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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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없이 와 보세요, 현대무용 재미있거든요

국립현대무용단 홍승엽 예술감독 “호기심과 여운이 남는 작품 계속 올릴 것”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입력2011-01-24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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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담 없이 와 보세요, 현대무용 재미있거든요
    1월 13일 국내 무용계에선 이례적으로 현대무용 공연이 전석 매진되는 일이 일어났다. 화제의 이 공연은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공연인 ‘블랙박스’로 1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간 서울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린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추가 공연에 대한 문의가 빗발치자 공연을 1회 늘렸지만 그마저도 매진됐다. 1월 18일 공연을 열흘 정도 앞두고 서울 양재동 한전아트센터 연습실에서 국립현대무용단 홍승엽(49) 초대 예술감독을 만났다. 공연을 앞두고 부담이 클 것이라 예상했지만, 홍 감독은 의외로 담담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잘 진행되고 있어요(웃음). 주변에서 스트레스에 찌들었을 거라 예상하는데, 제가 하는 일은 지금까지 늘 해오던 것처럼 작품을 만들고 무용수들과 작업을 하는 거거든요. 단원들 모두 제 방식을 잘 받아들이고 있고요.”

    ‘블랙박스’ 공연 티켓 가격은 1만 원. 국립현대무용단이 첫 공연을 하는 만큼 관객을 많이 모으기 위해 짜낸 일회성 이벤트는 아닐까. 홍 감독은 “앞으로도 종종 1만 원 공연을 선보일 것이며 최대 가격 2만 원을 넘기지 않을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홍 감독이 정한 국립현대무용단의 목표는 ‘현대무용의 대중화’로 대중에게 양질의 작품을 선보여 현대무용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난해하게 느껴지는 현대무용을 쉽게 푼다는 뜻이냐고 묻자 홍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대무용은 생소한 창작입니다. 어려운 게 맞아요. 하지만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려워도 듣잖아요. 듣고 있으면 행복하고 즐겁다고 느끼죠. ‘어렵다’ ‘쉽다’는 머리로 판단하는 거지만, ‘좋다’ ‘싫다’는 가슴이 판단하는 거예요. 관객은 좋은 작품을 보면 몰입하게 되고 순수예술만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죠. ‘사실 잘 모르겠어. 그런데 재밌어’라는 것과 비슷한 감정입니다.”

    1만 원 ‘블랙박스’ 전석 매진 이변



    부담 없이 와 보세요, 현대무용 재미있거든요

    홍승엽 감독이 이끄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연습 모습.

    티켓 가격을 낮춘 이유 역시 좀 더 많은 관객이 현대무용을 접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홍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은 나라가 지원하는 단체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이들도 문화예술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접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문화예술에서 소외됐던 이들까지 수용하고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홍 감독은 현대무용이 대중에게 외면받은 가장 큰 원인을 예술가에게서 찾았다. 작품을 통해 무용가의 의도를 다 표현하지 못하니 괜히 글이나 설명으로 그 의도를 전달하려 한다는 것.

    “무용은 글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면 왜 굳이 무용을 합니까. 애초 언어화하기 어려운 것을 팸플릿에 주절주절 써놓으니, 관객은 현대무용이 어렵다고 느끼는 겁니다.”

    ‘블랙박스’는 ‘데자뷔’ ‘달 보는 개’ ‘아큐’ 등 홍 감독의 주요 8개 작품의 핵심 장면을 모아 새롭게 창작한 작품이다. ‘블랙박스’는 홍 감독 작품의 ‘기록창고’이자 ‘상상의 창고’다. 그는 “이번 공연은 단순히 여러 작품을 쪼개 붙인 모둠요리가 아니다”라며 “여러 작품에서 가져온 장면을 매끄럽게 잇는 연결선을 만들고, 일부 장면은 변형하고,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무대미술도 새롭게 만드는 등 해체와 조립을 거쳤다”고 강조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초대 예술감독으로 홍 감독이 임명됐을 때 무용계에서는 ‘파격’ ‘의외’라는 반응을 쏟아냈다. 그는 해외 현대무용계에서 동양의 윌리엄 포사이스(현대무용 안무의 대가)로 통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만, 한국 무용계에서 걸어온 길은 제도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경희대 섬유공학과를 다니다 뒤늦게 무용수로 변신했고, 1993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민간 전문 무용단 ‘댄스 시어터 온’을 설립했다. 그는 심사위원들이 비디오를 보고 심사를 했다는 이유로 2004년 ‘올해의 예술상’을 거부했다. 당시 무용계에 큰 충격을 준 이 사건에 대해 홍 감독은 “무용 작품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거부할 것”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보고 많은 이가 반골 성향을 지녔다고 하지만, 저는 단지 하고 싶은 말을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졌을 뿐이에요. 지금은 제가 ‘국립’이라는 제도권에 들어갔다고 실망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죠. 제 철학은 ‘무용을 관객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고 이를 실천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해 기꺼이 초대 예술감독직을 수락했어요. 저는 늘 하고 싶은 걸 밀고 나갈 뿐입니다.”

    이번 공연에 오르는 무용수는 총 23명. 오디션을 통과한 무용수들은 상주 단원이 아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앞으로도 상주 단원을 채용하지 않고 프로젝트마다 오디션으로 단원을 선발할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할 때부터 계획한 것이지만 홍 감독 역시 이런 제도가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는 “현대무용은 예술의 최전방이다. 특정 단원을 정해두면 여러 색깔의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 안무가마다, 작품마다 무용수가 달라져야 현대무용 고유의 특성과 상상력이 잘 발휘될 수 있다”고 말했다. “냉혹하다”는 기자의 반응에 그는 “예술은 원래 냉혹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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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이 없는 예술은 존재할 수 없어요. 냉혹하지 못한 환경의 예술단체는 도태하고 맙니다. 무용수 스스로 예술가 경지에 오르고, 성실하게 작업에 임한다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홍 감독은 무용수들의 열악한 경제 여건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댄스 시어터 온’을 운영하는 17여 년 동안 주말에 제대로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개인레슨, 학교 강의 등을 다니며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 창단할 때 무용수들에게 한 3무(無)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무용수들에게 ‘티켓 판매’‘의상비 부담’ ‘연습실 유지·운영비 부담’은 절대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공연을 하면 단 몇 푼이라도 수당은 꼭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아직까지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무용수 가운데 개인레슨, 학원 강사, 신문 배달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홍 감독은 “개인 단체를 운영할 때, 정부가 1년간 ‘사회적 일자리’라는 사업을 통해 매달 80여만 원을 무용수들에게 지급했는데, 무용수들이 엄청나게 기뻐하고 감사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에 비하면 국립현대무용단의 보수 여건은 좋은 편이다. 보수는 연습 1시간당 2만 원으로 한 달에 200만~230만 원이 단원에게 지급된다. 그러다 보니 연습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단원도 눈에 띄게 줄었다. 홍 감독은 “개인 단체에서 가르치던 방식 그대로 단원들을 가르치지만, 재정적 뒷받침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니 1년 걸리던 작업속도가 3개월 정도로 압축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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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무가 베이스캠프’ 운영 중

    우리나라 무용수는 세계 무용계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워낙 춤을 좋아하는 민족인 데다 젊은 무용수들은 신체 조건도 서양 무용수 못지않게 좋아졌다. 홍 감독은 “무엇보다 대학교에 무용과가 많다 보니 다른 나라와 비교해 무용수의 사유 수준이 높다”라고 말했다. 무용수는 안무가의 안무를 단순히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라 안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재창조해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한국 현대무용의 미래가 밝다는 설명. 하지만 이에 비해 안무가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못하다.

    “현대무용 창작은 새로운 미적 철학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국내 안무가들은 외국에서 봤음직한 것을 흉내 내기에 바빴습니다. 또 제대로 된 직업단체가 별로 없다 보니 안무가의 작업 환경이 열악합니다. 안무가는 5~10년은 작업을 해야 자신만의 색깔이 나오는데, 워낙 생계가 어려워 포기하고 무용계를 떠납니다. 능력 있는 안무가가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1년에 한 번씩 안무가를 선발해 5개월 동안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안무가 베이스캠프’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선발된 6명의 안무가는 3월경에 선보일 공연을 한창 준비 중이다. 홍 감독은 경희대 섬유공학과 81학번으로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무용을 시작했다. 그는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 탓에 대학 입학 전까지는 다른 사람 앞에서 춤 한번 춰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음악이나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배워보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우리 집이 집안 대대로 학문을 해온 집이에요. 제가 5형제 중 막내인데 저만 빼고 다 우등생이었죠(현재 그의 둘째형은 외교관, 넷째형은 변호사다). 다른 곳으로 완전히 눈을 돌리는 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형들이 다 예술에 관심은 많아서 둘째형은 음악에, 넷째형은 연극에 푹 빠져 지냈어요. 둘째형이 수백 장의 클래식 LP판을 수집했는데 덕분에 저는 늘 클래식을 듣고 자랐고 음악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온몸으로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춤을 안 추고는 못 배겼습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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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무대에 올린 홍승엽 감독의 작품 ‘벽오금학’. 이외수 씨의 소설 ‘벽오금학도’를 모티프로 했다.

    대학 진학 후, 춤이 추고 싶어 시름시름 앓다가 살이 50kg대로 빠졌다. 결국 그는 경희대 무용과 수업에 나가 기초부터 배우며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식이 무용수가 되는 걸 극구 반대하던 부모님이 그를 인정한 것은 무용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1984년,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고부터였다. 그는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무용수로서 자신의 몸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본기를 쌓기 위해 유니버설발레단에서 3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프로 무용단체는 어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지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개인 무용단체를 운영할 때도 큰 도움이 됐죠.”

    홍 감독은 관객 친화력이 뛰어난 작품을 추구한다. 현대무용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 동시에 예술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관객이 굳이 예습하지 않아도 공연을 보다 보면 호기심이 생기고 여운이 남는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보세요. 이번 공연을 보시면 ‘아, 이런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도 있구나’ 하고 느끼실 겁니다. 그리고 현대무용과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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