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한나 역을 맡은 케이트 윈슬렛(왼쪽)과 마이클 역의 데이비드 크로스.
“그래서, 이제는 뭔가 깨달은 게 있나요?”
이런 나쁜 X 같으니라고. 그래도 어찌 됐든 한나가 오랜 투옥생활을 견뎌온 건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시대는 개인에게 양심 이상의 가혹한 처지를 요구한다는 것을 이 남자아이만큼은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나면서도 왠지 ‘나치 = 나쁜 사람’의 등식이 성립하는 한나보다, 그런 그녀의 역사적 속죄의식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방치하는 마이클에게 화가 난다. 역사적 대의는 결국 용서와 화해 속에서 실현된다. 국가와 정부, 법제 등 거대 담론을 다루는 존재들은 그걸 못하더라도 개인 대 개인은 사실 그걸 실천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이클은 그러기까지 오랫동안 머뭇거린다.
‘더 리더’는 독일 베른하르트 슐링크 원작의 동명소설을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달드리는 꽤나 인문학적 배경을 가진 감독이다. 그의 전작 역시 마이클 커닝엄의, 숙독이 필요한 소설 ‘디 아워스’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다. 전작이 다소 은유적인 영화라면 이번 영화 ‘더 리더’는 산문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더 터치감이 강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분노하기도 쉽고 줄줄 울기도 쉽다.
영화사가 관객에게 내미는 손짓만으로 보면 이 영화는 30대 여인과 10대 남자아이의 섹스담처럼 보인다. 실제로 주연을 맡은 두 배우의 나이는 소설 속 상황과 크게 차이가 없는데 데이비드 크로스는 1990년생으로 한국 나이로 스무 살, 만 열아홉 살이다. 속된 말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데이비드 크로스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영화 속 농익은 여체의 소유자인 한나의 몸매를 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이클과 침대에서 뒹구는 한나의 나신은 세계 모든 남성들이 갖고 있는 판타지, 곧 연상 여인과의 밀애와 섹스 감정을 충족시킨다.
어릴 적, 이제 막 섹스에 눈뜨기 시작할 무렵에 누나 친구나 이모 친구 혹은 나이가 훨씬 많은 여인과의 섹스를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도 많은 남성들의 몽정은 그 같은 비정상적인 연정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시길. 영화 속 두 남녀(여인과 어린 남자)의 모습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한다. 바보 같은 마이클은 처음엔 그것도 모르는데, 그저 책을 읽어주면 섹스를 하게 해준다고 생각해 열심히 책을 읽어줄 뿐이다. 여자는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읽는 데 참 소질이 있구나.” 이상하게 한나의 그 평범한 말에서도 왈칵 가슴이 저며온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책을 못 읽는 여자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깨닫지 못한 삶에서 벌어진 숱한 우여곡절을 이해하지 못한다. 굴곡의 삶을 겪고 견딘 여자는 그런 일을 잘 알지 못하는 남자아이에게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더러운 인생을 알라고 가르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그걸 모르고 살라고 하지도 못한다. 진실을 알면 괴롭고, 그걸 모르면 거짓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나여, 그대가 남자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섹스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 보면 예수가 말 한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당신은 돌을 던질 것인가. 차라리 부둥켜안고 같이 울어주기를. 이 영화에서 마이클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 끝까지 후회하고 사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거참, 늘 용기 있는 선택이 중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