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상지이면서도 기독교와 가장 먼 나라, 그러면서 전 세계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 바로 이스라엘이다. 2009년 이스라엘 인구통계에 따르면 이 나라의 기독교인 수는 2% 남짓. 일부 무슬림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기독교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5월11일부터 4박5일간 방문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교황이 이스라엘을 방문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곳이 바로 예수의 탄생, 사역, 부활, 승천이 이뤄진 성지(聖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방문한 ‘세 번째’ 교황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이 다른 나라 방문보다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뿌리 깊은 갈등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생각과 달리 지금껏 성지를 방문한 교황은 베네딕토 16세까지 겨우 세 명이다. 첫 번째였던 바오로 6세는 1964년 이스라엘에 12시간만을 체류했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한 번도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 국가 개념이 내포됐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이 지역을 지칭할 때는 ‘성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례적으로 행하게 되는 국가원수 관저에서의 정상회담도 하지 않았다. 바오로 6세가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을 만난 장소는 관저가 아닌 므깃도라고 하는 성지였다. 이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믿어왔다. 바오로 6세가 이 같은 행태를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당시에는 교황청과 이스라엘의 외교관계도 수립돼 있지 않았다. 유대인은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행태 때문에 기독교를 포용하지 못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60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할 때 이를 방관, 나아가서 동조했던 교황청의 행적은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의 마음을 더욱 싸늘하게 했다.
이러한 유대인과 기독교의 역사적 갈등관계를 해소하고자 힘을 쏟은 교황이 바로 선대인 요한 바오로 2세다. 역대 교황 중 두 번째로 2000년 이스라엘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야드 바쉠’이라는 홀로코스트기념관에서 과거 교황청의 과오를 간접적으로나마 시인했다. 또한 유대교 최고의 성지라 할 수 있는 통곡의 벽을 방문해 기도하기도 했다. 이는 가톨릭이 유대교를 하나의 정통성 있는 종교로 인정하는 사건으로 간주됐다. 그전까지 교황청은 유대교가 기독교에 의해 대체되고 폐기된 종교라는 견해를 견지했다. 교황청과 이스라엘의 외교관계 수립도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때인 1993년에야 이뤄졌다.
이처럼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관계라는 역사적 배경과 지구상 최대의 정치·민족·종교적 분쟁 지역이라는 점이 이번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증폭시켰다고 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의 방문 일정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이 골고루 포함됐고,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도 들어 있다. 이번 방문으로 불필요한 정치적, 종교적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바티칸이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때보다 더 치밀하게 사전에 계산했음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이스라엘 도착 직후 공항에서 행한 인사말에서 반유대주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교황청은 이와 맞서 싸울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고는 다른 기독교 성지 방문에 앞서 그날 오후 홀로코스트기념관을 찾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이는 선대 교황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반기독교 감정을 달래려는 행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날에는 통곡의 벽을 방문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통곡의 벽만 방문한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성지라 할 수 있는 바위사원도 방문했다는 점이다. 이 사원이 자리한 성전산 바로 밑이 통곡의 벽이다. 이는 교황이 유대인뿐 아니라 무슬림의 감정도 배려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날에는 예수의 탄생지이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속하는 베들레헴을 방문해 군중미사를 집전했다. 이 지역에 자리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찾아 팔레스타인의 민심을 다독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마무드 압바스를 접견했다. 자치정부 청사가 자리한 라말라에서 회동을 갖지 않고 베들레헴에서 가진 이유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방문한 교황을 자치정부 수반이 인사차 들른 형식을 취함으로써 교황의 방문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원칙이 이스라엘에도 적용됐다. 넷째 날에 교황은 예수가 어린 시절 성장한 나사렛에서 군중미사를 집전했는데, 역시 예루살렘에 자리한 총리 관저가 아닌 바로 나사렛에서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을 접견한 것이다. 교황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최대 성지,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를 차례로 만난 뒤에야 기독교 최대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 부활한 성묘교회를 방문하고 이스라엘에서의 공식 일정을 마쳤다. 정치적으로 고려한 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이용은 경계
교황과 교황청은 이번 이스라엘 방문은 정치적 방문이 아니라 순수한 성지순례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교황이라는 위치가 지닌 상징적 의미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또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지도자 모두 교황의 방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었다. 이스라엘 언론은 독일 출신인 교황이 어린 시절 ‘히틀러 소년단’의 일원이었던 사실과 나치군대에 복무한 사실, 그리고 홀로코스트 당시 600만 유대인이 희생된 사실을 부정한 주교를 올해 초 복권시킨 사실 등을 부각하며 교황을 압박했다. 이는 과거 교황청이 행한 과오에 대한 교황의 공식적인 시인과 사과를 이끌어내려는 일종의 언론 플레이였다. 그러나 교황은 홀로코스트기념관을 방문하되 홀로코스트 당시 교황청 수장이던 비오 12세의 사진이 걸린 역사기념관은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이를 피해갔다.
팔레스타인 측도 이스라엘에 의해 봉쇄된 가자지구에 대한 교황의 방문을 추진했다. 이스라엘에게 핍박받는 팔레스타인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려는 정치적 의도였다. 하지만 교황청은 이를 거절했다. 대신 가자지구 가톨릭 성직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행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측에 특별통행권을 요청했다. 또한 유대교와 이슬람의 지도자와 함께한 회합에서 이슬람 지도자가 “이스라엘은 학살자”라고 비난하자 그곳을 떠남으로써 정치적 논란을 피해갔다. 베네딕토 16세는 2006년에 행한 강연에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난하는 발언을 해 당시 이스라엘 내 가톨릭교회에 대한 무슬림의 방화사건이 일어나는 등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이번 교황의 방문이 이런저런 정치·종교적 논란은 피해갔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교황의 방문이 계기가 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가 정착되고,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간의 종교 갈등이 해소되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냉철히 판단하자면 하나의 인간이며, 하나의 종교 지도자에 그치는 교황이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사랑과 관용, 희생이라는 기독교 가르침이 교황의 방문을 계기로 분쟁과 갈등의 땅에 되새겨지는 것이야말로 모든 이의 바람일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5월11일부터 4박5일간 방문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교황이 이스라엘을 방문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곳이 바로 예수의 탄생, 사역, 부활, 승천이 이뤄진 성지(聖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방문한 ‘세 번째’ 교황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이 다른 나라 방문보다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뿌리 깊은 갈등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생각과 달리 지금껏 성지를 방문한 교황은 베네딕토 16세까지 겨우 세 명이다. 첫 번째였던 바오로 6세는 1964년 이스라엘에 12시간만을 체류했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한 번도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 국가 개념이 내포됐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이 지역을 지칭할 때는 ‘성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례적으로 행하게 되는 국가원수 관저에서의 정상회담도 하지 않았다. 바오로 6세가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을 만난 장소는 관저가 아닌 므깃도라고 하는 성지였다. 이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믿어왔다. 바오로 6세가 이 같은 행태를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당시에는 교황청과 이스라엘의 외교관계도 수립돼 있지 않았다. 유대인은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행태 때문에 기독교를 포용하지 못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60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할 때 이를 방관, 나아가서 동조했던 교황청의 행적은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의 마음을 더욱 싸늘하게 했다.
이러한 유대인과 기독교의 역사적 갈등관계를 해소하고자 힘을 쏟은 교황이 바로 선대인 요한 바오로 2세다. 역대 교황 중 두 번째로 2000년 이스라엘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야드 바쉠’이라는 홀로코스트기념관에서 과거 교황청의 과오를 간접적으로나마 시인했다. 또한 유대교 최고의 성지라 할 수 있는 통곡의 벽을 방문해 기도하기도 했다. 이는 가톨릭이 유대교를 하나의 정통성 있는 종교로 인정하는 사건으로 간주됐다. 그전까지 교황청은 유대교가 기독교에 의해 대체되고 폐기된 종교라는 견해를 견지했다. 교황청과 이스라엘의 외교관계 수립도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때인 1993년에야 이뤄졌다.
이처럼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관계라는 역사적 배경과 지구상 최대의 정치·민족·종교적 분쟁 지역이라는 점이 이번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증폭시켰다고 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의 방문 일정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이 골고루 포함됐고,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도 들어 있다. 이번 방문으로 불필요한 정치적, 종교적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바티칸이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때보다 더 치밀하게 사전에 계산했음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이스라엘 도착 직후 공항에서 행한 인사말에서 반유대주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교황청은 이와 맞서 싸울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고는 다른 기독교 성지 방문에 앞서 그날 오후 홀로코스트기념관을 찾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이는 선대 교황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반기독교 감정을 달래려는 행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날에는 통곡의 벽을 방문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통곡의 벽만 방문한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성지라 할 수 있는 바위사원도 방문했다는 점이다. 이 사원이 자리한 성전산 바로 밑이 통곡의 벽이다. 이는 교황이 유대인뿐 아니라 무슬림의 감정도 배려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날에는 예수의 탄생지이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속하는 베들레헴을 방문해 군중미사를 집전했다. 이 지역에 자리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찾아 팔레스타인의 민심을 다독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마무드 압바스를 접견했다. 자치정부 청사가 자리한 라말라에서 회동을 갖지 않고 베들레헴에서 가진 이유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방문한 교황을 자치정부 수반이 인사차 들른 형식을 취함으로써 교황의 방문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원칙이 이스라엘에도 적용됐다. 넷째 날에 교황은 예수가 어린 시절 성장한 나사렛에서 군중미사를 집전했는데, 역시 예루살렘에 자리한 총리 관저가 아닌 바로 나사렛에서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을 접견한 것이다. 교황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최대 성지,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를 차례로 만난 뒤에야 기독교 최대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 부활한 성묘교회를 방문하고 이스라엘에서의 공식 일정을 마쳤다. 정치적으로 고려한 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이용은 경계
교황과 교황청은 이번 이스라엘 방문은 정치적 방문이 아니라 순수한 성지순례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교황이라는 위치가 지닌 상징적 의미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또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지도자 모두 교황의 방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었다. 이스라엘 언론은 독일 출신인 교황이 어린 시절 ‘히틀러 소년단’의 일원이었던 사실과 나치군대에 복무한 사실, 그리고 홀로코스트 당시 600만 유대인이 희생된 사실을 부정한 주교를 올해 초 복권시킨 사실 등을 부각하며 교황을 압박했다. 이는 과거 교황청이 행한 과오에 대한 교황의 공식적인 시인과 사과를 이끌어내려는 일종의 언론 플레이였다. 그러나 교황은 홀로코스트기념관을 방문하되 홀로코스트 당시 교황청 수장이던 비오 12세의 사진이 걸린 역사기념관은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이를 피해갔다.
팔레스타인 측도 이스라엘에 의해 봉쇄된 가자지구에 대한 교황의 방문을 추진했다. 이스라엘에게 핍박받는 팔레스타인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려는 정치적 의도였다. 하지만 교황청은 이를 거절했다. 대신 가자지구 가톨릭 성직자들이 베들레헴에서 행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측에 특별통행권을 요청했다. 또한 유대교와 이슬람의 지도자와 함께한 회합에서 이슬람 지도자가 “이스라엘은 학살자”라고 비난하자 그곳을 떠남으로써 정치적 논란을 피해갔다. 베네딕토 16세는 2006년에 행한 강연에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난하는 발언을 해 당시 이스라엘 내 가톨릭교회에 대한 무슬림의 방화사건이 일어나는 등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이번 교황의 방문이 이런저런 정치·종교적 논란은 피해갔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교황의 방문이 계기가 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가 정착되고,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간의 종교 갈등이 해소되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냉철히 판단하자면 하나의 인간이며, 하나의 종교 지도자에 그치는 교황이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사랑과 관용, 희생이라는 기독교 가르침이 교황의 방문을 계기로 분쟁과 갈등의 땅에 되새겨지는 것이야말로 모든 이의 바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