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플리츠’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일본 1세대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컬렉션.
그동안 팝스타 마돈나, 카일리 미노그 그리고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인 샤넬의 칼 라거펠트 등을 게스트 디자이너로 초청해 컬래보레이션을 벌여온 스웨덴의 패션브랜드 H·M은 동양계 디자이너 브랜드로는 최초로 ‘꼼 데 가르송’을 선택해 지난 11월 전 세계 H·M 매장에서 동시 발매했다. 이 H·M의 한정 아이템들은 불경기와 비수기가 겹친 11월에 엄청난 매출을 올려 ‘꼼 데 가르송’의 세계적 인기를 실감케 했다.
80~90년대 파리 컬렉션 강타
레이 가와쿠보가 1973년 설립한 ‘꼼 데 가르송’은 81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파리 컬렉션에서 디자이너 특유의 전위적인 콘셉트가 세계 패션피플들과 미디어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일본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얻은 브랜드. 현재는 메인 디자이너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레이 가와쿠보가 시그니처 브랜드 ‘꼼 데 가르송’을 비롯한 12개 라인을, 1992년부터 또 한 사람의 메인 디자이너로 활약하는 준야 와타나베가 ‘준야 와타나베 꼼 데 가르송’을 비롯한 3개 브랜드, 그리고 신진 디자이너 구리하라 다오가 ‘트리코트 꼼 데 가르송 등을 만들어 ‘꼼 데 가르송’이란 브랜드명 앞뒤에 또 다른 명칭이 붙는 디퓨전 라인(Diffusion Line)만 해도 20개에 이른다. ‘꼼 데 가르송’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지만 각각 다른 콘셉트를 가진 개별 브랜드로 발전시키는 이 시스템은, 전 세계 어떤 패션 하우스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각각의 라인이 다른 콘셉트로 차별화되지만,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꼼 데 가르송’ 브랜드 네임을 사용함으로써 미지의 브랜드에 거리감을 가진 소비자들을 자연스럽게 유인하는 것이다.
파리 컬렉션에 진출하자마자 세계 패션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며 언론으로부터 천재 칭호를 받으면서 ‘꼼 데 가르송’의 또 다른 축이 된 준야 와타나베는 데뷔 초부터 나이키, 리바이스 등과 자신의 디자인을 접목한 새로운 작업을 선보임으로써 컬래보레이션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이런 브랜드의 다양한 시도는, ‘꼼 데 가르송’의 디퓨전 라인들과 이 브랜드가 선별한 전 세계 디자이너 브랜드의 셀렉션을 동시에 판매하는 ‘플래그십 스토어’와 ‘셀렉트숍’을 결합한 형태의 하이브리드(Hybrid)한 매장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한국의 여러 셀렉트숍도 여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일본 브랜드 ‘라드 뮤지션’ ‘Y-3’ ‘언더커버’의 도쿄 매장(좌에서부터).
이세이 미야케(상) 겐조 다카다(중) 요지 야마모토(하)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파리 컬렉션을 강타한 일본인 디자이너들을 ‘일본의 1세대 파리컬렉션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세이 미야케, 겐조 다카다, 요지 야마모토 등 3인의 남성 디자이너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중 겐조 다카다는 겐조 브랜드를 루이비통의 모회사인 LVMH사에 매각한 뒤 1999년 패션계에서 은퇴했다. 요지 야마모토는 자신의 시그니처 브랜드는 물론 독일의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와 합작한 브랜드 ‘Y-3’를 빅히트 시켰으며, 최근 뉴욕의 새로운 패션메카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에 숍 2곳을 오픈하는 등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세이 미야케는 1997년 은퇴한 뒤 자신의 이름을 건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며, 도쿄의 롯본기에 건축가 안토 다다오와 공동 디자인하고 제작한 ‘21-21 디자인 사이트’란 미술관을 여는 등 아직도 여러 분야에서 의욕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세이 미야케 하면 가장 먼저 특유의 패턴인 플리츠(Pleats·주름)를 떠올리는데, 이 플리츠 소재 아이템들은 한국내에서도 가짜가 유통될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이세이 미야케도 대중적 라인인 ‘미(me)’와 ‘플리츠 플리즈(Pleats Please)’, 고급 라인 ‘페트 이세이 미야케(Fete Issey Miyake)’를 비롯해 컬렉션 라인인 ‘이세이 미야케’ 그리고 ‘하트(HaaT)’, A-POC 등 여러 라인으로 전개되고 있어 ‘꼼 데 가르송’의 전략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유한 마케팅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인큐베이터’라 불리는 이 시스템은 이세이 미야케의 관리하에 브랜드를 키운 뒤 별개의 브랜드로 분리, 발전시키는 프로세스다.
한국에도 소개된 ‘츠모리 치사토’를 필두로 유럽과 일본의 젊은 층이 열광하는 디자이너 아키라 오노주카가 이끄는 ‘카반 드 주카(Cabanne de Zucca)’, 그리고 ‘스나오 쿠와하라’ ‘파이널 홈’ 등이 인큐베이터를 통해 탄생한 브랜드들로, 이들은 모두 처음엔 이세이 미야케 내부 디자이너들이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별도의 브랜드로 독립했다. 이세이 미야케사는 1996년 ‘에이네트(A-net)’라는 유통회사를 발족해 이 브랜드들을 지원, 관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세이 미야케도 자사의 모든 브랜드와 인큐베이터를 통해 발굴된 신인 디자이너 브랜드를 모아 한곳에서 판매하는 ‘엘르토프 테프(Elttob Tep)’란 이름의 ‘멀티숍’을 발족해 새로운 마켓을 개척하고 있다.
일본 디자이너들은 일본적인 모티프를 끌어오면서도 유럽 패션 리더들의 취향에 맞는 옷을 만든다. 일본 디자이너 컬렉션 ‘언더커버’, ‘꼼 데 가르송’, 준야 와타나베’.(위에서부터 시계 방향)
1세대 일본 디자이너들에 이어 준 다카하시의 ‘언더커버(Undercover)’, 다카히로 미야시타의 ‘넘버 나인’ 등 새로운 세대 디자이너들도 파리 컬렉션에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세계 유수의 백화점과 셀렉트숍에서 그들의 컬렉션을 판매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뿐 아니라 대중과 직접 부딪치는 스트리트 브랜드에서도 일본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도 즐겨 입는 ‘에비수 진즈(Evisu Genes)’는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하고, 마돈나와 귀네스 팰트로가 사랑하는 데님 브랜드 ‘45rpm’과 브래드 피트가 좋아한다는 아메리칸 트래디셔널 캐주얼 브랜드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 힙합 브랜드 ‘어 베이싱 에이프(A Bathing Ape)’ 등은 현재 뉴욕에서 인기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브랜드는 ‘어 베이싱 에이프’인데, 런던과 파리에 이어 힙합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뉴욕과 최근 로스앤젤레스에까지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어 일본 브랜드의 저력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유명 힙합 아티스트인 ‘퍼렐’은 ‘어 베이싱 에이프’의 디자이너이자 CEO인 ‘니고(NIGO)’와 합작, 자신의 패션 브랜드 ‘빌리어네어 보이즈 클럽(Billionaire Boys Club)’과 ‘아이스크림(Icecream)’을 론칭해 젊은이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는 브랜드가 됐다. 한국에서도 최근 ‘코즈믹 원더’나 ‘라드 뮤지션’, ‘플레이 꼼 데 가르송’ 등의 일본 브랜드들을 영화배우 강동원 류승범, 가수 빅뱅 등이 착용하며 강남의 젊은 층에서 인기가 급증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활약상을 열거하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씁쓸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디자이너 브랜드가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만나는 유명 포토그래퍼나 스태프에게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에 대해 말하면 모두가 조심스러워한다. 뉴욕과 파리 컬렉션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한국의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있지만 한국 하면 그 디자이너, 그 브랜드를 떠올리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디자이너들의 경쟁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뻔한 행로만을 향하기에 목적하는 곳으로 가는 또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정부기관들도 ‘패션 코리아’ 같은 슬로건만 내걸 것이 아니라, 우수한 인재를 모아 디자이너 브랜드의 현지 진출을 돕는다면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전 세계 패션피플들이 선망하는 ‘잇-브랜드(It-Brand)’가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