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모퉁이의 매화 몇 가지 추위를 이기고 홀로 피었네….”
당송 팔대가인 왕안석의 시구는 마치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리며 지은 듯하다. 엄동설한에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자태와 꺾일지언정 굴복하지 않는 절개가 그렇다. 세속에 초연한 고고함도 엿보인다. 그래서인지 5월20일 찾은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 충무공 고택(古宅) 주변의 매화나무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연간 60여 만명이 찾는다는 현충사. 본전, 유물관, 정려 등 많은 유적과 유물, 유허(遺墟·오랜 세월에 쓸쓸히 남아 있는 옛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고택은 가장 유명세를 탄다. 고택 터 등이 법원의 경매 매물로 나와 한동안 뉴스의 초점이었기 때문이다. 현충사관리소 관계자는 “신문에 난 고택이 어디냐고 묻는 관람객이 많다”고 했다. 매실은 여느 해 봄처럼 푸르렀지만 충무공 가문에게 길게는 수년 동안, 짧게는 올봄 내내 매서운 ‘겨울’이었다. 가문의 대가 끊겼고 종손들은 소송에 빠져들었다. 고택 터를 비롯한 유허가 경매 매물로 나오더니 급기야 마지막 종부(宗婦)가 사기혐의로 구속됐다. 충무공은 왜란(倭亂)이라는 외란을 막아냈지만 후손들은 가란(家亂)이라는 내란을 막지 못했다.
가문의 비운은 충무공 15대 종손인 이재국 씨가 2002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문중은 대를 잇기 위해 재당질인 이철용 씨를 양자로 들일 것을 재국 씨의 부인(종부) 최선순(54) 씨에게 권했다. 가족법 개정으로 호주 사망 후 양자를 세울 수 없게 되자 재국 씨의 사망신고까지 미뤘다.
최씨는 문중의 제안을 수용했지만 곧 양자 입적을 철회하는 파양 소송을 제기했다. 양자를 들이는 조건으로 철용 씨에게 종손 재산 포기각서를 요구했는데 문중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 법원은 최씨의 손을 들어줬다. 개정된 가족법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지만, 충무공 가문의 대가 끊겼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판결이었다.
종부와 문중 재산 분쟁으로 얼굴 붉혀
소송으로 깊어진 종부와 문중의 갈등은 재산분쟁으로 이어졌다. 문중은 재국 씨가 사망해 최씨의 소유가 된 현충사 및 주변 토지 수만㎡에 대해 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6건의 소송을 제기해 13건을 되찾았고, 최씨가 이미 팔아버린 3건은 2억원의 돈으로 갚아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 이재왕(65) 회장은 소송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최씨의 시부모는 정미소와 현충사 매점을 운영해 재산을 많이 남겼다. 종회도 형님(재국 씨) 내외를 위해 토지를 제공했다. 남편이 사망해 최씨는 3만여㎡의 토지와 서울과 천안의 빌딩 등을 받았지만 그중 상당수를 팔았다.”
최씨와 재국 씨의 만남은 한 편의 소설 같다. 재국 씨는 경기고를 졸업(52회)하고 연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요양을 위해 전북 김제의 한 사찰에 머물던 1980년, 자신보다 열여덟 살이나 어린 최씨를 만났다. 최씨는 이 사찰의 공양간에서 일하던 보살의 손녀.
종부의 삶은 어떠했을까. 최씨는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7년간 종갓집 며느리로 살면서 말 못할 마음고생을 했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자식도 없이 정신질환을 앓는 남편을 수발하며 외롭게 살아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중과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충무공 종갓집 며느리의 삶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추측도 나올 만하다. 하지만 문중 관계자들의 평가는 혹독했다.
“남편이 정신질환을 앓기는 했지만 시부모의 유산과 종회가 제공한 재산이 많아 생활은 풍족했다.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 남편 병간호하는 사람을 두고 살았다. 14대 종손까지는 연간 10번의 제사를 모셨지만 최씨는 충무공 할아버지 제사만 지냈다. 그마저 종회에서 주관해 그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재산만 탕진했다.”
최씨는 한때 현충사 인근에서 상점을 했고 웨딩홀과 옷 가게, 화장품 가게를 했다. 그러다 한덕우(61) 씨를 만나 부동산 개발사업에 손을 댔다. 매우 신뢰하는 사이로 알려진 그와의 동업은 결국 두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최근 두 사람을 사기혐의로 구속한 대전지검 천안지청에 따르면 최씨와 한씨는 2003년경부터, 개발이 예정된 천안시 청당동과 아산시 탕정면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건설사에 되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돈 놓고 돈 먹기’가 아니었다. 쉬울 것 같던 처음과 달리 토지 매입비가 뛰고 건설사 자금난으로 사업이 지연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검찰은 최씨 등이 2005년 7월 이모(52) 씨에게 “내 땅에 근저당을 설정하고 돈을 빌려주면 1년 후 배로 불려주겠다”고 속여 5억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2007년까지 2명에게서 모두 21억원을 받아 챙겼다는 것.
검찰조사 결과 범행 당시 최씨는 수십억원의 채무가 누적돼 있었다. 범죄는 범죄를 낳았다. 돈을 갚을 길이 없자 이씨가 다니는 직장(대학)에 악의적인 투서를 하는가 하면 이씨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허위 고소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충무공 고택 터 등이 경매로 나온 것도 이 과정에서 비롯됐다. 최씨에게 7억원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한 김모 씨는 최씨 소유의 현충사 경내외 9만8000여m²(7필지) 땅에 대해 4월 경매를 신청했다. 충무공이 소년 시절부터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산 고택과 무예를 연마하던 활터 등이 경매 매물로 나왔다는 사실에 국민은 경악했다. ‘난중일기’ 등 최씨 소유의 충무공 유물이 암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뒤를 이었다. 현충사관리소 등에 따르면 사업을 하는 전모 씨는 “2008년 6월경 최씨와 한씨가 충무공의 유물 130여 점을 180억원에 사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매물로 나왔다는 유물은 ‘난중일기’와 서간첩, 장검(보물 제326호), 옥로, 교지 등 현충사와 진주박물관 소장품들. 충무공 유허와 유물이 최씨 개인 소유로 돼 있는 것은 현충사 성역화사업을 벌이던 1960년대 말 14대 종손인 이응렬 씨가 종회 대표 자격으로 이들 유허와 유물 등을 국가에 대여하면서 소유권을 이전받았기 때문이다.
전씨는 “최씨가 유물 목록을 제시하며 매입을 제안해 유물의 사진까지 찍었고, 이들 유물의 처분 등 모든 권리를 한씨에게 넘겼다는 위임장도 봤다”고 말했다. 종회 이재왕 회장도 “위임장 사본을 갖고 있다”며 혀를 찼다.
채무 갚으려고 난중일기를 매물로?
이에 대해 최씨는 “전씨가 충무공기념사업회와 관련한 일을 도와준다고 해 유물의 사진을 찍어 보여줬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전씨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당시 최씨와 한씨는 부동산 개발사업이 난관에 부딪혀 채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최씨가 말하는 충무공기념사업회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충무공 고택 터 등은 5월4일 2차 경매에서 덕수 이씨 풍암공파가 문중을 대표해 11억5000만원에 낙찰받았다. 충무공파는 문중 땅 일부가 지방자치단체의 영어마을 부지로 편입돼 거액의 보상금을 받은 풍암공파에 도움을 요청했다. 2차 경매에는 문화재청도 참여했고, 대전의 계룡건설 이인구 회장도 낙찰받아 국가에 기부 채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충무공 문중은 “후손으로서 충무공을 욕되게 할 수 없다”며 직접 낙찰을 받았다. 문중은 소송을 통해 최씨 소유인 유물도 되찾아 현충사에 기증하기로 했다. 낙찰받은 지 10일 뒤 논란의 한 축이던 최씨와 한씨는 사기와 명예훼손, 무고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이번 사태는 충무공의 정신을 교훈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봐야 한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노승석 대우교수는 “난중일기에는 미리 준비한다는 뜻의 ‘비(備)’자가 유난히 많고 충무공의 승인(勝因)도 사전 대비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화재 당국은 현충사 성역화사업 때 현충사 사적지 전부를 국유화하지 못했고, 2006년에는 종손의 매입 건의가 있었으나 적극 나서지 않았다.
노 교수는 “충무공 유물을 돈거래의 대상으로 봤다는 사실이 물질에 초연했던 충무공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며 매화 같은 품격을 지닌 충무공의 한시를 소개했다.
“빈궁과 영달은 오직 저 하늘에 달렸으니(窮通只在彼蒼天)/ 모든 일은 모름지기 자연에 맡기리라(萬事聊須任自然)/ 부귀함은 때가 있으나 홀로 차지하기 어려운 법(富貴有時難獨擅)….”
당송 팔대가인 왕안석의 시구는 마치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리며 지은 듯하다. 엄동설한에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자태와 꺾일지언정 굴복하지 않는 절개가 그렇다. 세속에 초연한 고고함도 엿보인다. 그래서인지 5월20일 찾은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 충무공 고택(古宅) 주변의 매화나무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연간 60여 만명이 찾는다는 현충사. 본전, 유물관, 정려 등 많은 유적과 유물, 유허(遺墟·오랜 세월에 쓸쓸히 남아 있는 옛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고택은 가장 유명세를 탄다. 고택 터 등이 법원의 경매 매물로 나와 한동안 뉴스의 초점이었기 때문이다. 현충사관리소 관계자는 “신문에 난 고택이 어디냐고 묻는 관람객이 많다”고 했다. 매실은 여느 해 봄처럼 푸르렀지만 충무공 가문에게 길게는 수년 동안, 짧게는 올봄 내내 매서운 ‘겨울’이었다. 가문의 대가 끊겼고 종손들은 소송에 빠져들었다. 고택 터를 비롯한 유허가 경매 매물로 나오더니 급기야 마지막 종부(宗婦)가 사기혐의로 구속됐다. 충무공은 왜란(倭亂)이라는 외란을 막아냈지만 후손들은 가란(家亂)이라는 내란을 막지 못했다.
가문의 비운은 충무공 15대 종손인 이재국 씨가 2002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문중은 대를 잇기 위해 재당질인 이철용 씨를 양자로 들일 것을 재국 씨의 부인(종부) 최선순(54) 씨에게 권했다. 가족법 개정으로 호주 사망 후 양자를 세울 수 없게 되자 재국 씨의 사망신고까지 미뤘다.
최씨는 문중의 제안을 수용했지만 곧 양자 입적을 철회하는 파양 소송을 제기했다. 양자를 들이는 조건으로 철용 씨에게 종손 재산 포기각서를 요구했는데 문중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 법원은 최씨의 손을 들어줬다. 개정된 가족법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지만, 충무공 가문의 대가 끊겼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판결이었다.
종부와 문중 재산 분쟁으로 얼굴 붉혀
소송으로 깊어진 종부와 문중의 갈등은 재산분쟁으로 이어졌다. 문중은 재국 씨가 사망해 최씨의 소유가 된 현충사 및 주변 토지 수만㎡에 대해 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6건의 소송을 제기해 13건을 되찾았고, 최씨가 이미 팔아버린 3건은 2억원의 돈으로 갚아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 이재왕(65) 회장은 소송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최씨의 시부모는 정미소와 현충사 매점을 운영해 재산을 많이 남겼다. 종회도 형님(재국 씨) 내외를 위해 토지를 제공했다. 남편이 사망해 최씨는 3만여㎡의 토지와 서울과 천안의 빌딩 등을 받았지만 그중 상당수를 팔았다.”
최씨와 재국 씨의 만남은 한 편의 소설 같다. 재국 씨는 경기고를 졸업(52회)하고 연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요양을 위해 전북 김제의 한 사찰에 머물던 1980년, 자신보다 열여덟 살이나 어린 최씨를 만났다. 최씨는 이 사찰의 공양간에서 일하던 보살의 손녀.
종부의 삶은 어떠했을까. 최씨는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7년간 종갓집 며느리로 살면서 말 못할 마음고생을 했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자식도 없이 정신질환을 앓는 남편을 수발하며 외롭게 살아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중과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충무공 종갓집 며느리의 삶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추측도 나올 만하다. 하지만 문중 관계자들의 평가는 혹독했다.
“남편이 정신질환을 앓기는 했지만 시부모의 유산과 종회가 제공한 재산이 많아 생활은 풍족했다.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 남편 병간호하는 사람을 두고 살았다. 14대 종손까지는 연간 10번의 제사를 모셨지만 최씨는 충무공 할아버지 제사만 지냈다. 그마저 종회에서 주관해 그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재산만 탕진했다.”
최씨는 한때 현충사 인근에서 상점을 했고 웨딩홀과 옷 가게, 화장품 가게를 했다. 그러다 한덕우(61) 씨를 만나 부동산 개발사업에 손을 댔다. 매우 신뢰하는 사이로 알려진 그와의 동업은 결국 두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최근 두 사람을 사기혐의로 구속한 대전지검 천안지청에 따르면 최씨와 한씨는 2003년경부터, 개발이 예정된 천안시 청당동과 아산시 탕정면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건설사에 되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돈 놓고 돈 먹기’가 아니었다. 쉬울 것 같던 처음과 달리 토지 매입비가 뛰고 건설사 자금난으로 사업이 지연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검찰은 최씨 등이 2005년 7월 이모(52) 씨에게 “내 땅에 근저당을 설정하고 돈을 빌려주면 1년 후 배로 불려주겠다”고 속여 5억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2007년까지 2명에게서 모두 21억원을 받아 챙겼다는 것.
검찰조사 결과 범행 당시 최씨는 수십억원의 채무가 누적돼 있었다. 범죄는 범죄를 낳았다. 돈을 갚을 길이 없자 이씨가 다니는 직장(대학)에 악의적인 투서를 하는가 하면 이씨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허위 고소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충무공 고택 터 등이 경매로 나온 것도 이 과정에서 비롯됐다. 최씨에게 7억원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한 김모 씨는 최씨 소유의 현충사 경내외 9만8000여m²(7필지) 땅에 대해 4월 경매를 신청했다. 충무공이 소년 시절부터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산 고택과 무예를 연마하던 활터 등이 경매 매물로 나왔다는 사실에 국민은 경악했다. ‘난중일기’ 등 최씨 소유의 충무공 유물이 암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뒤를 이었다. 현충사관리소 등에 따르면 사업을 하는 전모 씨는 “2008년 6월경 최씨와 한씨가 충무공의 유물 130여 점을 180억원에 사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매물로 나왔다는 유물은 ‘난중일기’와 서간첩, 장검(보물 제326호), 옥로, 교지 등 현충사와 진주박물관 소장품들. 충무공 유허와 유물이 최씨 개인 소유로 돼 있는 것은 현충사 성역화사업을 벌이던 1960년대 말 14대 종손인 이응렬 씨가 종회 대표 자격으로 이들 유허와 유물 등을 국가에 대여하면서 소유권을 이전받았기 때문이다.
전씨는 “최씨가 유물 목록을 제시하며 매입을 제안해 유물의 사진까지 찍었고, 이들 유물의 처분 등 모든 권리를 한씨에게 넘겼다는 위임장도 봤다”고 말했다. 종회 이재왕 회장도 “위임장 사본을 갖고 있다”며 혀를 찼다.
채무 갚으려고 난중일기를 매물로?
이에 대해 최씨는 “전씨가 충무공기념사업회와 관련한 일을 도와준다고 해 유물의 사진을 찍어 보여줬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전씨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당시 최씨와 한씨는 부동산 개발사업이 난관에 부딪혀 채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최씨가 말하는 충무공기념사업회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충무공 고택 터 등은 5월4일 2차 경매에서 덕수 이씨 풍암공파가 문중을 대표해 11억5000만원에 낙찰받았다. 충무공파는 문중 땅 일부가 지방자치단체의 영어마을 부지로 편입돼 거액의 보상금을 받은 풍암공파에 도움을 요청했다. 2차 경매에는 문화재청도 참여했고, 대전의 계룡건설 이인구 회장도 낙찰받아 국가에 기부 채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충무공 문중은 “후손으로서 충무공을 욕되게 할 수 없다”며 직접 낙찰을 받았다. 문중은 소송을 통해 최씨 소유인 유물도 되찾아 현충사에 기증하기로 했다. 낙찰받은 지 10일 뒤 논란의 한 축이던 최씨와 한씨는 사기와 명예훼손, 무고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이번 사태는 충무공의 정신을 교훈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봐야 한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노승석 대우교수는 “난중일기에는 미리 준비한다는 뜻의 ‘비(備)’자가 유난히 많고 충무공의 승인(勝因)도 사전 대비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화재 당국은 현충사 성역화사업 때 현충사 사적지 전부를 국유화하지 못했고, 2006년에는 종손의 매입 건의가 있었으나 적극 나서지 않았다.
노 교수는 “충무공 유물을 돈거래의 대상으로 봤다는 사실이 물질에 초연했던 충무공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며 매화 같은 품격을 지닌 충무공의 한시를 소개했다.
“빈궁과 영달은 오직 저 하늘에 달렸으니(窮通只在彼蒼天)/ 모든 일은 모름지기 자연에 맡기리라(萬事聊須任自然)/ 부귀함은 때가 있으나 홀로 차지하기 어려운 법(富貴有時難獨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