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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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면 할수록 “여보세요” 허기증

  • 입력2008-08-13 09: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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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하면 할수록 “여보세요” 허기증

    1960년대 전화교환원들.

    새로 개발된 도시에서 점점 보기 어려워지는 풍경 가운데 하나로 전봇대가 있다. 지금은 어른들에게 유년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지만, 그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첨단문명의 상징이었다.

    전봇대는 전기를 보내는 시설로 여겨지지만 애초의 목적은 달랐다. ‘전봇대’라는 말을 뜯어보면 ‘전보’+‘대’의 합성어다. ‘전신주’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telegraph pole’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전봇대는 원래 전보(전신)를 송수신하는 전선을 올려놓는 기둥으로 세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에 전깃줄이 얹힌 것이다.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통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전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2007년 상연된 연극으로 ‘다리퐁 모단걸’이라는 작품이 있다. 배경은 1902년, 전화가 보급되던 초창기의 사회 풍경을 다채롭게 재현했다. ‘다리퐁’이란 텔레폰(telephone)을 음독으로 풀어 읽은 것으로 득률풍(得律風)이라고도 했다. 그 밖에 어화통(語話筒), 전어기(傳語機)라는 명칭도 있었다. 연극에서 주인공 ‘외출이’는 큰오빠의 권유로 전화교환원으로 취직하고, 그 일을 하게 되면서 어떤 남자의 가슴 아픈 사랑을 접하게 된다. 연극은 외출이가 그를 연민하는 마음에서 그 사랑에 개입하게 되고, 그러다가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일이 꼬이는 에피소드를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타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엿듣는 경험은 흔치 않았다. 더구나 여성이 생면부지의 남성과 통신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외출이’라고 붙여진 것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전화교환원은 ‘모던걸’이라고 불릴 만큼, 당시 여성들에게 ‘첨단’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처음 전화가 도입됐을 때 교환원은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교환원을 통하지 않으면 통화할 수 없는 시스템에서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교환원이 통화 내용을 듣고 있다가 저질 대화나 욕설이 들리고 격렬한 말다툼 같은 것이 생기면 통화를 중단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목소리는 글자와 달리 살아 있는 신호다. 전화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원격 현존(remote presence, telepresence)’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전화를 하면서도 상대가 높은 사람이면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갖췄다. ‘여보세요?’라는 말도 전화가 처음 생겼을 때 함께 생긴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니 어색하고 신기해 ‘여기 좀 보라’고 말을 건넨 것이 전화 받는 용어로 굳어진 것이다.



    “전화는 글로 쓰여져 인쇄된 페이지와는 달리 완전한 참가를 요구한다. 문자문화적인 인간은 오랫동안 단편적으로 주의하는 데는 익숙해졌으므로 전면적인 주의를 강력히 요구하는 데는 반발을 느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전화를 하면서 꼭 ‘낙서’를 하고 싶어한다. 이 사실은 전화 미디어의 본질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전화는 우리의 모든 감각과 기관의 참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전화가 제공하는 청각 이미지는 극히 빈약한 것이므로 우리는 다만 감각을 사용하여 그것을 보강하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제 전화는 시청각 미디어로 변신하고 있다. 영상통화가 가능해졌고 이는 특히 휴대전화와 친화성을 갖고 있다. “착 붙는 영상통화의 즐거움”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내 몸에 밀착된 단말기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Show’를 할 수 있도록 무대를 열어준다. 휴대전화는 더 이상 전화기가 아닌 단계로 급속히 옮아가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는 브라운관으로 이미 정착했고,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접속할 수 있는 손 안의 ‘정보기술(IT) 허브’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어느 권력자도 꿈꿀 수 없었던 똘똘한 비서관을 여러 명 거느리고 사는 셈이다.

    편리한 정보환경 점점 개별화 … 인간관계도 단절

    그렇듯 편리한 정보환경에서 우리의 삶은 점점 개별화돼간다.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사장님도 문자메시지 발송이나 수신을 손수 할 수밖에 없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어볼 일도 크게 줄어든다. 생활의 ‘퍼스널’화 속에서 인간관계는 갈수록 단편화되고, 사회는 미세한 관계망들로 대체된다.

    그러나 그 사적인 통신세계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관리된다. 통화 명세가 초 단위로 기록되고, 기지국 정보를 통해 휴대전화 소지자들이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동선(動線)이 추적돼 실종자나 범죄자 수색에 활용되기도 한다. 또한 사사로운 관계의 변화가 통신회사에 보고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애인과 헤어진 직후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고객님, 상대번호가 커플 해제됐습니다. 요금제를 바꿔주세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결별의 상심을 위로해주기는커녕 마지막 한마디가 속을 뒤집어놓았다.

    “여보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주고받는 이 말은 일종의 갈구인지 모른다. 엄청난 정보가 쏟아지고 볼거리가 넘쳐나지만 정작 서로를 향한 관심은 아쉬워지는 시대의 화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신들도 인간에게 뜻을 전하기 위해 메신저(使者)가 필요했을 만큼 소통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걸어다니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는 지금, 초보적인 수화나 봉화대 등 원시적인 수준의 미디어에 의존했던 시절보다 말이 잘 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래의 통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모습으로 설계되고 있는가.

     
     
    ※이번 호로 ‘김찬호의 휴대폰 문화인류학’ 연재를 마칩니다.

    20회 연재 동안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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