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신기하다. 제주는 찾을 때마다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놀라움을 주는 제주는 ‘피겨 여왕’에 오른 김연아 같다고나 할까.
그중에서도 오름은 언제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갈 때마다 새로움을 주는 대표적인 제주의 보물이다. 엄마 품처럼 파고들고 싶은 크고 작은 오름. 이번 제주 걷기 여행에서도 오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바람의 나라’답게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은 그대로였지만 날씨도, 하늘색도, 공기도 모든 게 달랐다. 꼭대기에 오를 때는 한 치 앞이 안 보일 만큼 안개에 싸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한자리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서 있는 듯하지만, 내게 오름은 늘 다른 느낌이었다.
제주 사람에게 오름은 ‘호흡’
오름은 자그마한 흙무더기처럼 보이지만 이래 봬도 화산이다. 수만 년 전 한라산에서 분출된 흙덩이들로 만들어졌다. 제주 오름은 모두 368개. 제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곳에 정착한 사진작가 고(故) 김영갑 선생이 제주에서 가장 사랑한 곳도 오름이다. 그는 오름의 신비에 빠져 매일처럼 오름을 렌즈에 담았다. 파노라마로 된 그의 사진은 오름에 대한 경외감을 더한다.
제주에는 수많은 ‘오사모’(오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있다. 화전을 일구던 팍팍한 속내부터 동네 뒷동산처럼 첫사랑의 추억과 우정이 꽃피던 수많은 이야기까지 오늘의 오름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여행자에게는? 가끔 여행자들에게 오름은 제주의 ‘모든 것’이다. 특히 트레킹을 목적으로 제주를 찾은 이들에게 오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목적지다. 제주만의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오름만 한 곳이 없다. 바람 맛, 바당(바다의 제주 방언) 맛, 혀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해지는 제주의 수많은 맛!
안개 속 산책, 다랑쉬오름의 오후
여행자들이 주로 오르는 오름은 동쪽에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곡선미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랑쉬오름과 그 앞에 있는 아끈다랑쉬오름은 절대 빠뜨리면 안 된다. 다랑쉬라는 예쁜 이름 외에 월랑봉이라는 독특한 이름도 가지고 있다. 오름에 오르면 분화구가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다랑쉬오름 역시 여느 오름처럼 그다지 높진 않다. 높이는 382.4m. 그러나 분화구가 백록담의 깊이와 비슷한 115m나 된다.
다랑쉬오름을 사랑하는 이들은 다랑쉬의 자태에 반한 사람들이다. 균형 잡힌 다랑쉬의 모습은 단아하고 기품이 있어 마치 주변의 오름을 거느리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상당수의 오름이 개인 소유라 따로 입구가 없는 것과 달리, 다랑쉬오름엔 친절하게도 안내판과 주차장까지 있다. 다랑쉬오름을 오르는 등산로는 하나다. 처음에는 나무 계단으로 시작하다가 고무발판이 깔린 길이 이어진다. 예전에는 정상인 굼부리(분화구)까지 바로 오르도록 등산로가 뻗어 있어 다랑쉬를 오르려면 종아리가 땅기곤 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등산로를 지그재그로 다시 만들어서 훨씬 오르기 쉬워졌다.
급격한 경사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고 오르기 위해 ‘오름’에 집중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그재그로 난 새 길을 따라 걸으니, 천천히 오르면서 앞에 펼쳐진 아끈다랑쉬오름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걷기’가 사랑스런 이유는 이런 여유가 주는 맛 때문이 아닐까. 산을 잘 타는 이들이야 한달음에 돌고 내려올 오름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알콩달콩한 재미를 즐겼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면 세찬 바람이 먼저 맞는다. 굼부리에 오르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고 사방이 안개로 뒤덮였다. 안개가 짙어 굼부리 속은 물론 바로 앞도 볼 수가 없었다. 구름과 바람이 내기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기를 할 뿐이다. 다랑쉬오름은 ‘전망대’라고 불릴 만큼, 이곳에서 보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보통 때 같으면 성산 일출봉부터 한라산까지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니, 안개가 잠깐 야속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것이 변화무쌍한 제주의 맛인 것을. 역시 욕심을 버리니 모든 것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오름이 사랑스러운 이유
이번 제주 여행은 줄곧 안개와 숨바꼭질이었다. 안개가 사라졌나 하면 나타나고, 꼈나 싶으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제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놀이라고나 할까.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1.5km가 되는 굼부리 가장자리를 도는 것도 색다른 맛이었다. 도대체 이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인가, 어느 정도나 온 것인가,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것처럼 거리에 대한 감각 없이 발을 내디딘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안개 속 산책.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나 자신만을 믿고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하는 길. 바람과 함께, 안개와 함께, 굼부리 주위에 난 억새들과 함께 걷는 길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에너지를 불어넣어준다.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인간으로서 미지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인생, 좀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내가 그리는 대로 살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지 모를 기운이 났다. 땅에서도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 뜻을 가지고 한 걸음씩 걸으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리는 땅에 도착할 거야’라는 울림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안개 속 1.5km를 걸으며 짧고도 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다랑쉬오름에서 내려오는 길.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굼부리 주변을 돌면서 오랜만에 만난, 안개 속에서의 나만의 시간. 등을 적셨던 땀은 바람으로 이미 사라졌지만, 등판에 남은 그 서늘한 기운처럼 마음속으로 파고들던 여러 생각이 진하게 남아 팔딱거리는 것 같았다. 바로 이 맛에 제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먼저 오름으로 향하나 보다.
그중에서도 오름은 언제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갈 때마다 새로움을 주는 대표적인 제주의 보물이다. 엄마 품처럼 파고들고 싶은 크고 작은 오름. 이번 제주 걷기 여행에서도 오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바람의 나라’답게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은 그대로였지만 날씨도, 하늘색도, 공기도 모든 게 달랐다. 꼭대기에 오를 때는 한 치 앞이 안 보일 만큼 안개에 싸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한자리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서 있는 듯하지만, 내게 오름은 늘 다른 느낌이었다.
제주 사람에게 오름은 ‘호흡’
오름은 자그마한 흙무더기처럼 보이지만 이래 봬도 화산이다. 수만 년 전 한라산에서 분출된 흙덩이들로 만들어졌다. 제주 오름은 모두 368개. 제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곳에 정착한 사진작가 고(故) 김영갑 선생이 제주에서 가장 사랑한 곳도 오름이다. 그는 오름의 신비에 빠져 매일처럼 오름을 렌즈에 담았다. 파노라마로 된 그의 사진은 오름에 대한 경외감을 더한다.
제주에는 수많은 ‘오사모’(오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있다. 화전을 일구던 팍팍한 속내부터 동네 뒷동산처럼 첫사랑의 추억과 우정이 꽃피던 수많은 이야기까지 오늘의 오름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여행자에게는? 가끔 여행자들에게 오름은 제주의 ‘모든 것’이다. 특히 트레킹을 목적으로 제주를 찾은 이들에게 오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목적지다. 제주만의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오름만 한 곳이 없다. 바람 맛, 바당(바다의 제주 방언) 맛, 혀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해지는 제주의 수많은 맛!
안개 속 산책, 다랑쉬오름의 오후
여행자들이 주로 오르는 오름은 동쪽에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곡선미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랑쉬오름과 그 앞에 있는 아끈다랑쉬오름은 절대 빠뜨리면 안 된다. 다랑쉬라는 예쁜 이름 외에 월랑봉이라는 독특한 이름도 가지고 있다. 오름에 오르면 분화구가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다랑쉬오름 역시 여느 오름처럼 그다지 높진 않다. 높이는 382.4m. 그러나 분화구가 백록담의 깊이와 비슷한 115m나 된다.
다랑쉬오름을 사랑하는 이들은 다랑쉬의 자태에 반한 사람들이다. 균형 잡힌 다랑쉬의 모습은 단아하고 기품이 있어 마치 주변의 오름을 거느리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상당수의 오름이 개인 소유라 따로 입구가 없는 것과 달리, 다랑쉬오름엔 친절하게도 안내판과 주차장까지 있다. 다랑쉬오름을 오르는 등산로는 하나다. 처음에는 나무 계단으로 시작하다가 고무발판이 깔린 길이 이어진다. 예전에는 정상인 굼부리(분화구)까지 바로 오르도록 등산로가 뻗어 있어 다랑쉬를 오르려면 종아리가 땅기곤 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등산로를 지그재그로 다시 만들어서 훨씬 오르기 쉬워졌다.
급격한 경사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고 오르기 위해 ‘오름’에 집중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그재그로 난 새 길을 따라 걸으니, 천천히 오르면서 앞에 펼쳐진 아끈다랑쉬오름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걷기’가 사랑스런 이유는 이런 여유가 주는 맛 때문이 아닐까. 산을 잘 타는 이들이야 한달음에 돌고 내려올 오름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알콩달콩한 재미를 즐겼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면 세찬 바람이 먼저 맞는다. 굼부리에 오르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고 사방이 안개로 뒤덮였다. 안개가 짙어 굼부리 속은 물론 바로 앞도 볼 수가 없었다. 구름과 바람이 내기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기를 할 뿐이다. 다랑쉬오름은 ‘전망대’라고 불릴 만큼, 이곳에서 보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보통 때 같으면 성산 일출봉부터 한라산까지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니, 안개가 잠깐 야속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것이 변화무쌍한 제주의 맛인 것을. 역시 욕심을 버리니 모든 것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제주의 오름은 동쪽에 모여 있다(좌측사진). 아부오름(중간사진). 다랑쉬오름(우측사진).
이번 제주 여행은 줄곧 안개와 숨바꼭질이었다. 안개가 사라졌나 하면 나타나고, 꼈나 싶으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제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놀이라고나 할까.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1.5km가 되는 굼부리 가장자리를 도는 것도 색다른 맛이었다. 도대체 이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인가, 어느 정도나 온 것인가,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것처럼 거리에 대한 감각 없이 발을 내디딘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안개 속 산책.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나 자신만을 믿고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하는 길. 바람과 함께, 안개와 함께, 굼부리 주위에 난 억새들과 함께 걷는 길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에너지를 불어넣어준다.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인간으로서 미지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인생, 좀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내가 그리는 대로 살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지 모를 기운이 났다. 땅에서도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 뜻을 가지고 한 걸음씩 걸으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리는 땅에 도착할 거야’라는 울림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안개 속 1.5km를 걸으며 짧고도 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다랑쉬오름에서 내려오는 길.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굼부리 주변을 돌면서 오랜만에 만난, 안개 속에서의 나만의 시간. 등을 적셨던 땀은 바람으로 이미 사라졌지만, 등판에 남은 그 서늘한 기운처럼 마음속으로 파고들던 여러 생각이 진하게 남아 팔딱거리는 것 같았다. 바로 이 맛에 제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먼저 오름으로 향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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