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9월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김두한.
그런데 김두한이 김좌진(金佐鎭·1889∼1930)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미화될 수 있었을까. 김좌진 또한 그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다소 미화된 측면이 있다. 두 부자가 함께 우리 현대사에서 미화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사의 올바른 복원이 우리 시대의 과제일진대 이들에 대한 검증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 먼저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냐, 아니냐가 규명돼야 한다.
홍성의 안동 김씨 문중에서는 대개 인정하고 있지만 석연찮은 점도 없지 않다. 김두한이 출생한 시기를 전후해 김좌진은 복역 중이었다. 김두한이 태어난 1918년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또 김두한의 모친이 조선시대 상궁의 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김두한의 외할머니는 국왕의 은총을 받은 것이고 김두한의 어머니는 국왕의 딸이 되는 셈이다. 그럼 김두한은 조선 왕실의 외척이 아닌가.
김두한의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1963년)에는 7세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 김좌진을 만났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에 대한 감시가 철저한 상황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설에는 해방 후 김두한이 좌익 측이 조직한 학병이나 국군준비대에서 활약할 때 우익 측의 이범석(李範奭·1900∼1972)이 알려줘서 아버지가 김좌진임을 알게 됐고, 그때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반공투사가 됐다고 한다.
한국 독립전쟁사의 전설인 청산리대첩 하면 떠오르는 이가 김좌진 장군이다. 이범석은 ‘우둥불’(1971년)에서 청산리전투 직전 홍범도(洪範圖·1868∼1943) 부대가 비굴하게 탈주했고 자신이 소속된 북로군정서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섬멸했다고 강조해 김좌진과 자신을 부각했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청산리대첩의 주인공 홍범도는 철저히 배제된 채 김좌진·이범석 두 사람만 미화된 측면이 있다.
김좌진은 고려공산당 박상실에 피살
그러나 일본 측 자료인 ‘간도출병사’(1921년, 조선군사령부)는 홍범도 부대의 활약이 일본군에게 훨씬 치명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최근 독립운동사는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회 산하의 독립군 등의 연합부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약관의 나이에 청산리대첩을 지휘한 이범석은 누구인가. 해방 후 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해 극우세력의 핵심이 됐고 대한민국 출범 당시 초대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또 부산 정치파동 때 내무부 장관이 돼 이승만의 독재를 공고히 하는 악역을 맡았고, 자유당 창당 당시 족청계의 총수로 주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도 노회한 이승만에 의해 자유당에서 축출, 숙청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좌진이 청산리대첩 후 일본군에게 피살됐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김좌진은 1930년 1월24일 중국 길림성 영안현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현재 해림시) 부근에서, 자신이 경영하던 정미소에서 1년간 일했던 박상실(朴尙實)에게 피살됐다.
1927년 좌우 합작의 신간회 결성 이후 1920년대 말 만주에서도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돼 혁신의회와 국민부가 결성됐다. 당시 김좌진이 주도한 혁신의회는 한족총연합회로 개편되는 등 다소 혼란한 시기였다. 박상실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대체로 고려공산당 청년회 소속으로 보고 있다. 당시 그는 김좌진을 친일파로 봤는데, 무정부주의자와 제휴한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일본 정보기관에 넘겨줬다고 생각한 것이다.
청산리대첩과 연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동안 국가 의식 등에서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해온 애창가곡 ‘선구자’(‘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로 시작하는)가 실제로는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작사자 윤해영(尹海榮·1909∼?)과 작곡가 조두남(趙斗南·1912∼1984)에 대해선 친일파 의혹이 제기됐는데도 독립운동가로 미화돼왔다.
‘선구자’가 1932년 창작됐다는 조두남의 주장과는 달리, 이 노래가 일제 말인 1944년에 발표된 ‘룡(용)정의 노래’를 해방 후 개작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사실이라면 그동안 우리가 목 놓아 부른 ‘말 달리던 선구자’는 독립군이 아니라, 독립군을 추격하는 일본 관동군 장교였던 셈.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명확한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일제강점기 종로를 놓고 야쿠자와 벌인 김두한의 활약상에선 인정할 부분도 있지만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다.
그가 야쿠자 보스인 혼마치(충무로)의 하야시패와 대결했다고 하나, 사실 하야시는 조선인 선우영빈으로 그의 부하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하야시는 일본인과 밀착됐을 뿐이다. 해방 공간에서도 김두한은 대한민주청년동맹 감찰부장으로 1946년 9월 총파업, 10월 대구인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백색테러를 감행, 암흑가의 주먹패거리가 정치판에 동원되는 나쁜 전례를 만들었다.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의 장례식. 부하 독립군 용사들이 유해를 메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그 후 김두한은 1954년 서울 종로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 직후 국정연설에서 “나는 국회의원에 입후보할 때 제 동지들과 선거구민에게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이역만리 만주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과 투지를 이어받아 오로지 한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우겠노라고! 만일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나 김두한은 의정단상에서 할복자살도 불사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한다 이겁니다”라고 일갈했다.
당시 국회사에 기록된 김두한의 의정활동은 거의 없으나, 자유당 시절 국회에서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몰아붙인 의원은 그가 유일했다. 그 후 서울 등 수도권에서 민주당 바람이 불면서 연이어 총선에서 낙마하다 한일협정 비준과 관련해 몇몇 야당의원이 사퇴하고 치러진 1965년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용산구). 그러나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비운을 겪었다.
김두한의 일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일권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 오물투척 사건’(1966년 9월22일)이다. 당시 그는 신상발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는 내가 늘 별장 삼아 들어가는 곳입니다. 한 사십 몇 번 들어갔으니까 그것은 상관없고, 나 또 들어갈 심정이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것은 국민의 재산을 도적질하고 합리화하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사카린올시다. 그러니 이 내각은 골고루 맛을 봐야지.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라고 외쳤다. 한국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킨 그는 자신의 말대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의원직을 사퇴했다. 3개월 후인 1966년 12월 말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1968년 수원선거 유세에서 “북한에 전깃불이 먼저 들어왔다”라고 말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또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는 횟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감방을 드나들었고 중앙정보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여튼 보통학교 2학년 중퇴의 김두한이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다는 사실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그러한 그의 기이한 인생역정이 인구에 회자됨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55세라는 한창 나이에 낙엽 따라 가버린 그가 오늘날 해머, 전기톱, 소화기가 난무하는 폭력 국회를 본다면 선배 국회의원으로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평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