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질환 권위자인 변관수 고려대 구로병원장.
해마다 금연 캠페인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보건복지부가 술에 대해선 ‘금주’ 대신 ‘절주’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담배는 한 개비만 피워도 몸에 해롭다는 데 의학계의 합의가 있었지만(소송과는 별개) 술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광고 어디에도 술을 한 잔만 마셔도 국민의 건강에 해롭다는 말은 없다. 술 마시고 결근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건강이 나빠졌다고도 할 수 없다. 광고에 비친 음주 폐해는 모두 사회적인 부분. 문제는 술이 아니라 그 빈도와 알코올 섭취량이다.
폭탄주를 사랑한 酒黨 간박사들
사람들에게 술의 가장 큰 해악이 뭐냐고 물으면 “간 손상”이라고 대답한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엔 실제로 얼굴이 어두워진다. 이럴 때 사람들은 “간을 혹사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국내 최고 권위의 ‘간 박사’로 잘 알려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김정룡(74) 박사는 칠순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두주불사하며 제자들과 폭탄주를 즐긴다. 현재 대한간학회 소속의 내로라하는 교수들은 대부분 그의 영향을 받은 (범의의) 제자이거나 후배들. 김 박사는 현직에 있을 때 “소주를 매일 한 병 정도(알코올 40~80g) 마셔도 간질환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소위 ‘김정룡 사단’이라 불리는 서울대 부속병원 간연구소와 내과 교수들 사이에는 금주회(금요일 술 마시는 모임)와 목탄회(목요일 폭탄 마시는 모임)가 아직 있으며, 이 모임의 좌장은 여전히 김 박사다.
기자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무렵, 세계적인 간 전문가로 알려진 이종수(80) 박사와의 술자리를 잊을 수 없다. 당시 독일 본대학 종신교수로 있던 그는 저서 ‘간 다스리는 법’(동아일보사 펴냄) 출간과 관련해 한국을 찾았다. 이 박사는 초면인 기자와 저녁을 먹다가 대뜸 “폭탄주 마셔요?”라고 물었다. 기자가 “의사, 검사, 기자는 다 잘 마시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 박사는 바로 폭탄주를 제조했다. “아니, 간 박사님이 간에 해로운 폭탄주를 드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거의 꾸지람에 가까운 답변이 돌아왔다. 말은 안 했지만 ‘의학 담당기자란 사람이 이렇게 무식해서야…’ 하는 표정이었다.
“폭탄주든 뭐든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마시느냐가 문제예요. 소주 한 병에 해당하는 알코올은 매일 마셔도 간에 전혀 지장이 없죠. 다른 신체기관엔 몰라도. 폭탄주는 맥주의 탄산까지 들어가 더 빨리 취할 수 있어 좋잖아요. 일찍 취하고 일찍 자면 아침에 깨끗하지, 1시간에 알코올 8g이 해독되니 취침시간에 해당되는 양만큼만 폭탄주를 마시면 되지. 매일 이렇게 마시고도 논문 5편은 꼭 보고 자는데, 한국의 후학들은 논문을 너무 안 읽어요.”
한국 간 학계의 큰 스승인 김정룡 박사.
[변관수 고려대 구로병원장]
“독주 희석시킨 폭탄주, ‘원칙’대로만 마시면 좋은 술”
그렇다면 현역의 간 박사들은 술과 건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이를 자신의 음주생활에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술’ 하면 생각나는 대학교가 있다. 고려대, 그중에서도 간질환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변관수(52) 고려대 구로병원장(소화기내과 교수)이 떠올랐다. 술과 간에 대한 논문을 많이 냈고 인용 빈도도 높은 인물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술이 간에 나쁜가.
“무조건 간에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술에겐 죄가 없다’. 그 안에 든 에틸알코올이 문제다. 보통 소주는 알코올 도수 20도를 기준으로 360ml 한 병에 57.6g(상자기사 참조)의 알코올이 들어 있다. 에틸알코올 자체도 아주 소량을 매일 먹는다면 간에 좋고 나쁠 게 없다. 소주 2~3잔이 심혈관계에는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술도 잘 마시면 약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내 전공이 아니라 단언할 수 없지만 특히 레드와인이 그렇다고 한다. 남성이 10년간 자기 몸무게 10배 이상의 알코올을 섭취하면 간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이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뿐 아니라 비만한 사람에게도 지방간은 있다. 알코올성 지방간은 술을 안 마시면 저절로 없어진다. 문제는 알코올성 간염과 간경화인데, 중증 간질환에 걸리려면 많고 잦은 알코올 흡수와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등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술을 지독하게 많이 마셔도 알코올성 간질환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보면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성 간질환에 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미리 알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인의 10%쯤이 그럴 거다. 간에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적은 사람이다. 아예 효소가 없는 사람도 있다. 우리 대학 교수 중에도 있는데, 알코올이 들어간 음식만 먹어도 쇼크가 온다. 응급실에 실려가 겨우 살아난 적도 있다. 그래서 학회 참석차 외국에 나갈 경우 응급 상황에 대비해 식당에 갈 때마다 후배 교수를 끼고 다닌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절대 술을 권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술을 마시면 바로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럭저럭 잘 마시는 사람도 있다.
“간에는 알코올을 분해하는 몇 가지 효소가 있는데, 흡수된 알코올의 대부분을 산(酸)으로 만들어 오줌과 땀, 호흡 등으로 빼내는 효소가 하나 있고, 또 아세트알데히드로 분해하는 효소(알데히드)가 있다. 그런데 알데히드는 사람을 괴롭힌다. 피부 혈관을 확장시키고 뇌와 신경에 과민 반응을 일으킨다. 이 효소가 잘 작동되는 사람은 얼굴이 빨리, 그리고 잘 빨개진다. 과음한 다음 날 두통, 구토 증세가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 효소가 잘 작동하는 사람은 좀처럼 알코올 중독에 걸리지 않는다. 며칠간은 술이 꼴도 보기 싫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 효소가 잘 작동하지 않는 사람, 즉 술을 마셔도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알코올을 산으로 분해해 몸 밖으로 내보내는 효소가 잘 작동하는 사람은 중독이 되기 쉽다. 술을 많이 마셔도 척척 분해되고 고통이 없으니 술 먹기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고 딱히 간이 손상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까 말했듯, 알코올성 간질환은 간의 알코올 분해 능력과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두루 맞아떨어져야 걸린다. 반면 얼굴이 빨리 빨개지는 사람은 뇌를 비롯한 신경계와 타 장기에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간질환에 안전한 술의 양은 어느 정도인가.
“사람마다 달라 특정하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남성은 하루 알코올 섭취량 30~40g(알코올 도수 20도 기준으로 소주 반병에서 2/3병)이다. 여성은 알코올 분해 능력이 남성보다 많이 떨어진다. 소주 1/3병 정도가 안전선이다. 요즘 술 잘 마시는 여성도 많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자신이 알코올 중독임을 알아채는 방법이 있나.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술을 마시면 비판력과 분별력을 상실한다 △술을 마시는 데 대해 죄의식이 든다 △눈만 뜨면 술 생각이 난다. 이 가운데 2개 이상에 해당하면 중독을 의심해야 한다. 주로 혼자 마시는 사람들이 위험하더라. 알코올 중독 환자 중 서로 모르던 3명의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하다 결국 모두 간경화로 사망한 경우가 있다. 세숫대야에 소주를 가득 부은 뒤 빨대를 꽂고 매일 쭉쭉 빨아먹었던 것이다. 밥도, 물도 안 먹고 소주만 마셨다. 마시다가 잠들고 깨면 또 마시고. 그러다 결국 죽었다. 매일 소주 20~30병을 1년간 마셨다. 그러면 간질환으로 확실하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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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 무죄론 “잠 충분히 자면 OK!”
일과 후에 인터뷰를 시작한 탓에 곧 저녁식사 시간을 넘겼다. 근처 횟집으로 옮겨 인터뷰를 계속하는데,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 새 ‘폭탄주’ 제조가 시작됐다. 고려대 구로병원 의료진의 단골 횟집인 듯,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조기’가 들어왔다. 맥주:소주 70:70의 폭탄주(각 술잔의 7부씩 채운 ‘7부주).
폭탄주를 자주 마시는가.
7부 폭탄주(아래)를 만들어 권하는 변관수 병원장.
술을 쉬는 건 언제인가.
“토요일과 일요일.(웃음) 보직을 맡고 있어 저녁에 행사도 잦고 사람 만날 일도 많아서 그렇다.”
폭탄주는 아주 나쁜 술버릇으로 알려져 있다.
“술을 왜 마시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윤활유 구실을 하고, 인생사 슬프고 기쁠 때 마시지 않나. 폭탄주도 여느 술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독주의 알코올 도수를 희석시킨다. 우리는 주로 연한 ‘맥소 폭탄’을 마시는데, 사실 맥소 폭탄 한 잔은 70:70 기준으로 알코올 양이 9g 정도에 불과하다. 소주 한 잔에도 7.5g이 들어 있으니 특별히 나쁠 게 없다. 게다가 맥주의 탄산은 취기를 빨리 오르게 해서 술자리를 금방 끝나게 만든다. 간에도 더 나쁠 건 없다. 섭취하는 알코올 양이 같다면…. 언젠가 대한간학회에 갔더니 맥주와 양주의 혼합 비율에 따라 폭탄주에 들어간 알코올 양을 계산한 후배 교수가 있더라. 대단한 친구다.”
폭탄주를 몇 잔 정도 마시나.
“그런 건 계산하지 않는다. 즐기면서 천천히 마시고, 못 마시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는다. 철칙이다. 대부분 7시 넘어 술자리를 시작해 소주를 마시다가 폭탄주로 넘어간다. 10시에 집에 들어가 8~9시간 푹 자면 괜찮다. 간에서 1시간 동안 분해하는 알코올이 8~9g이니까 8~9잔은 마셔도 문제없다.”
환자들에겐 엄격하지 않나.
“술은 정상인에겐 관대하지만 질환, 특히 간질환이 있는 환자에겐 독약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 술냄새를 풍기면서 환자를 보지 않는다. 환자는 절대, 단 한 방울도 안 된다.”
정말 칼 같은 사람이다. 저녁 9시가 되니 “이제 더 할 얘기도 없는 것 같으니 일어서자”고 했다. 분위기로 봐서는 끝까지 갈 듯하더니 아니었다. 10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내일 업무를 소화할 수 있단다. 기자와 변 원장이 마신 소주와 폭탄주는 각 4잔. 소주 360ml 한 병은 50ml 잔으로 7.2잔이 나오니 1인당 총 알코올 섭취량은 약 65g. 정상인이 8~9시간 자고 나면 분해되고도 남는 수치였다.
[서울대 의대 소화기내과 김윤준 교수]
“적당한 양의 술은 유일하게 검증된 장수 보약”
서울대 의대 김윤준 교수. 폭탄주에 든 알코올 양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술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보나.
“사실 술의 해악은 사회적인 게 대부분이다. 음주운전, 폭력, 중독, 생산량 감소, 자살에 이르기까지. 술은 양날의 칼이다. 소주 2~3잔(여성은 1잔)을 매일 마시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확실하다. 의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운동과 아스피린이 사망률을 낮춘다는 것은 아직 과학적 검증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적당량의 음주가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거의 유일하게 검증된 사실이다. 하지만 와인도 혼자 1병(1ℓ, 알코올 도수 14도, 알코올 양 112g 기준)을 매일 마시면 간에 타격이 온다. 많은 양을 매일 마시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간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술의 양은 얼마인가.
“사람마다 달라 ‘절대’라는 말은 붙일 수 없다. 대부분 남성 기준으로 일주일에 소주 21잔(3병)까지는 간질환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알코올성 간질환을 일으키는 알코올의 최소량은 1일 40~80g씩을 적어도 1년간 섭취한 양이라 볼 수 있는데, 여성이나 만성 C형 간염 환자는 이보다 적은 양으로도 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여성이 술을 많이 마시면 유방암과 불임 등의 질환에 걸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양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맞나.
“느는 게 맞다. 일단 간의 분해효소가 증가하고 뇌세포와 신경계가 거기에 적응한다. 그리고 행동학적 요인도 작용한다. 문제는 술에 대해 처벌을 내리는 알데히드의 작동, 즉 얼굴 빨개짐, 두통, 구토 같은 증상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알데히드가 별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빨리 적응한다.”
와인을 즐긴다면서 폭탄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폭탄주의 알코올 양을 계산한 걸 보면.
“은사와 선배들이 워낙 좋아해 함께 마시긴 하지만 그다지 즐기진 않는다. 폭탄주가 알코올 양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나쁜 술이 아닌데, 지나치게 욕을 먹는 것 같아 제대로 계산해봤다.”
간 박사의 권주시(勸酒詩)
양주 폭탄주엔 알코올이 얼마나 들었나.
김윤준 교수는 와인 마니아였다. 술을 절도 있게, 멋있게 마실 줄 아는 사람이다.
서울대 부속병원의 금주회와 목탄회에선 폭탄주를 얼마나 마시나.
“대략 7~12잔. 금요일은 다 함께 마시기 때문에 7잔 정도, 목탄회는 김정룡 선생님 이하 잘 드시는 분들이 주로 마시기 때문에 12잔 또는 그 이상도 간다. 물론 알코올 계산은 안 하고 마신다. 7부주를 주로 먹지만 ‘온폭’을 하기도 한다. 다들 기분 좋을 때까지 마시는데 김정룡 선생님은 지금도 12잔 정도는 거뜬히 드신다.”
비가 오면 술이 생각나는 이유가 있나.
“그건 정신과적 문제다. 내과의가 답할 질문이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양갈비 스테이크 코스 요리가 끝나고 와인(750ml, 14도) 한 병이 비었다. 와인 한 병에 든 알코올은 84g. 각자 소주 2/3병만큼의 알코올을 흡수했다. “2차로 폭탄주 한 잔 더 하자”고 했더니 “다음에…”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한번 읽어보라”며 시 2수를 권했다. 중국 시인 우무릉(于武陵·810~?)의 ‘권주(勸酒)’와 일본의 선승 모리야 센얀(78)의 ‘술통’이라는 시다.
“이 금빛으로 빛나는 잔에 술 한 잔 권하노니/ 잔이 넘친다고 그대, 부디 사양하지 말게나/ 꽃이 피면 비바람이 많고/ 우리 인생에는 이별도 많으니.”(‘권주’)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줘/ 운이 좋으면/ 밑동이 샐지도 몰라.”(‘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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