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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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신의주 개발은 北 경제 장악 신호탄

북중경협 토대로 한 ‘신조선전략’ 주목 … 북한, 개성 대신할 새 특구 후보지 검토설 모락모락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8-12-17 2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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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 신의주 개발은 北 경제 장악 신호탄

    단둥에서 바라본 신의주.

    2000년 8월9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트. 김 위원장이 배로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정 회장을 마주 보며 말했다.

    “개성을 줄 테니 가서 구경해보시오.”

    현대아산은 공단 입지로 처음엔 개성이 아닌 해주를 원했다고 김고중 전 현대아산 부사장은 전한다. 그런데 북한은 신의주를 바랐다. 신의주는 현대아산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북한 처지에서 해주는 서해함대 전력의 핵인 곳이어서 군사적으로 예민했다.

    “북한은 처음엔 나진·선봉을 언급하다 신의주 카드를 꺼냈다. 윗분(김 위원장)이 신의주를 거론했다기에 내가 직접 신의주에 가봤다. 위화도, 신의주를 묶어 5900만㎡(1800만평) 규모였는데 문제가 많았다. 항구가 아주 작았고 토사가 흘러 확장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김 위원장에게 신의주를 제외한 보고서 2개(해주, 개성)가 올라갔다. 그 뒤 1년간 답이 없다가 개성을 내준 것이다.”(김고중 전 부사장)

    신의주 개발에 대한 북한의 의지는 강했다. 현대아산이 고개를 가로저은 뒤 북한은 신의주의 ‘자력 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2001년 김 위원장의 베이징(北京) 방문 때 주룽지(朱鎔基) 당시 중국 총리는 “중국과 접한 신의주를 특구로 개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개성이 좋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평양은 이 조언을 무시하고 신의주 특구를 강행했다.



    신의주 공동개발은 중국 주도?

    2002년 10월4일 오전 4시, 중국 공안은 북한이 신의주 특구 행정장관으로 임명한 양빈(楊斌) 어우야(歐亞)그룹 전 회장을 체포했다. 북한의 야심작이던 신의주 특구가 중국의 어깃장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 신의주 특구가 다시 꿈틀거린다. 개성공단의 축소 또는 폐쇄에 나선 북한이 2002년의 ‘자력 개발’ 형식이 아닌 ‘중국 주도’의 신의주 특구 개발을 검토하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신의주 공동개발은 중국이 2004년 말 수립한 신조선전략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옛 고구려 영토와 관련해 역사적·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이라면, 신조선전략은 중조일치(中朝一致·북한을 중국화한다는 뜻)를 키워드로 한다.

    중국이 2004년 말 수립한 이 전략은 ‘중조경협’을 토대로 전통적으로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북한을 중국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일종의 액션 플랜(action plan).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중국화한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취재 결과 ‘신조선전략’의 각론은 다음과 같다.

    ①중조일치의 목표는 ‘중국의 안정’이다. 중국은 북한이 미국의 영향력 속으로 편입하거나 북한 체제의 예기치 않은 사태에 따른 완충지대의 상실을 우려한다.

    ②중국은 중앙+지방+군의 전방위 대북경협을 바탕으로 동북3성과 북한을 연계해 개발하고자 한다.

    ③신조선전략은 ‘개발위수(開發衛戍)’도 그 목적으로 한다. 개발위수는 동북지역을 개발하면서 조선족 사회를 한족화한다는 개념이다.

    ④동북3성과 북한의 연계 개발로 황해경제권, 동해경제권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⑤신의주-평양 축선과 훈춘-원산 축선을 중심으로 남포, 평양을 포괄하는 공동개발 계획이다. 그리고 북한 내 자원개발, 북한의 유통기지화, 경제영역에서 양국 간 유대관계를 축적하는 인적 인프라 구축을 병행한다.

    ⑥‘중국식 개발’ 노하우를 북한에 전수한다.

    북한은 신의주를 담당하는 ‘일꾼’의 쇄신 및 교체를 올해 8월 마무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즈음 북한은 개성공단 폐쇄 수순을 밟았다(뒤 페이지 상자기사 참조).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한·미·일 군사공조 강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북한이 중국의 전방위 경협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움직였다고 북한전문가 K씨는 말한다.

    중국은 동북3성 개발의 인프라로서 둥볜다오(東邊道) 철도를 구축한다. 북중 국경을 횡단하는 이 철도는 2009년 부분 개통한다. 개통의 첫머리는 군사용이다. 대외적으론 화물용이면서 여객도 나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이 철도 공사를 진행하면서 동간도, 서간도 지역의 중국동포 집성촌을 해체했다.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진출과 중국 동포의 한족화가 이 철도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이 철도가 남만주철도(일제가 만주 침략을 목적으로 1901년 개통, 운용한 철도)와 닮았다는 일부의 시각은 그래서 나온다.

    신의주에선 지난해 7월부터 옛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신의주역 주변엔 물류센터 건물이 올라서고 있다. 대북소식통 C씨는 “중국이 압록강변에 100km2 규모의 산업단지를 구축하려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올해 6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방북했을 때 북-중 간 제2압록대교 건설과 신의주-평양 간 고속도로 건설 논의가 있었다고 대북소식통들은 전한다.

    중국은 북한을 중국화하려는 신조선전략에 따라 동북3성과 북한의 연계 개발에 최소 30억 달러, 최고 50억 달러 수준의 자금을 준비한 것으로 전해진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5년 평양에서 20억 달러의 장기 지원을 포함한 ‘경제기술협정’에 서명한 바 있다. 다음은 중국 공산당 사정에 정통한 베이징의 외교소식통 K씨의 전언이다.

    “중국은 둥볜다오 철도에 10억 달러를 투입했다. 7억 달러를 신의주에 차관 형식 등으로 투입하는 것으로 안다. 중국과 북한은 대북 지원·개발·투자의 구체적 규모와 조건을 놓고 논의를 벌이고 있다. 북한은 내부의 계통을 거치면서 중국의 제안을 저울질한다. 중국은 장기적으로 신의주뿐 아니라 남포, 개성으로도 진출하고자 한다. 북한 경제를 접수하겠다는 태도다.”

    조봉현 기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중국이 동북3성과 북한에 투자하기로 한 자금이 200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동북4성화론 vs 중국기회론

    北, 중국 예속이냐, 단순 경제 교류냐


    中, 신의주 개발은 北 경제 장악 신호탄

    중국 단둥 출입국사무소.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1990년대 초반 이후 25~30% 수준에 머물다가 2002년부터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2005년엔 50%를 넘었으며, 2006년과 2007년엔 각각 56.7%, 67.1%를 기록했다. 중국은 2004년부터 대북(對北) 투자에서도 1위에 올라섰다.

    북한 경제의 대(對)중국 의존도 심화는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중국의 북한에 대한 신식민지적 접근’ ‘북한이 중국의 동북4성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북중경협을 들여다보는 서울의 시각은 크게 세 갈래다. 북중경협을 경제 관계로 보는 ‘순수 경제적 관점’, 북한이 중국에 예속되는 것을 우려하는 ‘동북4성화론’, 북한이 중국의 도움으로 개혁·개방의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중국기회론’이 그것이다. 동북4성화론은 ‘종속론’에 기초한 정치적 해석이다. 이 견해는 중국 자본이 중국의 국익과 관련해 정치적 의도 및 목표에 따라 북한에 진출한다고 본다. 중국이 대북 무역 및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북한 시장에 대한 선점전략이며, 북한 경제는 결국 중국 경제에 종속되리라는 것이다.

    동북4성화론을 주장하는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은 북한이 자체적인 자본 축적을 통한 생산 증가→소비 증가→투자 증가→자본 축적의 선순환 구조를 꾸리지 못하고 소비재의 수입 대체→생산 중단→자본 축적 실패→재투자 중단의 악순환을 반복하리라 내다본다.

    중국기회론은 중국이 북한체제의 안정 혹은 연착륙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대북 투자를 늘려왔다고 본다. 성균관대 이희옥 교수(정치외교학)는 “북-중 간 경제 교류가 동북4성화론 같은 고도의 정치적 기획 속에서 진행된다는 시각은 과도한 일반화”라고 주장한다.

    한편 중국에 의한 북한의 신식민주의화가 근본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2006년 ‘2, 3월 사건’ ‘북핵 실험’ ‘미사일 발사’에서 볼 수 있듯 북한이 결국엔 대중 종속을 거부하리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동북3성과 북한에 200조원 투자”

    “조총련 고위 인사를 포함해 여러 경로로 크로스 체크한 정보에 따르면 동북3성과 북한지역에 중국이 투자하기로 한 자금은 200조원에 달한다. 200억 달러가 아니라 200조원이다. 엄청난 돈이다. 물론 북한에 들어갈 자금은 장기간에 걸친 것이다. 북한 전역에 대한 전방위 투자다. 무시무시한 규모다. 중국이 북한을 자국에 예속화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이렇게 전했다.

    “중국은 2005년께 서부개발에 이어 동북개발을 진행하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0년 넘는 기간의 투입 총액은 한화 기준으로 약 200조원으로 알려진 바 있다. 거기에는 동북3성과 북한의 공동개발 의지가 숨겨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터져나온 것이 ‘동북4성화’라는 단어다. 반발을 예상한 중국은 조용히 이 계획을 묻어두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밖으로 드러낼 것이다.”

    신의주는 중국에게 침탈의 기억이 떠오르는 곳이다. 일제는 경의선과 남만주 철도를 통해 만주 일대의 이권을 장악하면서 신의주를 군사도시로 키웠다. 따라서 중국은 한국·미국·서방자본의 진출처럼 ‘중국 주도’로 진행되지 않는 신의주 개발엔 저어하는 태도가 강했다. 2002년 양빈 사건 때 북한에 어깃장을 놓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신조선전략에 따르면 신의주는 북중경협의 ‘출입구’, 동북3성은 북한 경제의 ‘배후지’다. 북중경협을 통해 유통과 기술, 생산과 교류를 일체화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개성공단처럼 임가공 수준이 아니라 신의주 특구를 디딤돌로 북한을 ‘위안화 경제권’으로 끌어안으려고 한다. 중국은 또 동북3성 개발과 북한을 연계함으로써 대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도 한다.

    2006년 1월 김 위원장은 광저우(廣州), 주하이(珠海) 선전(深土川)을 방문했다. 광저우-주하이-선전 루트는 후진타오 주석이 추천한 것이다. 이 루트는 중국이 외부 자본을 디딤돌로 ‘위탁 개발’한 초기 경제특구의 확대 과정을 역순으로 보여준다. 선전-홍콩, 주하이-마카오의 조합은 중국 도시-북한 도시의 조합과 겹쳐진다.

    선전의 배후에 홍콩이 있었듯, 신의주의 배후엔 단둥(丹東+동북3성)이 있다. 선전이 도약하면서 주하이가 발전하고 광둥성이 부유해졌다. 광저우는 광둥성의 성도(省都)로 ‘동북3성+북한’ 개발의 큰 그림에서 평양과 오버랩된다. 이 구도대로라면 ‘점’을 이어 ‘선’을 만든 뒤 그 선을 연결해 ‘면’을 꾸린 중국식 개발이 ‘중국 주도’로 북한에서 시행되는 것이다.

    개성공단 보도 그 후

    기사 내용처럼 폐쇄 수순 ‘척척’


    中, 신의주 개발은 北 경제 장악 신호탄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 절차를 밟은 것은 올해 3월 말부터다. 평양은 이명박 대통령을 ‘역적’ ‘매국역적’ ‘모리간상배’로 몰아붙이면서 서울한테는 쌀, 비료도 받지 않겠다는 투로 나왔다. 그즈음 중국은 북한에 쌀과 비료를 제공했다.

    ‘주간동아’는 4월 초 ‘뿔난 평양, 개성공단 폐쇄 수순 밟나’(631호 참조)라는 제목으로 개성공단의 축소 혹은 폐쇄를 북한이 저울질한다고 보도했다. 개성공단 폐쇄 가능성을 최초로 보도한 이 기사에 대한 한국 내 전문가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북한이 ‘달러’라는 실익을 포기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이 얻는 실익은 알려진 것보다 매우 적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측 노동자는 2만3953명. 복지비를 포함해 북한 노동자 1인당 평균 임금을 월 100달러로 계산하면 북측에 돌아가는 돈은 매달 240만 달러에 그친다. 중국은 신의주 특구와 관련해 북한에 7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준비해놓은 대북 경협자금이 만들어낼 부가가치와 비교하면 개성공단은 ‘새 발의 피’다.

    ‘주간동아’는 6월‘개성공단 폐쇄 시나리오’(642호 참조)를 속보로 전했다. 개성공단 폐쇄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쪽은 북한 군부다. “문 닫을 각오로 본때를 보여주자”는 의견이 군부에서 나왔다. 그즈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김 위원장과 경제 문제를 주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간동아’는 7월 ‘북한 군부 이참에 본때 보여주마’(646호 참조)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서울과 평양을 잇는 ‘살아 있는’ 라인이 하나도 없을 때다. 이명박 정부가 ‘원칙’을 내세우며 ‘평양 길들이기’에 나서자 북한은 봉남(封南), 즉 ‘서울 길들이기’로 응전했다.

    결국 개성공단은 ‘주간동아’의 최초 보도대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북한은 ‘12·1 조치’를 통해 남북 간 육로통행 제한·차단에 나섰으며, 대남 의존도를 최소화하면서 대중 의존도를 높이는 근중원남(近中遠南)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중국의 신의주 6년 줄다리기

    냉각→밀월→냉각→밀월→?


    북한 언론은 “11월25일 새벽 김정일 위원장이 신의주의 산업시설을 시찰했다”며 30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북한은 하루 전 개성공단 상주 인원 축소 등이 담긴 ‘12·1 조치’를 발표했다.

    북한이 중국과 공동으로 신의주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관측은 신의주화장품공장 비누직장, 낙원기계연합기업소를 시찰하는 모습이 담긴 ‘1호 사진’(김 위원장의 얼굴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면서 회자됐다.

    신의주 특구를 둘러싼 북-중 간 줄다리기는 2002년 이후 북-중 관계의 흐름을 되짚어봐야 이해하기 쉽다.

    북한과 중국은 갈등기(2002~2003년)→밀월기(2004~2006년)→갈등기(2007년)→신(新)밀월기(2008년)를 거쳤다. 북-중 관계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게임이었다. 북한은 중국에 다가설 때도 중국으로의 예속을 경계했다.

    북한에선 전통적으로 ‘자주파’와 ‘친중파’의 정책 대결이 있었다. 북한에서 ‘파벌’은 금칙어다. 따라서 자주파와 친중파라는 한국식 표현은 ‘중국을 어느 선까지 믿고 의존할 것인가’에 대한 시각차에서 비롯한 것으로 자주파, 친중파가 파벌로 존재한다거나 서로 대립한다는 뜻은 아니다.

    잠시 시곗바늘을 ‘양빈 사건’이 터진 2002년 10월로 돌려보자. 북한의 야심작인 신의주 특구에 중국이 어깃장을 놓은 이유를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갈래로 파악한다.

    ①실리추구설(說) : 북한의 개혁·개방이 중국의 국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지노 문제도 영향을 끼쳤다.

    ②대북 영향력 확대 유지설 :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자국에 예속된 북한을 바란다는 것이다.

    ③사전 통보 부재에 대한 불만설 : 북한이 중국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신의주 특구를 추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들은 ‘순망치한(脣亡齒寒)적 동지적 관계’이던 북중동맹이 ‘정치·경제적 실리를 따지는 통상적인 선린관계’로 변화했다는 점을 전제로 삼는다. 얼음장 같던 북-중 관계는 2004년부터 해빙기에 들어선다. 2004년 4월 김 위원장의 방중이 전환점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북한이 중국의 뜻을 다방면에서 존중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도 리장춘(李長春)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2004년 9월 방북 이후 눈에 띄게 ‘대미(對美) 협조, 대북(對北) 압박’ 기조를 누그러뜨리고 북한에 다가서는 자세를 취했다. 이 시기 북한과 중국은 경협사업을 잇따라 발표한다. 2005년 12월 북한의 노두칠 부총리와 중국의 정페이옌(曾培炎) 부총리가 합의한 원유개발 공동협정이 대표적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2005년 1월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북중경협과 관련해 △정부 지도 △기업 참여 △시장 작동의 원칙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정부 지도’는 중앙정부의 지원하에서 중국의 지방정부와 기업이 북한과 경협사업을 벌인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은 북한의 자원에도 눈독을 들였다. 북-중 공식회담에서 ‘자원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2005년 3월 박봉주 당시 북한 총리와 원자바오 총리의 베이징 만남 때다. 그 뒤 중국은 △계약형 △설비지원형 △인프라투자형의 형태로 북한의 지하자원을 획득했다.

    2006년 1월 김 위원장은 광저우(廣州), 주하이(珠海) 선전(深土川)을 방문한다. “이 방문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를 북중동맹을 통해 대응하려는 북한의 의도와 대북 지원을 통해 북한의 안정 및 대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합치함으로써 성사된 것으로 보인다.”(최수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2006년 방문은 2001년 김 위원장이 방문한 중국 상하이(上海)와 대비된다. 상하이는 중국이 ‘자력 개발’한 곳으로 북한은 2002년 신의주 특구를 추진하면서 자력 개발을 강조했다. 따라서 2006년 방문은 북한이 중국식 개발에 나설 뜻을 보인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북-중 밀월은 찬바람을 맞는다.

    ‘悍然(hanran).’

    ‘서슴없이,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강경하게, 단호하게’라는 뜻의 중국어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지 2시간 20분 만에 나온 성명의 첫머리에 신중하기로 소문만 중국 외교부가 이 표현을 썼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반대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핵실험을 실시했다….”

    외교가에선 2006년 ‘2, 3월 사건’을 2004~2006년의 북-중 밀월이 흔들린 계기로 본다. ‘2, 3월 사건’은 2006년 2, 3월 중국 스파이가 북한의 정보를 취득하다가 북한 정권에 발각된 일을 가리킨다. 중국은 북한 내 핵 및 군사 시설, 전국에 산재한 김 위원장의 안가(安家) 등을 탐문했다.

    2006년 4~7월엔 북-중 간 ‘비자 전쟁’도 벌어졌다. 북한이 중국인에 대한 비자 심사 및 연장을 까다롭게 하자 중국 외교부도 북한 측 방문객의 비자 연장을 중단하고 심사를 엄격하게 한 것이다. 7월5일 북한은 중국의 만류에도 “우리는 쏜다”고만 통보한 뒤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10월9일엔 핵실험을 강행했다. 핵실험을 통해 북한이 미국뿐 아니라 중국에도 메시지를 전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2008년 서울에 새 정부가 들어선 뒤 북-중 관계는 또다시 전변(轉變)한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북-중 관계가 빠른 속도로 회복된 것이다. 베이징은 발 빠르게 평양에 비료와 식량을 지원했다. 2008년 6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의 평양 방문은 2004~2006년 수준으로 북-중 관계가 회복했음을 외부에 알린 사건이다.

    이렇듯 2002년 이후 북-중 관계는 두 나라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출렁거렸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중국에 대해 민족주의 정서가 강했다. 대(對)중국 종속화도 경계해왔다. 그런 북한이 중국을 믿고 의존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한 북한 전문가는 이렇게 전망했다.

    “신의주 특구의 중국 주도 ‘위탁 개발’은 북한이 아닌 중국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평양이 베이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서울과의 경협을 끊겠다는 뜻이다. 파워가 세진 군부 주도로 이 같은 움직임이 조성된다. 그러나 중국으로의 종속화를 경계하는 노동당 일부 인사들이 군부의 의도에 브레이크를 걸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의 당-국가 체제에서 노동당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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