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 기자가 종로구 관철동의 한 주점에서 일일 도우미로 고객 홍보 행사를 벌이고 있다.
‘흔들고♬~~ 쪼개고~~ 넘기고~~ 라랄랄라♪♬~~ 흔들고♬~~ 쪼개고~~ 넘기고~~.’
“에잇, 쪼개긴 뭘 쪼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휴대전화를 쥐었다. 휴대전화 벨소리는 이효리가 부른 소주 CF송. 다른 벨소리였다면 거들떠도 안 봤겠지만 자신의 회사 CF송이라 본능적으로 귀에 휴대전화를 갖다 댔다.
“여, 여보세요….”
“어, 승균아. 잤냐? ○○갈비집 △△형인데 술 한잔 하자, 나와라.”
“아… 네. 형… 수, 술이요?”
“빨리 나와라.”
“(한숨을 내쉬며) 아, 알… 겠습니다.”
“승균아, 손님들이 소주 두 병 마시면 보너스로 너희 회사 소주 한 병 서비스할게.”
그제야 박씨의 눈에서 불꽃이 인다.
“앗, 정말요? 바로 튀어가겠습니다.”
소주 ‘처음처럼’을 생산하는 ㈜롯데주류BG의 영업사원인 박씨에게 일요일에 술 마시자고 전화한 사람은 그가 관리하는 음식점의 매니저. 박씨 회사의 소주를 팔아주는 귀한 고객이다. 몸 상태로 봐선 백번 거절해야 마땅하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정신도 몽롱했지만 조건반사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이렇게 박씨의 한 주는 불운하게도 다른 직장인보다 하루 빠른 일요일에 시작됐다.
소주회사 영업사원의 마케팅 현장을 체험 취재하기로 한 기자는 일요일부터 시작되는 박씨의 ‘무용담’을 듣고 깜짝 놀라 계획을 수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혹독했던 군생활이 떠오르면서 ‘군대도 다녀왔는데 그깟 소주 영업쯤이야…’라는 생각에 박씨와 하루 동안 운명의 동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 이 몹쓸 자신감.
하루 50여 업소 순례 ‘눈도장 찍기’
5월14일 목요일 오전, 서울 중구 장충동의 롯데주류 서울영업본부 특판북지점 사무실. 각자의 구역에서 판촉활동을 벌이려는 영업사원들이 판촉물과 판매율 자료 등을 챙기느라 부산하다. ‘1일 객원 영업사원’에 임명된 기자는 뭐가 뭔지 몰라 어안이 벙벙.
특판북지점은 강북지역 영업을 총괄하는 곳이다. 이 지점의 영업사원들은 신촌, 홍익대입구, 종로, 명동, 용산, 마포, 대학로, 건국대입구 등 유흥가가 밀집된 주요 지역을 한 곳씩 맡아 자사 주류 점유율과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매일 힘겨운 판촉활동에 나선다. 60여 명의 영업사원이 판촉활동을 벌이는 곳은 대부분 ‘2차처’. 2차처는 영업사원끼리 쓰는 은어로 각종 주점, 고깃집, 횟집, 식당 등을 말한다. 이들은 도매상을 1차처, 소매상을 2차처라고 부른다. 영업사원들은 직접 2차처에 나가 사장, 점원, 아르바이트생을 대상으로 자사 주류를 많이 들여놓고 팔아달라며 로비 아닌 로비를 벌인다. 물론 손님들에게도 직접 다가간다. 업소들은 현행법상 주류 도매상을 통해서만 술을 구입할 수 있다. 따라서 영업사원들에게는 2차처가 1차처를 통해 자사 술을 더 많이 사들이도록 하고, 또 손님에게 자사 술을 타사 술보다 많이 권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특판1과 소속인 박씨의 관할구역은 종각역 인근 관철동, 관수동과 다동 일대. 대기업, 영어학원, 은행 등이 밀집해 주변 상권도 넓게 형성돼 있다. 유동인구의 비율이 젊은 층과 중장년층으로 반반씩 나뉘기에 이를 아우르는 여러 형태의 음식점과 주점이 길게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진로와 롯데주류의 소주 판촉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 초짜 영업사원으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기자는 당차게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오전 11시. 포스터와 판촉상품을 차에 가득 싣고 박씨와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박씨는 도착하자마자 관리 업소마다 찾아다니며 얼굴 도장을 찍었다. 그 이전 시간에는 업소들이 점심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12~1시에는 점심 손님을 받느라 바쁘며, 오후 3~5시에는 식당이나 주점 종업원들이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재빠르게 판촉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박씨가 관리하는 업소는 200여 개. 그중 50여 개 업소는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찾는 집중 관리처다.
“200여 곳 가운데 저희 제품을 아예 받지 않는 업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가 인사만 해요. 반면 업계 1위인 타사 소주와 우리 회사 ‘처음처럼’을 비슷하게 받고, 손님들에게 저희 제품을 먼저 권유하는 업소는 주요 관리 대상이죠. 이런 곳에는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가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종업원들, 특히 저희가 ‘이모’라 부르면서 살갑게 대하는 서빙 아주머니들과 친해져요. 이모들이 출출해질 시간에 간식을 챙겨 드리거나 일이 끝난 늦은 시간에 집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하죠. 술자리도 자주 갖고요. 이렇게 쌓은 친분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재산이 돼요.”
영업사원 박승균 씨(왼쪽)의 차는 언제나 판촉상품과 포스터로 가득 차 있다.
“저기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 15개만 사오세요.”
박씨가 기자에게 신용카드를 건넨다.
“네?”
박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 비닐봉투 가득 바나나우유를 담아온 기자를 관수동의 한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단체예약이 많아 테이블당 소주 소비량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박씨가 조용히 귀띔했다.
“손님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요. 심지어 한 테이블에 종종 소주 두 짝(60병)씩도 나가는 곳이에요.”
바나나우유를 들고 업소 안으로 들어가니 여종업원들이 ‘고운 님’ 반기듯 한다.
“안 그래도 우유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저기 좀 봐, 저쪽 예약 테이블에 □□소주는 한 병도 안 권했어.(웃음)”
정말 테이블엔 ‘처음처럼’만 잔뜩 올려져 있었다. 바나나우유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 것. 일단 작전 성공이다. 박씨는 “자주 찾아가 눈을 맞추고 이렇게 간식까지 챙겨주면 나중엔 미안해서라도 잘해준다”며 웃었다. 다음 이동지는 관철동. 아니나 다를까. 박씨는 또 다른 미션을 준다. 그러면서 1만원짜리 전화카드를 건넨다.
“이게 뭐죠?”
“지금 우리가 갈 식당은 삼겹살집인데 중국에서 온 교포 누님들이 일을 해요. 전화카드를 주면 아주 좋아들 할 거예요.”
박씨의 말 대로였다. 저녁 영업을 위해 식당 내부를 정리하던 중국 교포 종업원은 전화카드를 받더니 연신 “고맙다”며 냉수를 권했다.
‘이때다’ 싶어 고개를 조아렸다.
“손님들에게 저희 소주 좀 많이 권해주세요.”
기다리던 대답이 돌아왔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뿌듯한 마음으로 식당을 나오는데, 박씨가 전화카드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어떤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의 말씨를 들으니 중국 교포인 것 같아서 전화카드를 건넸는데, 알고 보니 경상도 분이었어요. ‘니 뭐꼬’라며 눈을 부릅뜨는데…. 그날 한 대 쥐어박힐 뻔했죠.(웃음)”
때 이른 한낮 더위에 힘겨워하던 기자는 박씨의 ‘실전 개그’에 잠시 더위를 잊었다.
오후 2시30분. 관철동 ‘○○닭한마리’ 식당. 박씨는 들어서자마자 줄자를 꺼내더니,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종업원들에게 내놓는 입구 주변을 부지런히 측정했다. 입구 주변으로 파이프가 지나가 보기에 좋지 않다는 업소 주인의 말을 듣고 박씨가 광고물을 제작해 그곳을 가려주겠다고 약속했던 것. 영업사원은 자기가 관리하는 업소 시설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업소 주인이나 종업원들도 영업사원과 어느 정도 친해지면 컵이나 앞치마 같은 물품, 또는 메뉴판이나 광고판 제작까지 종종 부탁한다. 박씨는 “신입사원 때는 식당에서 서빙도 했다”고 전했다.
<B>1</B> 찢어진 ‘처음처럼’ 광고 포스터. 박승균 씨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상황이다.<BR><B>2</B> 영업 관계자들과 확실하게 친분 맺기, 영업의 성공은 바로 여기에 달렸다.
요즘엔 컵이나 앞치마 같은 물품은 아예 회사 차원에서 자사 광고 이미지를 붙여 판촉용으로 제작, 업소가 필요할 때마다 공급한다. 메뉴판도 업소 이미지에 맞게 주인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제작해준다. 업소 바깥에 설치하는 광고판도 10만원대를 넘어서지만 회사 부담으로 처리해 제공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오후 3시. 지금까지는 업소 관계자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업소들이 저녁 영업을 준비하는 이때부터 라이벌 업체와 본격적인 판촉전쟁에 나선다.
관철동 ○○김치찜 전문점. 박씨는 업소 안에 붙은 타 업체의 소주 광고 위에 ‘처음처럼’ 포스터를 붙였다. 정작 손님들은 실감하지 못하지만 영업사원들에게 포스터 붙이기는 절대 밀려서는 안 될 자존심 대결이다. 한쪽에서 포스터를 붙이면 30분~1시간 후 예외 없이 다른 업체의 포스터로 바뀌어 있다.
“아이… 이모, 저게 뭐예요….”
“뭘? 나도 몰라 그건…. 언제 그랬지?”
포스터를 다 붙인 박씨는 업소 안쪽을 쭉 둘러보더니 맥 빠진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로 걸음을 옮겼다. 타사의 소주가 냉장고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냉장고의 위쪽 두 번째 칸은 영업사원들 사이에서 ‘골든 존’으로 불린다. 손님들이 술을 주문하면 종업원들은 대부분 눈높이와 거의 일치하는 두 번째 칸의 소주를 꺼내주게 된다. 이 행위 자체가 판매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업사원들은 굉장히 민감해한다. 바로 달려가 자사의 소주로 두 번째 칸을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 타사의 소주는 라벨이 보이지 않도록 돌려놓기도 한다.
오후 5시경, 종로3가 서울극장 옆 보쌈 골목. 이 골목 중심에 자리한 ○○○보쌈집은 여러 매체를 통해 맛나기로 소문난 곳이다. 오후 7시만 돼도 1, 2층이 만석이다. 손님이 하루에 네 번이나 회전된다. 보통 한 달에 200짝(6000병), 겨울에는 320짝(9600병)의 소주가 팔린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규모. 당연히 소주 업체들이 판촉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요지다. 그러다 보니 라이벌 소주 회사 직원들과 수시로 마주친다. 경쟁업체에선 아주머니 아르바이트 요원까지 동원해 업소 ‘이모’들의 수고를 덜어주기도 한다. 박씨에겐 매우 거슬리는 대목. 결국 보쌈집 앞에서 애처로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거, 불공정행위예요. 새우젓 덜어주지 마세요.”
저녁이 되어서도 영업 사원들의 발걸음은 멈추질 않는다.
“그러면 다시는 포스터 도배하지 마세요.”
“안 해, 안 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6시 이후엔 종각역 인근 거리에서 담당 영업사원들끼리 정면충돌을 한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고생한다”고 격려하지만 속내는 편치 않다. 혹여 방금 자신이 붙인 포스터를 뜯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몇 년 전엔 멱살잡이도 했어요. 경찰서까지 간 적도 있고요.”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저녁밥을 먹을 때조차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혼자 늦은 저녁밥을 몇 술 뜰 때도 테이블 위에 ‘처음처럼’ 서너 병은 올려놔야 마음이 놓인다. 영업맨에겐 밥 먹는 것도 판촉행위다.
2시간에 소주 20잔, 기자 녹다운
직접 손님들과 접촉해 자사 술을 권하고 장점을 알리는 것도 영업사원들의 업무다. 박씨는 오후 8~9시 이후 손님들과 함께하는 판촉활동을 전개한다. 원하는 손님에겐 명함을 청해 계열사인 롯데제과의 과자를 보내준다. 남성 손님과는 술잔을 주고받기도 한다. 기자도 소주잔 받기를 수차례, 어느새 머리가 핑 돈다. 2시간 남짓 기자가 얻어 마신 소주는 20여 잔. 3병이 넘는다. 매주 닷새,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소주 3병을 마신다고 하니 그 좋아하는 술 생각이 싹 가셨다.
“저희 영업사원들 절반이 신체검사에서 정상 간수치 이상이 나와 재검을 받아요.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죠?”
그래도 쉴 틈은 없었다. 오후 8시30분 ○○로바다야끼. 회식 중이던 은행 여사원들이 박씨가 다가오자 환호성을 질렀다.
“여자친구 없어요?”
예쁘장한 외모의 박씨에겐 이렇듯 여성 손님들의 관심이나 소개팅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고. 박씨가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라며 정중히 사양하자 “처음처럼 좋아요”라는 여성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기쁜 마음에 자기 돈으로 소주 5명을 사서 손님들에게 돌렸다.
박씨는 오후 10시30분이 돼서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판촉하랴, 술 마시랴 녹다운된 기자를 먼저 택시에 태운 뒤 길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처음처럼’ 포스터를 다시 제자리에 붙였다. 기자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쓰러지기 직전 냉장고를 열고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찬 기운이 느껴졌지만 분명 땀도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