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정대근(왼쪽) 전 농협 회장이 2006년 5월12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 중앙지법으로 들어오고 있다.
농협의 세종증권(현 NH증권) 인수와 관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 씨와 친구 정화삼 씨를 구속한 검찰은 화살을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으로 돌렸지만 여전히 관심사는 ‘거대공룡 농협’이다. 휴켐스 매각 비리, 부당 주식거래 모두 농협과 관련된 사안들이기 때문. 위기에 빠진, 자산규모 240조원(2007년 말 기준)의 ‘거대공룡 농협’.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지배구조가 문제 … 회장의 막대한 권한
정대근(64) 전 농협 회장의 권한은 막강했다. 9년 넘게 회장직에 있었던 그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다. 굵직한 기업 인수합병을 추진하면서도 정 전 회장은 이사회의 의결을 수시로 무시했다. 그래도 잡음은 일지 않았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걸 ‘카리스마’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모로 보나 ‘독재’ ‘독단’이었다.
세종증권 인수, 휴켐스 매각 모두 정 전 회장의 뜻대로 진행됐다. 진행 속도도 일사천리였다. “정 전 회장이 혼자 결정하고 집행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농협 간부들의 공통된 의견. 특히 휴켐스 매각 당시 30명 가까운 농협중앙회 이사들은 매각 결정 소식을 긴급이사회에 참석해서야 통보받았을 정도다. 2006년 매각 결정 당시 농협 이사였던 A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사회 규정에 따라서 최소한 일주일 전에는 (매각 사실을 이사들에게) 알리고 의결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런 게 없었다. 긴급이사회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자회사(휴켐스)를 매각한다는 거였다. 나도 그렇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건 통과에 1~2분도 안 걸렸다.”
농협 측은 “상장사(휴켐스)와 관련된 중요한 결정인 만큼 사전에 정보가 유출되면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속전속결로 처리됐다”는 논리를 펴지만 말끝을 흐린다. 그도 그럴 것이 농협이사회 규정에 따르면 ‘회장은 회의 개최일 7일 전까지 회의사항을 서면으로 우편 또는 전자적 방법 등을 이용하여 구성원에게 발송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농협 측은 ‘다만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규정한 단서 조항을 이유로 들어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지만 편의적인 해석, 경영진(회장)의 ‘독단’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정 전 회장은 2006년 5월 구속됐다 두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농협 양재동 부지를 현대차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3억원을 받은 혐의였다. 보석으로 나온 이후 정 전 회장은 농협 안팎의 퇴진 요구를 의식한 탓인지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로 출근하지 않았다. 대신 농협복지문화재단이 2006년 초 구입한 여의도 구 동원증권 빌딩에 회장실을 따로 차리고 ‘리모트 컨트롤 경영’에 나섰다. 2006년 9월 은둔 생활을 하던 정 전 회장이 농협 핵심간부 27명을 모아 회의를 하려던 장면이 ‘주간동아’ 카메라에 잡힌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뒤 페이지 사진 참조).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회장의 독단 경영은 부정을 불렀다. 인사 문제가 특히 심했다. 농협 내에서는 “인사는 곧 돈”이라는 말이 지금도 공공연히 나돈다. ‘지방의 ○○○ 본부장은 3000만원, 중앙회 ○○ 실장은 5000만원…’ 같은 얘기도 나온다. 한 농협 간부는 “매번 인사 때마다 ○○○가 얼마를 내고 그 자리에 갔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정 전 회장 재임 9년간 유독 심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12월 ‘주간동아’가 단독 보도(615호)한 ‘농협의 100억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 보도는 7개월 후 사실로 확인됐다. 농협 축산경제대표이던 남경우(현재 구속 수감) 씨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핵심. 이 사건은 최근 남 전 대표가 농협에 세종증권을 소개한 인물이라는 점, 정 전 회장이 남 전 대표를 통해 세종증권 인수와 관련해 받은 돈 50억원을 관리토록 한 점, 정 전 회장의 비자금 조성과 관리를 도운 정황 등이 속속 포착되며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남 전 대표는 정 전 회장을 대신해 호남지역 정관계 인사들을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관심을 모은다. 남 전 대표의 고향은 전남 순천이다.
‘주간동아’는 당시 남 전 대표가 조성한 100억원대의 비자금 중 일부가 정 전 회장의 변호사 비용, 정관계 로비 비용 등으로 사용한 정황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2006년 9월6일 서울 명동의 한 중식당에 농협 임원 27명이 모였다. 모임을 소집한 사람은 정대근 전 농협 회장이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정 전 회장은 당시 언론을 피해가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취재진을 발견한 정 전 회장은 끝내 이날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7년 12월27일 열린 민선 4기 농협중앙회 회장 선거는 농협의 현실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 전 회장의 뇌물수수 혐의가 대법원에서 최종판결 난 지 27일 만에 열린 선거는 그야말로 정치판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최원병(현 농협 회장) 후보는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회장 자리를 꿰찼다. 그는 선거 10일 전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동지상고 5년 후배로 경북 도의회 의장을 지낸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이었다.
최 후보 측은 선거운동 내내 “대통령은 이명박, 농협 회장은 최원병”을 외치고 다녔다. 선거 당일 현장에서 만난 한 경남지역 조합장은 “대통령과 고교 동문인 사람이 회장이 되면 아무래도 농협에 보탬이 되지 않겠나.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보고 지지 후보를 바꿨다. (정치권으로부터) 농협을 막아줄 버팀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농협은 그만큼 정치 외풍이 심한 곳이었다.
농협 내부의 ‘정치’도 볼만했다. 선거를 앞두고 농협 간부들은 농협중앙회 주변에 산재한 각 후보들의 선거사무실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업무는 뒷전이었다. 몇몇 부장급 간부는 아예 20일가량 휴가를 내고 후보들의 비서실장 노릇을 하며 저마다의 정치력을 시험했다.
유죄가 최종 확정되기 전, 정 전 회장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도 대단했다. 정 전 회장은 2심 판결을 앞둔 지난해 6월 조용히 인사를 단행했는데, 농협 내에서는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정 회장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친정체제를 구축한다”는 소문이었다.
이미 농협을 떠난 전직 임원 2명이 조용히 농협의 요직에 복귀한 것이 주된 이유였는데, 문제는 이들 모두가 이명박 대통령의 대학 동문들로 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인사들이란 점이었다. 당시는 정 전 회장이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이명박 후보 측에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때였다. 정 전 회장은 이 두 전직 임원을 NHCA자산운용(구 농협CA투자신탁운용)에 각각 이사와 감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이 회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돈 배병렬 씨가 상임감사로 있던 회사다. 당시 농협 내에서는 이 두 사람을 “정 전 회장의 동아줄”이라 불렀다.
다람쥐 쳇바퀴 농협개혁 … 이번엔 다르다?
그간 농협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2005년에도 그랬다. 당시 국회는 농협 회장을 상근에서 비상근으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농협법 개정안을 추진했다. 개정안은 회장의 권한을 △대정부, 국회, 정당 등에 대한 건의 △농협관련 법령 개정 건의에 제한했고 구체적인 업무 결재권이나 예산권은 각 사업부문별 대표로 넘기는 것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정안의 핵심인 인사추천위원회의 사업전담 대표이사 추천, 회장의 중앙회 경영 배제, 독립 감사위원회 설치 등은 결국 개혁안에서 빠졌다. 같은 일은 올해 9월에도 벌어졌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이를 두고 “농협 개혁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농협의 각 지역 조합장들을 중심으로 해당 지역 의원에 대한 조직적인 로비가 들어오면서 사실상 농협 개정안이 표류됐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농협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
세종증권 매각비리 의혹이 몰고 온 파장은 정부의 ‘농협개혁’ 선언을 끌어내는 성과를 냈다. 최근 정부는 민관 공동의 농협개혁위원회(공동위원장 김완배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정학수 농식품부 1차관.이하 개혁위)를 출범시키며 본격적인 농협 개혁을 선언하고 나섰다. △중앙회 인력의 10% 우선 감축, 향후 2년 내 15%까지 단계적 감축, 중앙본부 20% 이상 통폐합 △상위계급 중심으로 1~2년 내 1000명 이상 감축 △4개 유통자회사 1개사로 통합, 농협 사업목적에 부합하지 않은 자회사 청산 등이 주요 내용. 개혁위 측은 △지배구조 △선거제도 △신용사업 이익금 처리 등에 대한 개선 방안도 개혁안에 포함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원병 농협중앙회장도 12월8일 농협중앙회 정례조회에서 “회장 스스로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면 회장부터 개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임직원에게 밝혀 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개혁위 활동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당장 15% 인력감원을 두고 농협 측과 이견을 보인다. “농협이 선택할 일”이라는 개혁위 측과 “계획이 없다”는 농협의 줄다리기도 볼만하다. 이번엔 제대로 될 수 있을까. 농협 개혁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걱정 반, 기대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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