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촉발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는 근래 미국의 한 종교문제연구소가 무작위로 추출한 3000여 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가운데 하나다. 마틴 루터, 토마스 아퀴나스, 존 웨슬리 3명 중 마틴 루터라는 정답을 맞힌 비율은 개신교도 가운데 채 50%를 넘지 못했다. 17세기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에서 보듯 미국은 역사적으로 개신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현재 종교인구 구성에서도 다양한 종파의 개신교도 비중이 압도적이다. 따라서 미국의 개신교도 2명 중 1명꼴로 루터가 누군지 모른다는 설문결과는 의아스럽다. 동일한 조사를 우리나라에서 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하다.
벼락 만나 죽음 공포 경험한 뒤 수도원行
마틴 루터(1483~1546)는 독일 작센안할트 지방 아이슬레벤에서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농민이던 그의 부친은 루터가 태어난 직후 인근 만스펠트로 이주해 소규모 광산을 운영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루터의 부친은 장남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고, 루터도 부친의 뜻에 따라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철학을 이수하고 이어서 법학을 공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1505년 여름 성모 마리아 강림절에 벌판에서 벼락을 만나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뒤,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경건하게 생활하면서도 떨칠 수 없는 죄의식으로 극도의 불안과 번민에 시달렸다. 영혼의 고통을 겪던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고위 성직자 슈타우피츠를 만나면서부터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영적 불안을 극복할 것을 조언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독일 내 유력 군주였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신설했는데,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주선으로 이 대학으로 옮겨 1512년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됐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활동하면서 루터는 기독교 신앙에서 성서, 특히 사도 바울이 편찬한 로마서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를 통해 수도사 시절부터 품었던 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인간이 죄를 사면받고 구원받는 길은 교회의 주장처럼 성사(聖事)와 선행(善行)이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과 자비로운 신의 은총에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오직 신앙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루터의 종교적 신념은 중세 신학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으로 교회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가능성은 면죄부 판매문제로 현실화됐다. 면죄부는 원래 자선행위자에게 교황이 발급하는 것으로서, 교회에 누적된 성자의 공덕으로 죄인이 고백한 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해주었다. 그러나 중세 말에 이르면 면죄부는 교황의 재정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남용됐고, 특히 그 효능이 사후 연옥의 영혼에까지 확대되자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이 말썽 많은 면죄부가 1515년부터 독일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마련하려고 면죄부를 발급하기로 하자, 마인츠의 대주교직에 새로 임명된 알브레히트가 교황으로부터 면죄부 판매권을 얻어낸 것이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면죄부 판매권을 얻어 고위 성직을 차지하기 위해 빌린 자금을 갚을 속셈이었다. 면죄부 판매의 실질적인 작업은 도미니쿠스회 수도사 테첼이 담당했는데, 그는 면죄부의 효과를 과대 선전하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루터는 분개했다. 그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해 1517년 10월 마인츠의 신임 대주교에게 제출했다. 이 반박문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는 연옥에까지 미치지 못하며, 교회의 공적은 성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의 세속적 욕심을 비판했다. 95개조 반박문은 곧 독일어로 번역되고, 새로 발명된 금속활자 덕택에 널리 보급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사람들도 성서 중요성 강조 … 루터 역할 재평가해야
그러자 처음에는 루터의 항의를 무시하려 했던 교회와 전통 신학자들이 루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518년 교황의 사절인 카예탄 추기경이 루터를 아우크스부르크로 소환해 심문했고, 1519년에는 신학 교수 에크가 라이프치히에서 루터와 공개토론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도 루터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교리 문제에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루터는 이듬해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로니아 유폐’ ‘기독교인의 자유’ 3편의 저술을 발표하면서 교황과 성사, 위계적인 성직자 제도 등 로마교회를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성서에 기반을 둔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옹호했다. 이 저술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예컨대 ‘독일 귀족에게 고함’은 초판 4000부가 일주일도 안 돼 동이 났고 출판 첫해에만 13쇄 이상 새로 찍었다.
1520년 말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는 교황의 교서와 교회 법전을 공개적으로 소각함으로써 이에 맞섰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개입했다. 새로이 황제가 된 카를 5세가 루터를 보름스의 제국의회에 소환해 법의 보호를 박탈한다는 위협과 함께 신학적 견해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루터는 굴하지 않았다. 신변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작센 선제후가 나서서 루터를 발트부르크의 은신처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 아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성서에 근거한 자신의 새로운 신앙이 갖는 정당성을 알리려면 속인 신도들도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년여 만에 성서 번역이 끝날 무렵 루터를 지지하는 움직임은 독일 내 주요 도시는 물론 농촌 지역에까지 번져 종교개혁이 본격화됐다.
지금까지 서술이 보여주듯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은 루터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루터의 이름은 종교개혁의 대명사이며, 그는 역사를 창조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1517년 95개조 반박문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처럼, 종교개혁과 개신교가 마치 루터의 머리에서 창조된 것인 양 여기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루터는 1517년 이후 자신이 연루된 일련의 사건과 관련해 한 번도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교회를 비판하고 나선 루터의 원래 의도는 내부 개혁을 통한 ‘교회의 복원’이었지 개신교라는, 중세교회의 전통에서 단절된 새로운 종파의 창립이 아니었다. 루터는 자신의 교리보다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교회의 태도 때문에 로마교회와 결별했다는 점에서 ‘마지못해’ 종교개혁가가 됐으며, 자기 의도에 반(反)해 역사상 가장 혁명적 인물이 된 셈이다.
사실 루터는 칼뱅이나 뮌처 등 당대 다른 종교개혁가에 비하면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개신교회 가운데 루터파는 칼뱅파와 달리 종교적 의례, 음악, 복식, 교회 내부 장식 등에서 중세의 전통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며 1524년 반란을 일으킨 독일 농민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종교개혁 과정에서의 루터의 역할도 재평가할 부분이 있다. 루터의 동시대인들은 새로운 종교적 변화가 모두 루터에 의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신앙에서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도 루터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원시 기독교와 성경 원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뿐 아니라 성서의 말씀을 중시하는 경향은 이른바 ‘복음주의’ 운동의 형태로 이미 당대 속인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것도 성직자나 교회가 아니라 속인 평신도들이었다. 면죄부 판매를 두고 성직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 시비를 가리는 것은 도시 시민층의 몫이었다. 교회가 속인의 분쟁을 가리던 중세와 비교하면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변화였다.
이는 근래 미국의 한 종교문제연구소가 무작위로 추출한 3000여 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가운데 하나다. 마틴 루터, 토마스 아퀴나스, 존 웨슬리 3명 중 마틴 루터라는 정답을 맞힌 비율은 개신교도 가운데 채 50%를 넘지 못했다. 17세기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에서 보듯 미국은 역사적으로 개신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현재 종교인구 구성에서도 다양한 종파의 개신교도 비중이 압도적이다. 따라서 미국의 개신교도 2명 중 1명꼴로 루터가 누군지 모른다는 설문결과는 의아스럽다. 동일한 조사를 우리나라에서 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하다.
벼락 만나 죽음 공포 경험한 뒤 수도원行
마틴 루터(1483~1546)는 독일 작센안할트 지방 아이슬레벤에서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농민이던 그의 부친은 루터가 태어난 직후 인근 만스펠트로 이주해 소규모 광산을 운영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루터의 부친은 장남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고, 루터도 부친의 뜻에 따라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철학을 이수하고 이어서 법학을 공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1505년 여름 성모 마리아 강림절에 벌판에서 벼락을 만나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뒤,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경건하게 생활하면서도 떨칠 수 없는 죄의식으로 극도의 불안과 번민에 시달렸다. 영혼의 고통을 겪던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고위 성직자 슈타우피츠를 만나면서부터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영적 불안을 극복할 것을 조언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독일 내 유력 군주였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신설했는데,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주선으로 이 대학으로 옮겨 1512년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됐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활동하면서 루터는 기독교 신앙에서 성서, 특히 사도 바울이 편찬한 로마서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를 통해 수도사 시절부터 품었던 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인간이 죄를 사면받고 구원받는 길은 교회의 주장처럼 성사(聖事)와 선행(善行)이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과 자비로운 신의 은총에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오직 신앙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루터의 종교적 신념은 중세 신학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으로 교회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가능성은 면죄부 판매문제로 현실화됐다. 면죄부는 원래 자선행위자에게 교황이 발급하는 것으로서, 교회에 누적된 성자의 공덕으로 죄인이 고백한 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해주었다. 그러나 중세 말에 이르면 면죄부는 교황의 재정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남용됐고, 특히 그 효능이 사후 연옥의 영혼에까지 확대되자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이 말썽 많은 면죄부가 1515년부터 독일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마련하려고 면죄부를 발급하기로 하자, 마인츠의 대주교직에 새로 임명된 알브레히트가 교황으로부터 면죄부 판매권을 얻어낸 것이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면죄부 판매권을 얻어 고위 성직을 차지하기 위해 빌린 자금을 갚을 속셈이었다. 면죄부 판매의 실질적인 작업은 도미니쿠스회 수도사 테첼이 담당했는데, 그는 면죄부의 효과를 과대 선전하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루터는 분개했다. 그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해 1517년 10월 마인츠의 신임 대주교에게 제출했다. 이 반박문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는 연옥에까지 미치지 못하며, 교회의 공적은 성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의 세속적 욕심을 비판했다. 95개조 반박문은 곧 독일어로 번역되고, 새로 발명된 금속활자 덕택에 널리 보급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사람들도 성서 중요성 강조 … 루터 역할 재평가해야
마틴 루터는 자신의 교리보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교회의 태도 때문에 로마교회와 결별했다.
1520년 말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는 교황의 교서와 교회 법전을 공개적으로 소각함으로써 이에 맞섰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개입했다. 새로이 황제가 된 카를 5세가 루터를 보름스의 제국의회에 소환해 법의 보호를 박탈한다는 위협과 함께 신학적 견해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루터는 굴하지 않았다. 신변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작센 선제후가 나서서 루터를 발트부르크의 은신처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 아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성서에 근거한 자신의 새로운 신앙이 갖는 정당성을 알리려면 속인 신도들도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년여 만에 성서 번역이 끝날 무렵 루터를 지지하는 움직임은 독일 내 주요 도시는 물론 농촌 지역에까지 번져 종교개혁이 본격화됐다.
지금까지 서술이 보여주듯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은 루터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루터의 이름은 종교개혁의 대명사이며, 그는 역사를 창조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1517년 95개조 반박문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처럼, 종교개혁과 개신교가 마치 루터의 머리에서 창조된 것인 양 여기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루터는 1517년 이후 자신이 연루된 일련의 사건과 관련해 한 번도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교회를 비판하고 나선 루터의 원래 의도는 내부 개혁을 통한 ‘교회의 복원’이었지 개신교라는, 중세교회의 전통에서 단절된 새로운 종파의 창립이 아니었다. 루터는 자신의 교리보다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교회의 태도 때문에 로마교회와 결별했다는 점에서 ‘마지못해’ 종교개혁가가 됐으며, 자기 의도에 반(反)해 역사상 가장 혁명적 인물이 된 셈이다.
사실 루터는 칼뱅이나 뮌처 등 당대 다른 종교개혁가에 비하면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개신교회 가운데 루터파는 칼뱅파와 달리 종교적 의례, 음악, 복식, 교회 내부 장식 등에서 중세의 전통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며 1524년 반란을 일으킨 독일 농민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종교개혁 과정에서의 루터의 역할도 재평가할 부분이 있다. 루터의 동시대인들은 새로운 종교적 변화가 모두 루터에 의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신앙에서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도 루터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원시 기독교와 성경 원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뿐 아니라 성서의 말씀을 중시하는 경향은 이른바 ‘복음주의’ 운동의 형태로 이미 당대 속인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것도 성직자나 교회가 아니라 속인 평신도들이었다. 면죄부 판매를 두고 성직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 시비를 가리는 것은 도시 시민층의 몫이었다. 교회가 속인의 분쟁을 가리던 중세와 비교하면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