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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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가 왜 범재로 바뀌는가

영재 20%는 ‘미성취’로 사장 … ‘완벽주의 집착’이 가장 큰 스트레스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9-05-29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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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재가 왜 범재로 바뀌는가
    천재소년 송유근 군이 여덟 살의 나이로 인하대에 입학했을 때 주위의 반응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아직 어린아이인 송군이 대학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기 때문이다. 인하대는 물리 분야 교수와 어머니 등 7명으로 구성된 ‘송유근 위원회’를 만들어 송군의 대학생활 적응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밝혔지만 주위의 우려는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입학 후에도 언론과 대중은 송군의 일거수일투족에 과도하게 관심을 보였다.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근심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구설에 오르는 일도 많아졌다. 송군의 학부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 들리고, 심지어 영재라곤 하지만 미적분학도 제대로 못한다는 악의적인 소문도 돌았다. 부모가 극성이어서 아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무성한 소문은 “틀에 박힌 대학 강의가 힘들다”며 송군이 2년 만에 학교를 자퇴하면서 확대 재생산됐다. 일각에서는 그동안의 우려가 현실화했다며 “섣불리 영재를 키우려다 오히려 영재성을 사장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을 가했다.

    영재 성장 본격적 연구 미흡

    다행히 송군은 학점은행제에서 학사인정 학점을 취득, 올해 초 한국천문연구원에 입학해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천문연구원 역시 5월11일 한국국방연구원 최재동 대령에게 수학교육을 위탁하는 등 송군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한국천문연구원 박석재 원장은 “유능한 교수 서너 명이 돌아가면서 지도하는 등 송군의 영재성을 키우겠다”고 밝히며 든든한 지원을 약속했다. 불거졌던 ‘영재성 사장’ 논란도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송군처럼 영재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다. 영재의 등장에 주위는 환호하고,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성장할지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번뜩이는 영재성을 발휘했던 아이가 시간이 지난 뒤 영재성을 잃고 평범해지는 상황도 종종 보게 된다.



    영재는 타고나느냐, 아니면 만들어지느냐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영재는 99%의 노력과 1%의 타고난 재능’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할 만큼 영재성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영재는 난초와도 같아서 제대로 관리받지 못하면 영재성을 발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영재교육에서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상응하는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영재를 ‘미성취 영재’로 정의한다. 영재를 둔 부모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자신의 자녀가 미성취 영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어렸을 때는 참 똑똑했는데, 지금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해요.”

    민희(가명) 엄마는 민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낀다. 민희의 영재성을 일찍 알아보지 못해서 안타깝고, 그런 영재성 때문에 힘들어하던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점이 미안하다.

    영재가 왜 범재로 바뀌는가

    송유근 군(오른쪽)은 인하대를 자퇴하고 올해 초 한국천문연구원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다. 2007년 과학기술총연합회 초청특강에서 만난 이명박 대통령과 송군.

    민희는 흔히 말하는 신동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 푸는 수학문제를 척척 풀었다. 학교수업은 시시할 수밖에 없었다. 엉뚱한 질문으로 친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수업진도를 방해하는 질문으로 선생님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친구들은 민희가 말할 때마다 “또 잘난 척한다”며 수군거렸고, 결국 ‘왕따’를 시켰다. 민희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주위에서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왕따가 된 이후 민희는 학교 가기를 싫어했다. 핀잔만 주는 선생님과는 말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민희가 귀찮은 것은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시간 내내 딴짓을 하는 민희는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뒤늦게 민희의 상황을 파악한 민희 엄마는 영재교육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너무 늦은 탓일까. 영재교육원에서 민희는 번뜩이던 생각도, 뛰어난 수학실력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버렸던 것이다. 민희는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평범한 여중생이 됐다. 수학실력은 여전히 뛰어났지만 주위를 놀라게 했던 어린 시절의 영재성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최고’ 완벽주의 성향

    영재교육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는 영재라고 불린 학생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뤄진 연구보고에 따르면, 고등학교를 중퇴하는 학생 가운데 10~20%가 검증받은 영재 범위에 속하며, 영재의 20% 정도가 미성취 영재로 추정된다. 확인된 영재 가운데 15~40%가 학교에서 실패할 위험이 있거나 심각한 미성취 상태인 것으로 조사된 연구결과도 있다.

    미성취 영재가 생기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개인의 성격, 가족, 학교, 사회 등 다양한 변수가 미성취 영재를 만든다. 이런 변수들은 영재의 정신건강을 해치고, 지적 성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신건강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는 영재성이 발휘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정서관계 및 대인관계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나아가 사회적 고립, 우울증, 자살 같은 병리현상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영재라고 불리긴 했지만 처음부터 영재가 아닌 경우도 있다.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으로 영재교육기관에 들어갔지만 결국 따라가지 못하고 스스로 그만둔 사례가 대표적이다. 영재성을 지녔지만 그것을 꽃피우지 못한 미성취 영재와는 다른 개념이다.

    영재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고비는 사춘기를 어떻게 넘기느냐다. 영재는 일반인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과흥분성(overexcitability)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영재에게는 사춘기 시절의 작은 자극도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학 부설 영재교육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한 어머니는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전보다 짜증을 많이 내고 공부하는 것을 싫어해 애가 탔다”며 “상담을 통해 ‘너 키가 너무 큰 거 아냐’라는 친구들의 사소한 한마디 때문에 엄청나게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영재가 왜 범재로 바뀌는가

    과학영재 우민국 군(왼쪽)과 서진욱 교수.

    영재는 과도한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상당한 스트레스가 영재를 옥죈다. 완벽주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대표적인 스트레스의 요인이다. 영재는 팔방미인이 아니다. 다방면에 영재성을 발휘하는 영재도 있지만 한 분야에만 특출한 능력을 보이는 영재도 존재한다. 문제는 비대칭적 능력을 보였을 때 주위의 시선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송군을 지도했던 인하대 수학과 박제남 교수는 “영재들은 어려서부터 주변의 큰 기대를 부담감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나는 뭐든지 잘해야 해’ ‘나는 최고’라는 식의 완벽주의 성향에 빠지기 쉽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영재아의 완벽주의 성향이 자기만족감보다 과도한 자기비판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특히 부모, 교사 등 주위의 칭찬을 의식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박 교수는 “영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때 길러지는 것이다. 공부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는 순간 영재성은 더 발휘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극성인 부모도 영재성을 상실하는 데 한몫한다. 물론 영재는 부모의 눈물과 땀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을 만큼 부모의 역할은 중요하다. 영재성을 빨리 알아채지 못해 일반 환경에 방치할 경우 영재성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사장되기 때문에 부모의 적극적 지원은 필수다.

    하지만 영재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화를 부른다. 한국 어머니 특유의 치맛바람은 영재교육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일부 학부모는 영재라는 사실 자체가 남들과 다르다는 일종의 훈장으로 여기고, 자녀를 압박한다.

    한국교육개발원(KEDI) 김영아 박사는 “열 살배기 아이에게 20대의 지능이 있다고 하면 부모는 아이에게 ‘20대 지능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는 오류에 빠진다”고 꼬집었다. 영재는 지적 발달과 신체적·사회적·정서적 발달이 불일치하는 비동시성(asynchrony)이 있는데 이를 부모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다.

    그 밖에 원만하지 못한 교우관계로 인한 소외감, 영재인 자녀와 그렇지 못한 자녀 간의 갈등 등도 미성취 영재가 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능과 정서 발달의 ‘비동시성’이 문제

    영재교육기관은 말 그대로 영재성을 키워 영재성이 사장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겠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당수 영재들이 영재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다. 25개 대학에 설치된 부설 영재교육원, 각 교육청 산하 영재교육원, 한국과학영재학교 등 다수의 영재교육기관이 있지만 제도권 밖의 영재들을 다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영재가 왜 범재로 바뀌는가

    정부는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2011학년도 입시부터 과학고의 올림피아드 등 경시대회, 영재교육원 특별전형을 폐지하기로 했다.

    오히려 영재가 아닌 학생들이 과학고, 더 나아가 명문고로 진학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재교육기관을 이용했다. 그런 탓에 영재교육을 위한 사교육 붐이 불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설 영재교육기관들이 자기 기관 출신이 영재교육기관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광고할 정도였다.

    영재의 정신건강과 균형 있는 발달을 위해서는 정서적 교육이 필수다. 한국영재교육학회 송인섭 회장(숙명여대 교육학부 교수)은 “영재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면 못지않게 정의적, 인성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식으로 안이하게 대응하면 영재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비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 영재상담을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영재들을 위한 영재교육기관의 정서적 프로그램조차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연세대 과학영재교육원 이준복 원장(연세대 수학과 교수)은 “영재들 역시 다방면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감하지만, 1년 내내 가르쳐도 대학의 2개 과목 이수시간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영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늘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미성취 영재에 대한 연구가 우선적으로 수행돼야 한다고 꼽을 정도로 다른 영역보다 관심이 높다. 어렵게 발견한 영재성이 그대로 사장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낭비다. 따라서 영재 판별 못지않게 이들이 영재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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