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서울 구로동 조선족교회에서 열린 재중동포 국적회복 운동 발대식. 재중동포의 한국적 회복은 중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옌볜자치주의 명목상 해체 이유는 자치주 구성요건의 상실. 중국은 소수민족 비율이 30%를 넘겨야 자치(自治)를 인정하는데, 현재 옌볜의 재중동포(조선족) 비율은 27%대 이하로 떨어진 것. 그런데 실재 비율은 그 이하라고 한다. 호구(호적)만 옌볜조선족자치주에 두고 나가 사는 사람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자치주를 해체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대한민국에 기댄 조선족들이 경제력과 민족의식이 높아져 동북공정에 반대하는 등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58년간 유지돼온 조선족 공간
옌볜자치주는 흔히 간도(間島)라 부르는 곳이다. 중국 지린성 동남부에 자리해 북한의 함경북도와 맞닿아 있으며, 지린성을 구성한 9개 광역단체 중에서 가장 면적이 넓다. 일찍부터 조선족이 이주해 개척한 곳이기에 항일독립운동이 거셌다. 1952년 9월 옌볜조선족자치구로 지정됐다가 1955년 12월 옌볜조선족자치주로 승격돼 강한 민족공동체를 유지해왔다. 자치구 시절부터 따지면 58년간 유지돼온 조선족의 정치 행정 공간이다.
자치주 면적은 한국(남한)의 절반에 육박하는 4만3474km2, 주도인 옌지(延吉)시를 비롯한 5시(市) 3현(縣)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인구는 약 216만으로 이 중 30%인 62만 명 정도가 조선족이다. 15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조선족은 옌볜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다.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사라지면 중국에서는 지린성 바이산(白山)시 산하에 있는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만 남는데, 이곳도 계속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치주의 명목상 1인자는 ‘주장(州長)’이나 실질적 1인자는 주 공산당위원회(이하 당위) ‘서기’다. 중국은 자치주 주장엔 친중국 성향의 소수민족 인사를, 당위 서기엔 한족(漢族)을 임명해 자치주를 운영한다. 주장과 주 당위 서기는 주보다 큰 성(省)의 명목상 1인자인 성장(省長)과 성 당위 서기를 대신해 자치주를 운영한다. 옌볜자치주가 없어지면 자치주는 일반 (광역)시가 되고 주장과 주 당위 서기직이 사라진다.
옌볜자치주가 옌볜시 또는 다른 이름을 쓰는 (광역)시가 되는 것이다. 중국은 (광역)시 밑에 현과 동급인 시가 또 있는 지방제도를 갖고 있다. 자치주가 없어지면 자치주 밑의 5시3현은 약간의 통합과정을 거쳐 새로 탄생하는 (광역)시의 통제를 받는다. 조선족만의 정치 행정 공간이 사라지게 되는 것.
조선족자치주가 붕괴하게 된 이유로는 ‘3각파도’론이 꼽힌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중국의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첫 번째 이유다. 중국은 한 해 평균 1700여만 명의 농민이 도시로 몰려드는데 조선족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엔 칭타오(靑島), 엔타이(煙台), 선전(深), 선양(瀋陽) 등 한국 기업이 진출한 도시가 많기에 조선족은 한족보다 많이 도시로 나가고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돈벌이를 위한 한국 방문이 꼽힌다. 현재 조선족은 5년간의 취업비자를 받아 쉽게 한국으로 나온다. ‘한국 맛’을 본 조선족은 중국에 돌아온 후 대부분 도시로 옮겨간다. 농촌을 떠날 조건이 좋다 보니 조선족 공동체는 한족은 물론 만족(滿族)이나 몽골족 등 다른 소수민족 공동체보다 빨리 무너지고 있다.
우리 정부 개입 어려운 현실
한글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는 옌볜자치주 주도인 옌지시 전경. 조선족 자치주가 해체되면 한글 간판을 의무적으로 달 이유도 사라진다.
옌볜자치주 해체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핏줄은 우리와 같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중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조직 개편에 간여하는 것은 내정간섭 시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중국은 한국이 조선족 문제에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한다.
현재 한국 국적법은 ‘선천적 2중 국적자’에 한해 2중 국적 유지를 허용하고 있다. 선천적 2중 국적자란 미국 등 속지주의에 따라 국적을 부여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한국인이 22세 이후 법무부에 ‘외국 국적 포기 서약서’를 제출하면 한국에서는 외국 국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한국인으로 살아야 하고, 한국을 나가서는 그 나라 국적자로 활동할 수 있다. 이 법을 만들 당시 조선족들은 “원래 한국인이었으니 이 법의 적용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중국 측은 “조선족은 원래부터 중국인이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때문에 한국은 조선족을 ‘원래부터의 한국인’으로 여기지 못하고 중국 국적자로 보게 됐다. 이러한 경험 때문일까. 한국 정부는 중국의 지방제도 개편에 이렇다 저렇다 개입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자치지역에서는 간판과 각종 문서에 중국어와 소수민족 언어가 함께 쓰인다. 자치가 해지되면 이런 의무가 사라지므로 소수민족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사라질 수 있다. 민족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재중동포들은 걱정만 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위구르자치구 사태와 티베트자치구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강경 입장을 알기에 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민족정체성 사라질까 걱정
중국은 한족만이 아니라 55개 소수민족 모두를 중국인으로 본다. 따라서 중국에 있는 고조선과 고구려 유적은 중국을 구성하는 조선족 선조의 유산이기에 중국 유적이고, 두 나라도 중국의 역사에 포함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중국이 옌볜자치주를 없애려는 것은 ‘역사 동북공정’에 이어 ‘지방행정의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우리 민족공동체 하나가 사라지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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