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서울에서는 외식으로 국밥을 많이 먹었는데 여기에는 으레 깍두기를 곁들였다. ‘서울 깍두기’라는 국밥집이 전국에 산재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했다. 어디에서든 잘 자라 한민족 밥상을 위해 흔하게, 또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무는 조직이 단단해 소금물에 담가만 두어도 맛있는 짠지가 되니 반찬 채소로 이만한 게 없었을 것이다. 간장이나 된장에 박으면 장아찌가 되고, 짠지에 젓갈과 고춧가루만 넣으면 무김치가 된다. 채를 쳐 말리면 나물이 된다. 무청도 시래기로 만들 수 있다. 싱싱한 무를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면 땅에 묻으면 된다. 이만큼 다양하고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채소가 또 어디에 있나 싶다.
서울 깍두기가 어떻게 이름나게 됐는지 여기저기서 자료를 조사한 적이 있다. 옛 자료를 보면, 서울 사대문 밖에 채소밭이 많았는데 특히 뚝섬에서 무 재배가 흔했다. 뚝섬 지역 토질이 모래니 무가 잘 자라 그랬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개성은 배추가 맛있어 보쌈김치가 유명하다는 글도 있었다. ‘서울 깍두기, 개성 보쌈김치’라는 관념이 생긴 지는 대충 1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인다. 또 각 지역의 토종 무를 선발, 육성하는 과정에서 ‘서울무’라는 품종이 만들어진 것도 서울 깍두기가 명성을 얻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무 종자는 소량이지만 지금도 팔린다.
여기까지만 보면 “서울무가 맛있어 서울 깍두기가 유명해졌다”고 설명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어떤 음식이든 그 지역의 것이 특별히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유명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전국 팔도에서 무를 재배하는데 서울무가 제일 맛있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음식의 유명성은 대체로 이를 즐겨 먹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졌을 때 확보되는데, 서울 깍두기도 그런 환경에 놓였었다.
서울은 조선시대에도 수도였으나 그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사대문이 열리면서 근대도시로 ‘폭발’했는데, 이때부터 지방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든 것이다. 6·25전쟁 이후 이런 현상은 극에 달했고, 개발연대인 1960~80년대를 거치면서 ‘만원’이 됐다.
서울을 꽉 채운 사람은 거의 노동자였다. 시골에서와 달리 하루에 한두 끼니는 밖에서 해결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에 가능하면 저렴하고 간편한 음식을 먹으려 했고, 국밥이 대표 음식으로 등장했다. 식당 주인 처지에서는 밥을 지어놓고 데운 국에 말아만 내면 되니 이만큼 간편한 장사도 없었던 것. 손님 처지에서도 싸고 빠르게 한 끼 먹는 음식으로 국밥만 한 게 없었다. 이때부터 설렁탕, 곰탕, 순댓국밥, 우거지국밥, 소머리국밥 등등의 국밥이 서울의 주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국밥에 어울리는 반찬으로 깍두기가 선택됐다.
국밥은 내용물에 ‘씹는다’는 느낌의 재료가 적다. 대충 훌훌 목구멍으로 넘긴다. 국밥만 먹으면 어딘지 서운하다. 이 허전함을 잠재울 수 있도록 ‘씹는다’는 기분을 제공하는 음식이 바로 깍두기다. 또 국밥에 깍두기를 넣거나 그 국물을 넣으면 맛이 복잡해져 맛없는 것도 먹을 만한 것이 된다. 특히 누린내 나는 국밥에 깍두기의 개운한 국물은 더없이 좋은 양념이 된다. 그래서 국밥에는 배추김치보다 깍두기가 제격인 것이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엔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귀하게 느껴진다. 가슴을 채워주는 뜨끈한 국물에 깍두기 한 그릇이면 추위도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