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여의도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가 있는 서울 여의도 공기는 한여름답지 않게 싸늘하다. 내년 19대 총선(4월 11일)을 8개월 정도 남기고 의원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생존의 첫 관문인 공천까지는 반년 남았다. 지금 의원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것은 ‘물갈이’라는 단어다. 초선의원부터 중진, 다선의 거물의원까지 ‘물갈이’ 공포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다.
물갈이 공포는 여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더 크게 느낀다. 245개 지역구에서 공석 2개를 제외한 243개 가운데 한나라당 지역구 의원은 147명. 민주당 의원은 그 절반도 안 되는 72명이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한 덕분이다.
민주당의 원외 정치인이나 정치 신인은 같은 당 현역의원과 큰 다툼 없이 빈자리에 출마하면 된다. 그러나 여권 출마 희망자는 어쩔 수 없이 한나라당 현역의원과 경쟁해야 한다. 더욱이 내년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수도권이나 충청, 강원은 물론 영남에서까지 고전하리란 전망이 우세하다. 심각한 민심 이반현상을 되돌리려면 공천 과정에서 충격적인 방법을 쓸 공산이 크다.
물밑서 치열한 생존경쟁 시작
한나라당 의원의 선택지도 민주당 의원보다 좁다. 최근 민주당 중진들이 ‘안전지대’인 호남을 떠나 ‘적지’인 부산, 경남이나 ‘격전지’인 수도권에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일부 언론이 “한나라당 중진들은 그만한 용기도 없느냐”고 질타했다.
이에 영남의 한 한나라당 중진은 “물정도 모르는 얘기”라며 답답해했다. 한마디로 “우리가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수도권은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싹쓸이’하다시피 한 곳이다. 같은 당 현역의원을 피해 수도권으로 지역구를 옮기려 해도 갈 곳이 없다.
이래저래 답답한 한나라당 의원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7·4전당대회로 출범한 홍준표 대표의 일거수일투족부터 살펴야 한다. 내년 공천에서 당대표 의중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표가 과거의 제왕적 총재나 당의 ‘오너’처럼 공천을 좌지우지하긴 힘들다. 공천심사위원회 같은 공식적인 당 기구와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더욱이 홍 대표는 당 장악 의지가 강하다.
홍 대표는 공천 문제에 대해선 “아직 얘기하기 이르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측근이자 내년 총선 공천 실무를 총괄할 김정권 사무총장이 다선의원의 자진 출마 포기를 언급하는 등 ‘물갈이 공천’ 가능성을 몇 차례 내비쳤다.
당내 공천 구도에 관여할 수 있는 다른 당직자도 공천 ‘물갈이’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주호영 인재영입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7, 18대 총선에서도 40%대의 물갈이가 있었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역구에서 한나라당 지지율보다 지지율이 낮은 의원이 (교체) 대상이 될 수 있다”며 기준을 제시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상향식 공천’을 선호한다. 당 공천개혁특별위원장인 나경원 최고위원이 마련한 완전국민경선공천(오픈프라이머리)제에서는 당원뿐 아니라 일반 유권자까지 참여해 후보를 뽑는다. 그러나 오픈프라이머리가 제대로 되려면 여야 합의부터 이뤄져야 한다. 상대 당 지지자들이 ‘엑스맨’처럼 다른 당 경선에 조직적으로 참여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후보를 뽑는 ‘역선택’을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공직선거법도 여기에 맞게 고쳐야 한다. 그러나 ‘답답할 것’이 없는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제안에 쉽게 응할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오픈프라이머리가 무산될 경우 여론조사와 당원투표를 섞은 혼합방식의 상향식 공천이 대안이다.
오픈프라이머리가 됐든, 제한적 경선이 됐든 현역의원들은 상향식 공천을 선호한다. 현역 프리미엄과 조직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치 신인보다 유리하다는 계산 때문이다. 만일 상향식 공천을 전 지역구에서 한다면 한나라당의 물갈이 공천은 ‘물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현역의원들을 내세워 내년 총선에서 승리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는 결국 ‘개혁 공천’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는 금기어, 건들면 폭발
홍 대표는 친서민정책을 강화해 내년 총선 전까지 민심을 잡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선거 승패는 정책보다 ‘인물’이 가른다. 아무리 대단한 정책을 내세워도 기존 의원들을 그대로 내세워선 유권자에게 달라진 한나라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6, 17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충격적일 정도의 물갈이 공천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에서 현재 ‘물갈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금기어다. 공식적으로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사단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원 대부분은 잘 안다. 시기와 범위, 추진 방식만 문제일 뿐 이를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며, 당의 분란을 피하려고 서로 언급을 자제할 뿐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자신의 지역구(대구 달성)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힌 데 대해서도 당내에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박 전 대표가 실제로 지역구를 유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공천을 둘러싼 논란이 조기에 가시화하는 것을 피하려는 특유의 화법이었다는 분석도 그중 하나다.
한나라당 고위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지역구 불출마 의사를 조기에 밝힐 경우 물갈이 분위기가 거세져 파장이 커질 것을 염려한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서울 3선인 40대의 원희룡 최고위원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일찌감치 지역구 불출마 선언을 했지만 파괴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지역구 불출마를 입에 올리는 순간 당은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영남권 중진 중에는 친박(친박근혜)계가 많다. 친박 진영 내부의 동요도 피할 수 없다.
다선 및 고령 의원들은 공천 문제에 민감하다. 과거의 경우를 봐도 선수(選數)와 연령이 물갈이 대상을 고르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론 한나라당의 전통적 텃밭인 영남권 중진들이 공천개혁의 칼날을 가장 먼저 맞을 소지가 크다. 그러나 물갈이가 잡음 없이 이뤄지긴 어렵다. 언제나 그랬듯 벌써부터 반감과 저항이 만만치 않다. 영남권 한 중진의원은 최근 기자들에게 “물갈이는 정말 비민주적이다. 절대 그냥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상향식 공천으로 가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선 중진의원들이 내세우는 물갈이 반대 논리는 다양하다. 먼저 그동안 당에 기여한 공을 무시한 채 중진들을 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물리적 연령이나 선수보다 개혁성과 젊은 감각이 중요하다며 ‘젊은 오빠’를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12월 예산 국회 끝나는 것이 신호탄?
물갈이라는 쓰나미를 헤쳐나가려고 다양한 방법을 찾기도 한다. 지역구를 포기하는 대신 비례대표를 보장받으려는 전략을 짜거나, 19대 총선을 마지막으로 불출마하겠다며 ‘딱 한 번만 더’를 외치는 읍소형도 있다.
한편으론 “이번엔 물갈이 공천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애써 위안을 삼는 경우도 있다. 4월 총선에 이어 8월경 12월 대선후보를 뽑는 당내 경선 등 예정된 정치 일정 때문이다. 총선이 끝난 후 얼마 안 돼 대선 주자들이 원내외 위원장들에게 ‘한 표’를 호소하고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당이 무리하게 물갈이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갈이는 반드시 기획하고 주도하는 세력이 있다. 청와대든, 당 지도부든 인위적으로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자연산’ 물갈이는 없다. 그러나 공천개혁의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통제 불능이 돼버리는 사례가 적잖다. 역설적으로 공천개혁의 칼을 휘두르던 사람이 칼을 맞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물갈이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인사는 준대권 주자급의 쟁쟁한 거물 정치인들이다.
한나라당 최병렬, 강재섭 전 대표는 자의든 타의든 각각 17, 18대 총선 출마를 포기했다. 공천 개혁성을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당의 간판부터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것이다. 현재 당 지도부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관전 포인트는 공천 물갈이의 신호탄이 언제 어디서 터질 것인가다. 12월 예산 국회가 끝나자마자 공천 쓰나미가 한나라당으로 밀려올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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