴마크 사회운동가 로니 아버겔의 기획으로 창안된 휴먼 라이브러리는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수십 개국으로 퍼져나갔고, 2010년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서울 국회도서관이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를 처음 개최한 이후 서울과 수도권 지방자치단체(지자체) 구립도서관을 중심으로 이색 도서관이 빠르게 확산 중이다.
휴먼 라이브러리의 취지 및 목적은 사람 책과 독자가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지식, 경험을 공유하고 고정관념과 편견을 없애자는 것이다. 평소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을 자주 이용해왔다는 40대 중반의 주부 이주희 씨는 사람 책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했다. 자유롭게 홀로 여행하는 사람이 부러워 젊은 여행가 책을 열람했다가 뜻밖에도 자신이 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이씨는 “평소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성소수자를 만난 건 뜻밖이라 충격을 받았다. 이야기 도중 ‘사람들한테 사적인 얘기를 하는 건 상대를 믿기 때문’이라는 그의 고백이 따듯하게 다가왔고, 대화를 나눌수록 그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정말 강렬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종이책에서 느낄 수 없는 사람 책의 생생한 이야기와 경험, 생각을 직접 들으며 독자는 궁금한 점을 바로 물어볼 수 있고, 사람 책은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재능기부 기회를 얻는 것은 물론 다양한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공감대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휴먼 라이브러리의 매력이다. 구립도서관을 중심으로 휴먼 라이브러리에 등록된 사람 책 리스트를 보면 나이와 학벌, 성별 구분 없이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이 망라돼 있다.
종이책과 다른 생생한 이야기
서울 노원휴먼라이브러리 홈페이지의 사람 책 리스트 ‘정치인’ 코너에는 안철수 의원이 7번째로 올라 있다. 책 제목은 ‘안철수-한국의 IT산업, 청소년이 내일을 준비하는 노하우’.
주부 오은태 씨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인 큰딸이 메이크업아티스트를 하고 싶어 해 사람 책을 대출했다. 처음엔 ‘많은 직업 가운데 하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더라. 무척 좋았다.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딸은 ‘정치인’이 꿈이라 안철수 의원의 사람 책을 신청해놓았다. 아직 열람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대기자가 수십 명은 되는 것 같다. 딸이 열람을 고대한다”고 했다.
이 밖에 각 구립도서관을 중심으로 여행가, 메이크업아티스트, 영화감독, 작가, 다큐멘터리 PD, 사진가, 카페사장, 무형문화재, 의사, 교수, 환경운동가, 정치인, 약사, 변호사, 검찰수사관, 야구선수 등 각 분야 전문가가 사람 책으로 올라 있다. 새터민과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 주부와 학생, 직장인 등 평범한 사람도 폭넓게 참여하고 있다.
스스로를 ‘책벌레’라고 부르는 치과의사 원덕희 씨는 삶의 이력이 독특하다. 치대 시절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졸업 후 교수로 지내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그곳에서 10여 년간 생활한 그는 1990년대 중반 국내로 돌아와 병원을 열고 현재 극단 소속 배우로 1년에 한두 차례 꾸준히 무대에 선다. “치과 아래층에 성북구립 달빛마루도서관이 있어 내 집처럼 드나들다 사람 책이 됐다”는 그는 ‘내가 살아온 삶’을 주제로 20~30대 청년 대출자 2명을 만났다.
지난해 3월 노원휴먼라이브러리 개관 때부터 사람 책으로 참여해온 60대 중반의 임정애 씨는 ‘주부 9단의 살림 이야기’를 주제로 새댁부터 50대 중년 남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대출자를 만났다.
휴먼 라이브러리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책과 독자가 만나기 때문에 책을 빌리는 과정이 종이책 대출과 다르다. 사람 책이 되려면 인적사항과 자기소개, 책 제목과 주제를 간략히 적은 신청서를 도서관에 제출해야 한다. 등록된 사람 책 리스트를 보고 대출하려면 예약이 필수다. 도서관을 직접 방문하거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대출하고 싶은 책을 골라 신청하면 도서관이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 일정에 맞춰 날짜와 장소, 시간을 공지하거나 따로 사람 책과 독자를 연결해준다. 도서관마다 차이가 있지만 독자 1명당 1~3권까지 대출 가능하며, 한 책당 독자 1~5명이 동시에 열람하게 된다. 열람시간은 40~50분이다.
휴먼 라이브러리의 장점은 도서관으로 사람들을 유입함으로써 새로운 도서관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강영아 달빛마루도서관 관장의 말이다.
“종이책은 난도에 따라 독자가 한정되는 데 비해 휴먼 라이브러리는 이를 허무는 구실을 한다. 책과 독자가 눈을 마주보며 대화하고 묻고 대답하는 방식이라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또 직접 책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구술로 경험을 전달함으로써 책을 내는 것 이상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콕 찍은 사람 예약은 필수
달빛마루도서관을 비롯해 8개 성북구립도서관은 2012년 6월부터 지금까지 총 11회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를 진행했다. 그동안 대출된 사람 책은 100명, 독자는 400여 명에 달한다.
한편 지난해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에 6·25전쟁에 참전했던 80대 에티오피아인을 사람 책으로 초대해 화제를 모은 서울 강남구립 논현정보도서관에는 현재 사람 책이 90여 명 등록돼 있다. 하지만 김홍기 논현정보도서관 팀장은 “올 1분기에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를 개최한 뒤 아직 다음 계획을 못 잡고 있다. 사람 책 섭외가 힘들다 보니 중복해 참여하는 경우가 많고 대출자도 이용해본 사람이 계속하는 등 아직까지는 한계가 많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구립도서관 등 현재 국내 대부분의 휴먼 라이브러리는 비영리로 운영한다. 좋은 취지와 목적에도 민간과 개인으로 널리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다. 여기에 용감하게 도전장을 던진 사람이 대구 ‘사람도서관 아울러’의 박성익 대표다. 20대 후반인 그는 대학 시절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김수정 지음)라는 책을 접하고 휴먼 라이브러리에 매혹돼 졸업 후 창업에 뛰어들었다.
3년째 휴먼 라이브러리를 운영 중인 그는 시내 중고교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사람도서관’을 표방한다. 그러다 보니 세계여행 경험자, 연애고수, 왕따와 일진 경험자, 특수교사 등 청소년에게 멘토가 될 만한 사람 책 리스트를 많이 확보했다. 박 대표는 “사람 책 도서관을 하면서 배우고 느낀 점이 많다. 아직 수익이 미미하지만 길게 보고 꾸준히 꾸려갈 생각이다. 낯선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게 여행의 매력인데, 사람 책 도서관을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여행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고 다른 지역과 소통하는 문화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서 독립된 공간과 상시 열람 체계를 갖춘 대표적인 도서관은 노원휴먼라이브러리다. 노원구립 노원정보도서관 내 지하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평균 주 7~8회 사람 책과 독자가 만난다. 지금까지 노원휴먼라이브러리를 통해 사람 책을 열람한 사람은 4170명. 도서관이 주관한 소통 프로그램 등에서 이벤트 형식으로 진행한 휴먼 라이브러리에 참여한 독자도 3300명이나 된다.
휴먼 라이브러리 행사에 지금까지 세 차례 사람 책으로 참여한 김보라 성북구립미술관 관장은 “그동안 ‘내가 만든 미술관’이라는 주제로 열람자들과 대화를 나눴고 큐레이터 직업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미술관은 전시회로 대중과 소통하다 보니 대중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선진국 구립미술관은 주민에게 일대일로 다가가는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사람 책으로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독자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중에 다가갈 기회가 생기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맡고 있는 일에도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사람 책으로 참여할 생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