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병·의원에서 들어온 신종플루 의심환자의 검체.
“어느 의사가 그래? 왜 정부 말을 안 듣는 거야!”
11월3일 오전, 기자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버럭 화부터 냈다. 아내는 발열과 어지럼, 두통, 기침 등 신종플루 증상이 나타난 큰아이(14)를 데리고 동네 내과의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의 처방을 거부했다.
“지금 증상만으로는 신종플루로 확진할 수 없다.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급기야 기자가 직접 의사에게 전화해 “신종플루 증상 중 하나만 있으면 타미플루 처방을 해주라는 게 정부 방침 아니냐”고 따져 물었지만, 의사는 “거점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으라”며 전화를 끊었다.
끙끙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오후에 거점병원에 갔더니 환자 대기실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시간을 기다려 진료 순서가 되자 의사는 신종플루 간이검사 키트를 내밀었다. 기자가 “이 검사는 민감도가 떨어져 보건당국조차 받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바로 타미플루 처방을 해달라”고 말하자 의사는 “환자가 너무 많아 확진검사에 4~5일이 걸린다. 일단 간이검사를 해야 타미플루를 처방할 수 있다”며 버텼다. 울며 겨자 먹기로 2만원을 내고 검사를 하니 결과는 ‘양성’.
정부의 준비 부족이 부른 ‘검사대란’
병원 측은 그제야 “타미플루를 처방했으니 확진검사는 받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아이의 증세가 없어지고 확진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항체가 생겼다는 얘기. 즉, 신종플루 예방백신을 맞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12만원을 더 내고 확진검사를 받기로 했지만, 대부분의 다른 소아환자 부모들은 타미플루만 처방받고 자리를 떴다. 확진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데 또 1시간.
”너무 힘들다”고 보채는 아이를 다그쳐 확진검사를 마친 뒤 타미플루 닷새치를 받아드니 이런 중구난방이 없다 싶었다. 정확히 닷새째인 11월7일 늦은 오후 거점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는 이미 타미플루를 먹고 언제 아팠느냐는 듯 멀쩡해진 뒤였다.
“확진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신종플루가 맞습니다. 지금 아이의 증세는 어떤가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고생을 시켜놓고 이제 와서 증세가 어떠냐고 묻다니….
10월20일 이후부터 신종플루 확진검사를 받지 않아도 증세만 있으면 타미플루를 처방하라는 정부의 지침이 각 병·의원에 하달됐지만, 아직도 일선에서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다. 보건당국이 신종플루 확진 전 항바이러스제 처방을 허용한 것은 30분 만에 나오는 간이검사의 오검률이 너무 큰 데다 확진검사에 턱없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 보통 24~48시간 이내에 나와야 할 확진검사 결과가 최근 환자 수가 늘어나면서 4~5일씩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타미플루 등 항바이러스제는 발열 이후 48시간 이내에 먹어야 약효가 가장 높은데, 확진검사가 늦게 나오다 보니 치료시기를 놓치기 일쑤.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 신종플루로 사망한 경우의 많은 수가 동네의원에서 일반 독감으로 치료받다가 폐렴 등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3차 의료기관에 왔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던 것. 최근 사망 소식으로 충격을 준 탤런트 이광기 씨의 아들이나 건강한 20대 여성이 그런 경우다.
검체에서 신종플루 바이러스 RNA를 뽑는 기계(맨 왼쪽). 신종플루 바이러스 RNA와 시료를 섞어 플레이트에 담고 있다(중간 및 오른쪽).
일본의 신종플루 확진환자 수가 우리보다 10배 이상 많은 이유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일본에선 늦어도 36시간 안에 확진검사 결과가 나오므로 검사 결과가 나온 뒤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해도 합병증에 대처할 시간이 충분하다.
따라서 확진환자 통계에 허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항바이러스제 처방의 전제로 확진검사를 요구하는 의사가 많다 보니 검사 의뢰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결과 통보가 한없이 늦어진다. 한편으론, 일단 항바이러스제 처방을 받은 환자는 확진검사를 안 하는 게 보통이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쯤이면 환자는 이미 완쾌된 상태라 검사의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신종플루 확진환자나 다름없는데도 통계에서 누락된다는 게 문제다. 11월10일 현재 타미플루를 처방받은 환자는 140만명에 달하는데 정부가 밝힌 확진환자 수는 그 절반 수준이다.
일본과 다르게 신종플루 확진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뭘까.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신종플루 같은 전파력이 강한 전염병의 대유행에 대비해 진단검사 인력과 장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각 시도의 보건환경연구원을 동원해도 모자라 일반 병·의원급(거점병원 포함)은 신종플루 확진검사를 모두 검사수탁기관에 맡기고 있으며, 대학병원들만 검사시설을 갖추고 확진검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즘 신종플루 확진검사 현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국내에서 신종플루 확진검사를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진 녹십자의료재단의 협조를 받아 어렵사리 현장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신종플루 확진검사 현장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녹십자의료재단은 25년 역사의 수탁검사 전문 의료기관으로, 30개 브랜치를 갖고 있어 전국 어디서나 당일 검체 접수가 가능하다.
다른 질환에 대해서는 전국 49개 대학병원으로부터 임상검사를 위탁받지만, 신종플루는 병·의원의 의뢰만 받고 있다.
11월9일 오후 2시 경기도 용인시 녹십자의료재단 임상검사센터에 도착했다. 1층 경비원이 말없이 체온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 37℃. 미열이 있지만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신종플루센터 내 감염을 차단하기 위한 대비는 철저했다.
크기가 80~120nm(나노미터)에 불과한 신종플루 바이러스도 걸러낸다는 N-95 마스크와 방진복, 방진모, 덧버선을 착용하고서야 겨우 검사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전신 소독을 위한 에어샤워는 필수. 센터 안에 ‘신종플루 전문검사실’이 따로 있었다. 녹십자의료재단 이은희 대표원장(아래 사진)은 “수탁기관이나 대학병원, 공적연구원 중 신종플루 전문검사실을 따로 운영하는 곳은 녹십자의료재단뿐”이라면서 “진단검사 전문의와 조직병리 전문의가 7명이나 있는 곳도 유일하다”고 소개했다. 검사실에 들어서려는데 방진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당일 오전 수도권 병·의원에서 거둬들인 검체들이다.
과학수사 드라마에서 자주 보듯, 멸균 면봉으로 검사 대상자의 입속 목젖 뒷부분을 몇 번 휘저어 유전자(DNA)를 묻혀온 검체들이다(어린이는 콧속에서 빼내기도 한다). 검체는 무균용기나 바이러스 전용용기에 담겨 냉장상태로 이곳에 도착하는데, 이를 검체 전문 관리요원이 특수 제작된 운송상자에 넣어 가져온다. 이 원장은 “운송상자는 외부 온도가 아무리 변해도 내부 온도는 변하지 않도록 설계됐으며, 뚜껑을 열지 않고도 내장 컴퓨터 칩 덕에 내부 온도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리얼타임 PCR에 신종플루 바이러스 RNA를 넣어 증폭시킨다. ▶그래프로 나온 신종플루 PCR 검사 결과. 이 검체는 양성이다.
본격적인 확진검사에 들어가면 검체에서 신종플루 바이러스 RNA(리보핵산)를 추출한다. 신종플루 바이러스는 유전자인 DNA 상태가 아니라, 핵산의 단위물질 뉴클레오티드가 길게 연결된 고분자 유기물인 RNA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검체에서 신종플루 RNA만 추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추출된 RNA에 검사시약을 섞으면 바이러스의 DNA가 나오고 이를 일종의 핵산증폭 장치인 리얼타임 PCR 시스템에 넣어 신종플루 고유의 특성을 알 수 있는 부분만 증폭하면 검사가 끝난다.
‘H1N1’ 바이러스가 있으면 양성, 없으면 음성인데 그 결과가 모니터에 그래프로 나타난다. 확진검사 과정에서 사람의 손이 가는 부분은 추출한 RNA와 PCR 시약을 96개의 작은 플레이트에 방울방울 섞어 담아 밀봉한 뒤 PCR 시스템에 넣는 일뿐이다.
‘확진 전 처방’이 최선의 방법
“이 과정도 장갑을 끼고 밀봉된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밖으로 노출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한 사람분의 검사만 한다면 5~6시간이면 끝납니다. 하지만 96명분을 동시에 하는 데다 하루 1만명분에 가까운 검체가 몰려드니 4~5일이 걸리는 거죠. 10월 말~11월 초가 피크였습니다. 10월 말에는 집에도 못 들어갔습니다. 하루 24시간 ‘젓가락질’(신종플루 바이러스 RNA와 시약을 섞는 작업)을 하고 쉴 새 없이 PCR을 돌려대는데도 검사가 계속 밀려들었으니까요.
전국에서 리얼타임 PCR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13대) 전문 검사 인력도 가장 많은 우리가 이러니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겠죠. 하루 검사 정원(4000명)의 2배 이상이 몰려들었으니 말입니다. 이곳 인력은 신종플루가 아니라 과로로 죽을 뻔했습니다. 타미플루가 본격 처방된 때문인지 지금은 검사 건수가 4000~5000명으로 줄었습니다. 24시간 3교대 체제를 가동해 이젠 48시간 이내에 검사 결과를 보내줍니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신종플루 검사실의 강성호 박사(진단검사 전문의·오른쪽 사진)는 3주 가까이 주말도 없이 잠을 설치며 검사에 매달린 탓인지 바싹 마른 입술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녹십자의료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10월26, 27일의 하루 검사 의뢰 건수는 9000건 이상. 10월28일부터 1000건 정도씩 건수가 줄어들더니 11월 초 들어서는 40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0월25일~11월6일 총 의뢰 건수 7만4790건 중 양성률은 52.1%.
검사 의뢰자의 절반 이상이 신종플루 확진환자였다. 강 박사는 “확진검사의 이론상 오검률은 10만분의 1로, ‘실전’에선 사실상 오검이 없다고 보면 된다”고 자신했다.
검사 현장을 둘러보니 확진검사가 늦어지는 책임은 ‘신종플루 증상 발현 후 항바이러스제 즉각 처방’이란 정부 지침을 무시하는 일선 의사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검사시설과 인력이 한정되고 검사비용이 비싼 상황이라면 항바이러스제를 적극 처방해 검사 수요를 줄이는 게 차선책이 아닐까.
만약 검사비용 전액을 국가가 부담하는 ‘항바이러스제 처방 후 확진검사 체제’가 정착한다면 확진환자 통계가 정확해질 뿐 아니라, 신종플루 예방백신 수요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항바이러스제 내성 환자와 내성 바이러스 출현을 빌미로 일부 의사들이 취한 ‘확진 전 항바이러스제 처방 반대’ 움직임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비과학적 행위이자,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환자를 자칫 사지(死地)로 내모는 모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