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신과 전문의는 알코올 중독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잔, 두 잔 자신도 모르게 목으로 넘어가는 술. 외로움을 덜어주기도 하고, 고통을 잊게도 해주지만 때로는 적으로 돌변한다.
혈액을 타고 체내 여기저기로 흘러들어 어느 순간이 지나면 신체 기능을 손상시킨다. 소화기는 물론 뇌에도 영향을 미쳐 정신건강까지 위협한다. 뒤늦게 술의 위험을 자각하고 자제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마시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도 또 가랑비를 기다리는 셈. 알코올 중독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술 소비량이 늘면서 알코올 중독의 폐해도 그만큼 늘었다.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술을 마시면서도 그것이 술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중증 중독자가 크게 늘었다는 사실. 이에 보건복지가족부는 2006년 국가알코올종합대책 ‘파랑새 플랜 2010’을 발표했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알코올 중독자의 치료를 돕고 재활, 예방까지 책임진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 이 대책에 따라 국립서울병원과 국립부곡병원은 알코올 중독 전문 치료센터를 운영하면서 상태가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들의 회복을 돕고 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일까. 알코올 중독은 어떠한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나. 증상은 무엇이고, 치료는 가능할까. 이러저러한 궁금증을 품고 국립서울병원 알코올 중독 치료 병동을 찾았다.
5월19일 오전 10시 국립서울병원 알코올 중독 전문 치료센터인 22병동 사무실. 50여 명의 알코올 중독 입원환자가 대화기법 및 정서순화기법 강의를 듣고 있다. 주의 깊게 강의를 듣는 환자도 있고, 아직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더러 있다.
국립서울병원 중독정신과 이태경 과장(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은 “유전적 원인입니다”라는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알코올 중독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술에 대한 개인의 타고난 적응력과 자신감의 비이상적 발현’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알코올 중독자들을 보면 체질적으로 술이 센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아버지가 두주불사이면 자식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많죠. 술 하나는 자신 있다며 몸이 망가져도 끄떡없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어느새 중독이 되는 거예요.”
알코올 중독 치료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이 정서순화기법 강의를 듣고 있다(좌). 환자들이 병동 밖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우).
“술을 40년 동안 마셨어. 그래도 멀쩡했지. ‘뭘 마시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술에 손이 가는 거야. 잠도 안 자. 밥은 생각도 없어. 막걸리 한 병은 딱 두 모금이면 끝나지. 그런데 맛도 잘 모르겠고, 취한 것도 몰라. 여기 와보니 다른 환자들도 주량이 보통이 아니야. 다들 비슷해.”
“완치는 없다” … 알코올 중독은 평생 관리 질환
한 달 전 입원했다는 B(43)씨. 20년간 거의 매일 소주 7병을 마셨다는 그는 밤낮을 잘 구별하지 못할 만큼 신경 계통에 이상이 왔다.
“술을 마시면 밤인지 낮인지 모르겠는 거야. 또 그것만 생각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라고. 당연히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감이 안 왔지.”
알코올 중독자의 행동유형 가운데 하나는 시간 개념을 상실한다는 점. 밤낮이 바뀌도록 술을 마시다 어느 순간 아예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이에 대해 이 과장은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면 향후 계획도 세우지 못한다”며 “그러다 보니 무조건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시간 개념의 상실은 고유의 생체리듬 역전 현상과 직결된다. 모든 생물은 고유의 생체리듬을 지니는데, 알코올 중독자들에게선 보통사람들과는 정반대의 흐름이 감지된다. 이 과장은 “인간은 주간성 동물이기 때문에 주요 활동시간인 오후 2~4시에 혈압이 가장 높아졌다가 새벽 3~4시에 가장 낮아진다”며 “반면 알코올 중독자들은 늦은 밤이나 새벽에 오히려 생체리듬이 활발해지거나 아예 일정 리듬을 잡기 어려운 상태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흥미로운 부분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점도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나타나는 큰 특징 가운데 하나. 이 과장은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여가활동을 해보고 개그 프로그램을 봤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노(No)’라는 대답이 돌아온다”고 전했다.
“특이 질환이 아니고 그저 당뇨병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치료받으면 완치가 가능하냐는 기자의 물음에 이 과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뇨병처럼 치료는 치료대로 하되 평생 관리해야 한다는 것. 중독을 경험한 이후에는 아무리 관리 중이라 해도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게 쉽지 않은 까닭이다.
국립서울병원 중독정신과 이태경 과장(위). 치료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이 읽는 해외 알코올 중독자 치료 사례집(아래).
진짜 술은 아니지만 그만큼 환자들이 음주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는 방증이죠. 병동 규정에는 비닐로 포장된 일반 빵만 반입 가능하고, 제과점 빵은 (봉투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어서) 반입을 금지한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식빵의 중앙을 파내고 거기에 술을 감춰서 들여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술을 멀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독 치료 과정을 끝낸 환자들의 재입원율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45세의 C씨는 무려 17년간 이 병동에서 알코올 중독 관리를 받고 있다. 눈이 약간 풀려 있고 발음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혈색이 좋고 늘 웃는 낯이었다. 예전보다 상태가 호전된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이곳에 와서 몸이 많이 좋아졌나요?”
“네. 지금은 전혀 술 생각이 안 나요. 20세 때부터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어요. 지금도 오전에 병원에 와서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고 오후에 집에 가요.”
이처럼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는 여느 병동과 대조적이라고 할 만큼 분위기가 자유롭다. 이 병원의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는 성주병동과 해주병동으로 나뉘는데,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져 응급실에서 직행해온 해주병동 환자들은 몰라도 성주병동 환자들의 상태는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입원한 지 얼마 안 된 일부 환자들은 금단 증상으로 고생하지만, 대부분 밝은 모습으로 하루 일정을 소화한다. 그 때문일까.
이곳 의료진은 환자의 정상적인 생활과 생체리듬을 찾아주는 데 치료의 중점을 둔다. 외출 후 복귀시간을 어기는 등 규정을 위반하면 벌점을 주는데, 이것 역시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시간 상황에 대한 판단력을 향상시키는 훈련 과정이다.
말술 마시던 D씨 “입원 후회한 적 없다”
이곳에 입원한 환자들은 오전 6시30분에 기상해 오전, 오후 교육을 받고 중간에 산책과 휴식을 한 뒤 오후 10시에 취침한다. 3주 후에는 보호자의 동의하에 외출과 주말 외박이 허용된다. 환자들은 개인 상태에 따라 하루 두 번씩 충동을 억제 및 조절하는 약을 먹는다.
항갈망제, 항불안증, 항우울증약이다. 입원 기간은 한 번에 3개월이고, 한 달 주기로 3차례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이 과장은 “중독 치료센터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큰 의미를 둔다. 실제 100% 환자들과 가족이 원해서 이곳에 입원한다”고 밝혔다.
제주 출신인 D(37)씨는 결혼을 앞두고 가족과 약혼자의 동의를 얻어 입원한 뒤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 D씨도 매일 소주 8~9명을 마시던 ‘말술’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본인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지만, D씨는 “입원 결정을 후회한 적 없고, 입원한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A씨도 “들어올 때는 암 선고를 받은 것처럼 심적 고통을 겪었는데 이제는 다 사라졌다”면서 “치료가 끝날 즈음엔 ‘내가 술을 끊었구나’라는 자부심을 느낄 것 같다”며 D씨의 말을 거들었다.
취재를 마치고 병동을 떠나려는 순간, 입원 환자 가운데 가장 어린 E(27)씨가 재미있는 말로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제 술과 안 싸우려고요. 기사 잘 써주시고, 우리 밖에서 만나요. 아, 저기 간호사들 오시네. 예쁘다, 하이!”
서울의 유명 나이트클럽 웨이터인 E씨의 ‘재간’에 함께 있던 환자들과 의료진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의 문을 두드렸지만 나올 때는 분명 희망도 봤다. 언제 그들이 다시 ‘가랑비’를 맞을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