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가 정몽준 대표, 이해봉 의원(왼쪽 앞)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이하 세종시) 원안 수정 문제를 둘러싸고 한나라당 친이(親李)계와 친박(親朴)계의 벼랑 끝 대치가 이어지면서, 정가 일각에선 ‘한나라당 분당론’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치 속내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당론에 손사래를 친다. 친이든, 친박이든 마찬가지다. 심지어 야당 인사들도 겉으로는 “친이와 친박계를 보면 ‘저분들이 같은 정당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며 분당론을 부추기지만, 속으론 현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친이계의 핵심 의원은 “정작 박 전 대표가 탈당을 결행했을 때 따라 나갈 의원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친박으로 분류되는 한나라당 의원은 60여 명이지만 실제로 박 전 대표가 깃발을 들었을 때 당을 박차고 나갈 의원은 10명도 안 될 것이란 주장이다. 그는 “박 전 대표의 정치적 기반인 영남권에서 동반 탈당자가 속출할 것 같겠지만, 다음 총선과 대선이 한참 남은 시점에서 그런 정치 모험을 감행할 의원은 극소수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종시의 수혜지인 충청권에선 송광호 의원(제천-단양)이 유일한 한나라당 소속이다. 한나라당 장광근 사무총장은 “분당이라는 용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당이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기도 잘 넘기지 않았느냐”며 분당론이 나오는 것 자체를 부정했다.
친이·친박 “말도 안 되는 소리” 합창
친박계 의원들도 분당론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한 의원은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은 공동운명체다. 차기 집권의 시작도 끝도 모두 한나라당”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독보적인 차기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하는 기반이 한나라당 지지층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을 떠난 박 전 대표의 위상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논리다. 더구나 박 전 대표는 2002년 당시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에 반발해 ‘한국미래연합’을 띄웠다가 한계를 느끼고 복귀한 쓰라린 경험도 있다.
다른 친박계 의원은 “만에 하나 분당되더라도 박 전 대표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이 의원들이 집단으로 탈당해 신당을 만드는 모양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당이 위기를 맞았을 때 천막 당사를 꾸려가며 17대 총선에서 선전해 당을 살려놓은 주역이기 때문에 스스로 당을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 세력이 민주당 간판으로 집권한 뒤 민주당을 껍데기만 남겨놓은 상태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2003년의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을 필두로 수도권 친이 세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여당 창당 시나리오 정도는 가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비현실적인 구상이다. 친노 세력은 ‘노무현이즘’의 본격 실현을 위해 집권 초기 열린우리당 창당을 결행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현재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이라 그런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없다. 특히 친박 세력을 남겨놓고 새로운 여당을 만들어도 원내 과반수 의석에 미달하기 때문에 정국 운영에 어려움이 생긴다.한나라당 분당론에 부정적이기는 야권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11월11일 라디오에 출연해 “여당의 한 계파가 야당과 손잡고 여당의 다른 계파와 싸우는 상황까지 간다면 한나라당은 결국 분당의 길로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도 세종시를 매개로 한나라당 친박 세력과 연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인 용어구사일 뿐이다. 야권 관계자는 “사실 재집권을 최대 목표로 하는 한나라당이 분당한다는 것은 공멸의 길로 가는 것임을 친이와 친박 모두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래왔듯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도 양 계파가 절충점을 찾을 것”이라고 관측했다.결국 이래저래 한나라당은 분당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럼에도 분당설은 끊이질 않는다. 특히 차기 대권구도와 연결된 내년 2월 조기 전당대회론이나 6월 지방선거 공천경쟁과 맞물리면서 이번에는 당이 쪼개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견해가 더러 있다. 박 전 대표도 세종시 원안 수정에 대해 “당의 존립 문제”라고까지 말했다. 배수진을 친 셈이다. 이렇게 보면 한나라당 분당설의 실체가 전혀 없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현실성 여부를 넘어 친이와 친박이 세종시를 화약고로 한바탕 내전(內戰)을 치른 뒤 딴살림을 차릴 가능성이 있는 것. 다만 궁극적으로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재결합하는 절차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세종시 원안 수정 문제를 놓고 친박계와 친이계는 벼랑 끝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세종시 원안 수정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린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정치평론가 황태순 씨는 “보수세력 재집권이라는 목표만을 놓고 판단한다면 지금 친이와 친박이 각자도생하는 방법을 신중히 검토해볼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보수’와 박 전 대표의 ‘전통보수’가 사사건건 가치충돌을 일으켜 계속 내상(內傷)을 입으면 보수진영의 재집권은 멀어진다. 따라서 이참에 아예 갈라서서 다른 길을 가다가 다음 대선 직전에 보수대연합을 시도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이다.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현 상황은 이 대통령도, 박 전 대표도 물러설 수 없는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 수정안이 어떻게 나오더라도 새로운 쟁점이 불거지게 돼 있다. 벌써부터 충청권 이외의 지방에서는 “세종시가 지방 이전을 검토 중이던 모든 기업과 연구기관, 각종 국책사업까지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지방 출신의 친박 중진 의원은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 문제를 섣불리 건드리는 바람에 너무 복잡해져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세종시 수정안이 오히려 정국을 더욱 꼬이게 만들 가능성을 우려했다. 여기다 세종시와 함께 정국 파행의 핵으로 부상한 4대강 정비사업도 친이와 친박의 결별을 재촉하는 암초가 될 수 있다. 현재 친박계 일부 의원은 12월 예산처리 과정에서 6조원에 이르는 내년도 4대강 정비사업 예산의 대폭 삭감을 주장하는 민주당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이 이명박 정부의 최대 역점사업인 4대강 정비사업에 칼질을 시도할 경우 여권의 분란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게 뻔하다. 결론적으로 친이와 친박 모두 ‘한나라당’이란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이번 세종시 논란도 적당한 선에서 봉합될 것이란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양 진영이 모두 예상하지 못한 여론의 역풍에 부닥칠 경우 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이 쪼개질 개연성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