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12’ 개봉을 앞두고 ‘2012년 지구 종말론’이 신종플루 최고 위기단계 격상과 맞물려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신종플루는 대재앙의 서막이 아닐까요? 발생한 지 한 달도 안 돼 전 세계로 퍼졌잖아요.”
‘10년 후 나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던 중학교의 한 교실은 종말론 얘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성경에도 선과 악의 최후 대결이 예언돼 있어요. 신종플루의 전염력과 조류독감의 치사율을 가진 바이러스가 나오면 세계 인구의 절반이 한순간에 사라질 거예요.”
영화 ‘2012’ 개봉을 앞두고 사이버 상에서 시작된 ‘2012년 지구 종말론’이 신종플루 최고 위기단계 격상과 맞물려 일파만파 퍼져가고 있다. 지구 종말론이 나온 근거는 크게 네 가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근거가 모두 2012년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근거는 기원전 3114년 마야인들이 만든 달력으로, 이 달력이 2012년 12월21일까지밖에 안 만들어져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역경(易經)을 연구해온 미국 철학자 테렌스 매케나의 역경분석 그래프인 타임 웨이브로, 이것이 2012년 12월21일에 제로 점을 찍고 인류 역사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
세 번째는 400년간 로마에 숨겨져 있다가 발견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로, 지구 종말이 지금까지 알려진 1999년이 아닌 2012년으로 기술돼 있다는 것. 네 번째는 ‘바이블 코드’의 저자 마이클 드로스닌의 성경 암호 해독설로, 하나님이 지구를 2012년 멸망시킨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 밖에 각종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미국 뉴욕의 월가 컴퓨터 프로그램 ‘웹봇’이 2012년에 종료된다는 설도 있다.
마야인 달력·매케나 등 공통 예언
명리학을 비롯한 역경을 공부한 필자는 이 가운데 매케나의 역경분석 그래프에 나타난 2012년 종말론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주역이라고도 불리는 역경은 만물이 나고 죽는 것에 관한 질서를 기호로 설명한다. 64개 상징기호를 통해 우주 변화의 진리를 포괄하는 구조다. 한자의 한 일자처럼 죽 그은 선인 양효(-)와 가운데가 끊어진 모양을 한 음효(--) 두 가지가 6개씩 모여 64괘를 구성한다.
매케나는 6개의 효를 나타내는 줄, 그리고 효의 64개 괘들이 64번 반복되는 4096개 변화율을 수리과학으로 분석해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한 프랙털(부분이 전체의 패턴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 함수를 고안하고 이를 ‘타임 웨이브’라고 지칭했다. 매케나는 타임 웨이브가 4000년에 걸친 인류 역사의 변동 폭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타임 웨이브의 곡선이 상승한 시기에는 영웅이 등장하거나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으며 하강한 시기에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놀랍게도 2012년 12월21일 이 하강곡선이 제로 점을 찍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 역경 연구가가 떠들썩하게 지구 종말론을 연구하는 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동양 역경 연구가들은 이를 몰랐을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주역 대가들을 인터뷰해보니 그들 대부분이 “몰랐다”고 대답했다. 내친김에 역경으로 본 2012년의 괘상을 물으니 한 학자는 “‘천풍구’가 이효 동(動)을 해서 세계의 멸망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선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자는 “2012년의 괘상이 ‘지천태’로 오히려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지천태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어, 하늘의 마음은 땅을 살피기 위해 내려와 있고 땅의 마음은 하늘을 돕기 위해 위로 올라간 형상의 괘다. 같은 해에 대해 전혀 다른 괘상이 나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다. 역경 체계 자체가 심오해 학자마다 다르게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2차 세계대전과 2001년 미국 9·11테러 발발 날짜 등을 유사하게 맞췄다는 이유만으로 매케나 가설을 신봉하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그의 이론엔 결정적 하자가 있다.
매케나 그래프의 결정적 하자
역경에는 ‘삼의(三義)’라는 일관된 이치가 있다. 삼의는 변역(變易), 불역(不易), 이간(易簡) 세 가지로 표현된다. 첫 번째 이치인 ‘변역’은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원리다. 해와 달, 사시, 더위와 추위, 밤낮이 늘 교차한다.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끝없이 반복한다. 변역은 역경의 핵심 이치다. 두 번째 이치인 ‘불역’은 바뀌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새벽과 저녁은 같은 어둠이지만, 새벽에는 일하러 밖으로 나가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쉰다. 따라서 모든 것이 변하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바뀌는 것 역시 하나도 없다고 본다. 세 번째 이치인 ‘이간’은 변역이 불역이고, 불역이 변역이라는 의미다. 복잡하게 보이는 그 길이 바로 변하지 않는 하나의 길이다. 삼의를 통해 보면 천국이 바로 지옥이 되고, 지옥이 바로 천국이 된다. 음양은 서로 반발하고 의존하며 천지의 법칙을 형성한다.
또한 역경의 64괘 배열에서 마지막 괘의 이름은 ‘미제(未濟)’다. 글자 그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제’괘 바로 앞에 있는 괘의 이름은 ‘기제(旣濟)’다. 이는 ‘완성됐다’는 뜻으로, 두 괘만 보더라도 역경에 내재된 ‘무한한 순환원리’를 읽을 수 있다.
재앙 시한폭탄은 째깍거릴 수도
그러므로 2012년 12월21일에 만물이 끝난다는 매케나의 ‘타임 웨이브 제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끝이 끝으로만 끝나는 불식(不息)은 역경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임 웨이브 제로라니! 이 점에 대해 매케나에게 묻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는 2000년 세상을 떠났다. 매케나의 타임 웨이브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들어 패턴의 반복이 잦아지는 양상을 보였고 이는 기원전 500년 무렵보다 64배 빠른 속도라고 한다.
2010년에 이르러서는 그 속도가 64배 더 빨라지고 2012년이 되면 또다시 64배 빨라진다. 또 2012년을 지나면서는 변화 간격이 1개월에서 1주를 거쳐 1일 단위로 압축되며 대단히 빠른 속도로 0을 향해 움직인다고 한다. 필자는 매케나가 예견한 대로 2012년 12월21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2012년 12월21일은 지구 종말일이 아니라, 가속화한 세계에 각성을 불러올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호조로 전환되는 급격한 변화 시점)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매케나의 지적대로 재앙의 시한폭탄이 그 시점에 째깍거릴 수는 있다. 인간의 욕심이 커지고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지구 온난화, 핵무기 개발 등이 가속화되며, 자연재해와 치명적인 질병들이 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통신, 생명공학 등의 진보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능화된 로봇이 노동을 하고 인류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시점이 2012년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류 멸망을 그린 영화 ‘2012’를 만들고도 “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는다. 2012년 후에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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