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테일, 성(性), 폭력, 추리, 하드코어…. 소설이나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일본 문화의 강력한 키워드들이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기 힘든 일본식 상상력이 가미돼 인간 본성을 자극하는 이러한 콘텐츠들은 왜 일본에서 활발히 생성, 융성, 진화할 수 있었을까. 대안공간 ‘루프’의 서진석 디렉터는 “일본 스토리의 힘은 인위적이거나 일시적인 사회현상에서 태동한 게 아니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역사와 사회적 배경의 연속적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일본 스토리, 그 힘의 원천이 된 역사적·정신적·지리적 토양은 뭘까. 탄탄하고 다양한 스토리의 ‘발전소’ 구실을 하는 일본 콘텐츠의 뿌리를 살펴봤다.
서경대 일어학과 이즈미 지하루 교수는 일본인의 문화적 토양을 이해하려면 기원전부터 3세기까지 이어지는 조몬(繩文)시대와 야요이(彌生)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이 두 시대의 전통이 현대 일본인의 습성이나 문화 발달에 밑거름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수렵 및 채집생활을 하던 조몬시대에는 남성적이면서도 활동적이고 정복적인 기질이, 벼농사와 농경문화가 보급된 야요이시대에는 화합적이고 조화로운 기질이 발달했는데 이 시대들의 정서적 배경이 일본인을 규정하는 양 극단적 성격으로 나타나게 됐다”고 분석했다.
조몬시대는 요괴나 숲을 중심으로 한 기담의 형성과 샤머니즘적 전통에, 그리고 야요이시대는 ‘와(和)’를 바탕으로 한 일본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에 영향을 끼쳤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중기인 10세기 전후에는 현대 일본 소설에까지 입김을 미치는 또 다른 틀이 뿌리내리게 된다. 이즈미 교수는 “이 시기에 싹튼 독자적인 문화가 현대 일본 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이 무렵 여성과 아이를 중심으로 한자가 아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보급, 애용되기 시작하면서 ‘겐지 이야기’ ‘침초자’로 대표되는 모노가타리(物語) 문학이 융성할 수 있었다. 주로 1인칭 시점으로 개인의 얘기를 전하는 일본의 대표적 문학 형태인 사소설(私小說)은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이다.
현대 일본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대중문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꼽히는 시기는 에도(江戶)시대(1603~1867)다. 무사정권인 막부(幕府)체제가 출범하면서 이전의 귀족문화 대신 상인을 중심으로 한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때다.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김봉석 편집장(문화평론가)은 “이 시기에 전쟁이 줄어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은 여유 시간을 오락문화를 향유하는 데 보냈다”며 “이로 인해 현대 일본의 문화 콘텐츠 중 노골적으로 성(性)과 폭력을 다룬 소재들에는 하드코어적인 사무라이식 전통이 깃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무라이의 정신세계와 문화는 일본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한국외대 문화콘텐츠학 조소연 강사는 “이는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국화와 칼’에서도 칼로 상징되는 일본적 정서의 주요 코드로 소개됐으며,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사무라이 전통 자체를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가 일본 문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에도시대에 발달한 서민 문화와 근대 상업주의의 융합은 성적 콘텐츠의 발달에 불을 붙였다. 일본 춘화에서 드러나는 낯 뜨거운 성기 묘사, 성을 파는 게이샤 문화 역시 이 시기에 싹텄다. 성에 대한 일본인들의 개방적 성향이 기여한 바도 크다. 중앙대 일어일문학과 이재성 교수는 일본 신화에서 한 여성이 여러 남성과 정을 통하는 얘기를 흔히 발견할 수 있고, 형이 사망하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아 함께 살거나 사촌 간 결혼을 허용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됐다는 점을 들어 일본인의 성적 개방성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 문화의 큰 축을 이루는 성적 콘텐츠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승, 심화될 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일본 현대사와 연결해 해석할 수 있다. 세명대 일본어학과 김필동 교수는 “전후(戰後)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지는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 일본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하는 데 대해 저항 세력이 생겨났고, 이 세력들은 기득권에 대한 불만을 성이나 폭력과 관련된 극단적인 문화 콘텐츠로 표출했다”고 말했다.
[종교적 토양] 다신교 문화, 요괴 스토리를 꽃피우다
다신교 전통이 깊은 일본에서는 초현실적 존재들과의 공생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도쿄의 한 동네 신사와 절 안에 자리한 무덤(왼쪽).
이즈미 교수는 “일본에서는 요괴학회를 운영하거나 대학에서 요괴학을 가르치기도 한다”며 대학 내 요괴학 강의가 인기를 끈다는 최근의 한 일본 신문기사를 소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 기독교와 경제개발의 영향으로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급격히 유실된 기담들이 일본에서는 학계를 통해 체계적으로 계승,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
그는 일본에서는 신사, 절, 무덤이 거주 공간 가까이에 자리하는 만큼 귀신, 신 같은 초현실적 존재들이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공생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특유의 정서가 생겨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귀신, 요괴와 관련된 콘텐츠가 끊임없이 확대 생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서적 토양] 추리소설에 나타난 ‘오타쿠’ 기질
최근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게 된 일본 추리소설은 1980년대에 대거 출간되기 시작했다. 김필동 교수는 “1980년대에 들어 일본 사회가 급격히 다양화하면서 문화나 인간 의식에도 다극화 현상이 생겨났다”며 “변화한 독자의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콘텐츠를 찾으려는 시도가 추리소설을 통해서도 표현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추리소설이 지금까지 융성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인 특유의 ‘오타쿠’(집착적 마니아) 기질이 반영됐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도 많다.
김봉석 편집장은 “1980년대 일본의 각 대학을 중심으로 융성하던 추리소설 동호회에서는 추리소설의 스토리를 일종의 게임으로 생각하고 범인을 색출하는 데 몰두하면서 오타쿠 기질을 드러내는 광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끝까지 파고드는 적극적, 집착적 성향이 꼬리를 문 각각의 단서를 퍼즐처럼 짜맞춰야 하는 추리소설의 본질과 맞아떨어졌기에 추리·범죄소설이 일본의 중요한 현대 문화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타쿠 기질의 기저에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인의 직업의식이 깔려 있다. 세키몬(石門)학파의 주창자인 이시다 바이간(1685~1744)은 ‘일(노동)이 곧 정신수양이자 선’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인 특유의 직업관과 근로 윤리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서진석 디렉터는 “직업 또는 일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자기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이르려는 일본인의 직인(職人)정신, 장인정신, 천하제일주의가 지극히 미시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을 끝까지 파고드는 오타쿠 기질과도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와(和)를 존중하는 문화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외향은 사회공동체의 규격에 맞추되, 표출되지 못한 욕구를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발산하려 한 데서 오타쿠 문화가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형성된 일본인의 오타쿠 기질은 일본의 스토리들이 디테일에 강하고 전문적인 콘텐츠를 담고 있다는 평을 얻게 했다. 몇 해 전 큰 인기를 끈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이나 옴진리교 사건의 재판을 10년간 방청하며 취재한 내용을 활용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 등 최근 작품들에도 이러한 기질이 반영돼 있다. 조소연 강사는 “소설가는 물론 만화가들도 취재여행을 가거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사전 조사를 하는 사례가 많으며, 이러한 노력이 ‘디테일의 힘’을 이끈다”고 설명했다.
[지리적 토양] 육지와 고립된 섬, 빽빽한 숲의 미스터리
도쿄 시부야에 있는 신사 ‘메이지 신궁’. 특정 인물, 신, 자연물을 신령으로 모시는 신사는 일본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또 나무가 곧고 높이 자라는 데다, 빛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고 울창한 숲이 많은 일본의 지역적 조건 역시 문화 콘텐츠 형성에 기여했다는 지적이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숲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의 얘기가 많은 것도 그 때문. 이 작품의 원제 ‘센과 치히로의 가미카쿠시(千と千尋の神隱し)’에서 ‘가미카쿠시’는 주인공이 신의 장난으로 다른 세계로 옮겨져버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조소연 강사는 “숲속에 사는 신과 정령들의 얘기, 깜깜한 숲에서 탄생한 요괴들의 얘기가 많은 이유도 일본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즈미 교수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 등 유명 감독들의 작품에는 숲과 나무에 대한 신앙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고 했다. 이는 마을을 지키는 나무 신 등 자연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다신교 문화와도 연계된다.
한일문화연구소 정지욱 학예연구관(영화평론가)은 “습하고 음습한 지역이 많은 기후적 특성으로 실제 일본에 귀신이 많다고 말하는 무속인이 꽤 많다”며 “그러나 귀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일본에 많다는 사실이 이를 소재로 한 콘텐츠의 융성에 기여한 바 크다”고 해석했다.
일본의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는 이처럼 역사적, 지리적, 종교적, 정서적 토양을 바탕으로 생성 및 발전해왔다.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이용하는 힘, 그리고 풍부한 자본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일본은 앞으로도 이 ‘콘텐츠의 보고(寶庫)’를 무한히 확대 재생산할 수 있으리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