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풍경과 누드’, magna, graphite, tape and printed paper collage on board, 76.2×101.6cm, 1995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점’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면을 채우고 있는 점들 말이죠. 바로 ‘벤데이 점’(Benday dots)인데요. 이 인쇄방식을 고안한 벤저민 데이(Benjamin Day)의 이름을 딴 것이죠. 리히텐슈타인은 대량인쇄 방법의 하나인 벤데이 점을 회화에 도입함으로써 인쇄 표면을 확대해놓은 듯한 효과를 줬습니다. 그는 실제로 이 점을 일일이 그린 게 아니라 구멍이 뚫린 판을 사용해 색점들을 일괄적으로 만들어냈는데요. 이처럼 그는 만화라는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만 차용한 게 아니라 ‘대량생산’이라는 제작방식까지 작품에 적용합니다.
‘거리 풍경과 누드’(Nude with Street Scene·1995)라는 작품을 볼까요? ‘스파이더맨’으로 유명한 존 로미타의 만화작품 ‘Heart Throbs’(수많은 여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남자)에서 차용한 이 여성 이미지는 쿠르베, 마네, 툴루즈 로트레크 등 대가들의 작품에 늘 등장하는 여인의 누드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은 실제 여성을 관찰하고 그린 게 아니라 선과 점이라는 기호들을 조합해 입체감과 깊이를 없앤 추상회화에 가깝습니다. 특히 추상회화의 선봉에 섰던 몬드리안이 사용한 삼원색을 작품에 차용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가들이 자신이 관찰한 공간과 대상의 실제를 재현하려 했던 반면, 리히텐슈타인은 대상의 실제가 아닌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재현하는 데 더 몰입했죠. 또 고전뿐 아니라 ‘클리셰’라고 불리는 대중문화 속에도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의 비전이 있음을 도전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인쇄된 종이를 판자에 붙이고 그 위에 얇고 검은 테이프로 윤곽선을 표현한 콜라주 작품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매끈한 작품과 달리 관객들은 종이 위에 매그나(magna·아크릴 물감의 일종)와 흑연, 그리고 검은 테이프로 마무리한 작품을 보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점, 선, 면이 각기 다른 재료로 구성돼 있기에 어느 구성요소도 익숙한 시선으로 볼 수 없는 거죠. 본다는 것의 개념을 해체한 이 작품이 완성된 시기는 그가 죽기 2년 전입니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팝아트의 선구자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시기였음에도 자기 작품의 내적인 발전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실험을 강행한 그를 보며, 새해의 계획을 ‘꾸준한 도전’으로 세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