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
소녀가 미소를 짜고 있다
소녀가 하품을 짜고 있다
레이스가 길어지고 있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 무가당 소녀가
그 누구든 쓸 수 있는 글을 쓱쓱 써나가는 것처럼
레이스를 짜고 있다
가슴이 미어지고 있다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 편의점 계산대에서 일하는 소녀
희끄무레한 소녀
소녀가 가습기의 수증기로 면사포를 짜고 있다
소녀가 면사포를 쓰고 있다
수천 억 개의 구멍이 뚫린 레이스가 소녀를 감싸고 있다
소녀가 레이스에 파묻히고 있다
이제 튿어져 날리는 솜이불처럼 하얘진 소녀가
축축한 레이스 무덤 속에서 새하얀 거품을 물고 있다
미소가 많은 소녀가 시 창작 수업 시간엔 내리깐 눈썹을 파르르
떠는 소녀가
흑백사진 속 어린 할머니처럼 희끄무레한 소녀가
그렇지만 이 겨울밤 흔하디흔한 소녀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소녀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바보 같은
소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색무미무취무명무한 소녀가
강물 위로 휘날리는 소녀의 면사포
소녀의 면사포 위로 하늘에서 수억 만 개의 작고 하얀
올해 겨울 첫 십자가들이 하얗게 내려오고 있다
결혼 운구 행렬처럼
― 김혜순 ‘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엄마 생각하면 한없이 짠해집니다
엄마, 당신을 떠올리는 밤입니다. 나직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밤입니다. 가만히 당신의 얼굴을 그려보는 밤입니다. 오늘 밤, 엄마는 너무 아득합니다. 당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는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가슴을 더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곰곰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 뒤,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올겨울 김장을 위해 마늘을 까고 있을 겁니다. 매일 해왔던 일들을, 또한 매년 이맘때쯤 해왔던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을 겁니다. 엄마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이 뿌예집니다. 눈앞이 아찔아찔합니다.
문득 엄마의 옛날을 찬찬히 그려봅니다. 엄마에게도 있었을 유년을 상상합니다. 엄마가 “소녀”였을 때를, 피부와 미래가 모두 “희끄무레”했을 때를, 난생처음 “가슴이 미어지”던 때를 더듬어봅니다. “미소”를 많이 짓던 만큼 “하품”도 많이 했을 시절을, “그 누구든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나서 마냥 좋아했을 시절을, 모든 게 다 신기하면서 동시에 다 지루하게 느껴졌을 시절을 가늠해봅니다. 그때의 엄마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엄마는 어떤 꿈을 꾸며 자라났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 엄마가 꿈꿨던 미래가 현재의 모습과 완벽히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요. 당신은 더 빛났어야 합니다. 당신의 “레이스”는 더 특별했어야 합니다. 당신의 “시”는 더 치열했어야 합니다. 당신의 꿈은 “새하얀 거품”으로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면 안 됐습니다. 어찌어찌 “면사포”를 쓴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무색무미무취무명무한 소녀”가 됐습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아주머니가 됐습니다. 한밤중에 마늘을 까던 당신, 칼끝에 손가락을 베인 뒤 불현듯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흔하디흔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구슬픈 일이 또 있을까. 겨울밤은 그렇게 레이스처럼 멋모르게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겨울밤”, 나는 엄마를 마음속에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득한 엄마가 까마득해지지 않게, 있는 힘껏 손을 내뻗는 것입니다. 엄마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곤 두 손 모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엄마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순간을, 그러나 분명히 있는 순간을, 기대에 부푼 나머지 “눈썹을 파르르” 떨며.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소녀가 미소를 짜고 있다
소녀가 하품을 짜고 있다
레이스가 길어지고 있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 무가당 소녀가
그 누구든 쓸 수 있는 글을 쓱쓱 써나가는 것처럼
레이스를 짜고 있다
가슴이 미어지고 있다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 편의점 계산대에서 일하는 소녀
희끄무레한 소녀
소녀가 가습기의 수증기로 면사포를 짜고 있다
소녀가 면사포를 쓰고 있다
수천 억 개의 구멍이 뚫린 레이스가 소녀를 감싸고 있다
소녀가 레이스에 파묻히고 있다
이제 튿어져 날리는 솜이불처럼 하얘진 소녀가
축축한 레이스 무덤 속에서 새하얀 거품을 물고 있다
미소가 많은 소녀가 시 창작 수업 시간엔 내리깐 눈썹을 파르르
떠는 소녀가
흑백사진 속 어린 할머니처럼 희끄무레한 소녀가
그렇지만 이 겨울밤 흔하디흔한 소녀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소녀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바보 같은
소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색무미무취무명무한 소녀가
강물 위로 휘날리는 소녀의 면사포
소녀의 면사포 위로 하늘에서 수억 만 개의 작고 하얀
올해 겨울 첫 십자가들이 하얗게 내려오고 있다
결혼 운구 행렬처럼
― 김혜순 ‘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엄마 생각하면 한없이 짠해집니다
엄마, 당신을 떠올리는 밤입니다. 나직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밤입니다. 가만히 당신의 얼굴을 그려보는 밤입니다. 오늘 밤, 엄마는 너무 아득합니다. 당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는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가슴을 더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곰곰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 뒤,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올겨울 김장을 위해 마늘을 까고 있을 겁니다. 매일 해왔던 일들을, 또한 매년 이맘때쯤 해왔던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을 겁니다. 엄마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이 뿌예집니다. 눈앞이 아찔아찔합니다.
문득 엄마의 옛날을 찬찬히 그려봅니다. 엄마에게도 있었을 유년을 상상합니다. 엄마가 “소녀”였을 때를, 피부와 미래가 모두 “희끄무레”했을 때를, 난생처음 “가슴이 미어지”던 때를 더듬어봅니다. “미소”를 많이 짓던 만큼 “하품”도 많이 했을 시절을, “그 누구든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나서 마냥 좋아했을 시절을, 모든 게 다 신기하면서 동시에 다 지루하게 느껴졌을 시절을 가늠해봅니다. 그때의 엄마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엄마는 어떤 꿈을 꾸며 자라났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 엄마가 꿈꿨던 미래가 현재의 모습과 완벽히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요. 당신은 더 빛났어야 합니다. 당신의 “레이스”는 더 특별했어야 합니다. 당신의 “시”는 더 치열했어야 합니다. 당신의 꿈은 “새하얀 거품”으로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면 안 됐습니다. 어찌어찌 “면사포”를 쓴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무색무미무취무명무한 소녀”가 됐습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아주머니가 됐습니다. 한밤중에 마늘을 까던 당신, 칼끝에 손가락을 베인 뒤 불현듯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흔하디흔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구슬픈 일이 또 있을까. 겨울밤은 그렇게 레이스처럼 멋모르게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겨울밤”, 나는 엄마를 마음속에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득한 엄마가 까마득해지지 않게, 있는 힘껏 손을 내뻗는 것입니다. 엄마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곤 두 손 모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엄마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순간을, 그러나 분명히 있는 순간을, 기대에 부푼 나머지 “눈썹을 파르르” 떨며.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