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시집살이해온 한자(김혜자 분)의 안식년 선언이 화제가 된 KBS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한자의 느닷없는 독립선언 후 “그 반의 반도 갖추지 못한 나도 쥐 죽은 듯 사는데 무에 저리 불만인지 모르겠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축과 “40년 문서 없는 노비 노릇에 진저리난 한자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 간다”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축이 연일 여기저기서 충돌 중이다. 주부들의 각종 모임은 물론 어디에서든 여자 두셋만 모이면 갑론을박이 한창이지만, 한자가 지나치다는 비난이 워낙 강세인지라 김수현 작가도 홈페이지를 통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엄마란 이름으로 평생을 봉사한 한자가 가족 속에 함몰돼버린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보겠다는 게 왜 비난거리가 돼야 할까요?”라고 묻고 있다.
“내가 집 나간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반응할까”
개인적으로는“아무것도 달라질 것도, 기대할 것도 없기에 죽기 전에 이거라도 한번 해보겠다”는 한자의 탄식에 공감해 눈물을 글썽였다가 “어떤 엄마나 다 마찬가지예요. 다르게 사는 엄마 별로 없어요. 엄마만 특별나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산 게 아니”라는 큰딸 영수(신은경 분)의 반격엔 이내 “하긴 영수 말도 맞긴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렇듯 드라마 한편 보며 엄마 처지도 됐다 딸 처지도 됐다 널뛰듯 갈팡질팡하던 나는 이 말 한마디에 바로 한자 편에 섰다.
“진짜 늬들 엄마 이날까지 게으름 한번 안 피우고 열심히 살았어. 안 웃고 싶은 날도 웃으려고 애쓰고. 아픈 날도 안 아픈 척 이 악물고 참으면서 내 할 도리, 의무, 충실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어.”
40년을 한날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왔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니. 아마 내가 ‘최선’ 운운한다면 우리 식구들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아우성을 칠 게 분명하다. 아이들 뒷바라지며 집안 살림이며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솔직히 죽을힘을 다한 것도 아니고, 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했다 하기도 어려우니까.
그러나 한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평생이었다고 단언하지 않나. 큰딸 영수를 비롯한 자식들도 그 점에 대해선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그간 하루도 제대로 쉬어본 날이 없고,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본 날이 없다는 한자. 넉넉지 않은 형편에 시어른 모시고 시동생까지 거둬온 그 세월이 오죽했겠나. “엄마만 특별나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산 게 아니”라는 영수의 말은 옳지 않다.
우리 부부가 시댁에서 산 건 신혼시절 1년뿐이었는데 비교적 며느리에 대한 배려가 깊은 시어른들이었음에도 나더러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겠느냐 물으면 아무리 스물다섯 꽃 같은 나이라도 절대 사양이다. 아무리 인품 좋은 어르신이라 해도 시어른은 시어른일진대 한자는 시아버지를 모신 지 40년이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렇게 어른 모신 세월이 특별히 힘든 게 아니라고 하면, 그것도 내 자식이 나 힘들었던 걸 몰라주면 당연히 서운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밥하는 게 하도 지겨워 심심파적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결혼 26년째이니 하루 한 끼만 밥을 했다 쳐도 9000번을 훌쩍 넘게 된다.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가 아닌가. 그런데 시어른을 모시고 있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삼시 세 끼를 꼬박 차려내야 했을 터, 결혼 40년이 넘은 한자는 무려 40×365×3=43800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식구들의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을 땐 따로 밥상을 차렸어야 하니 두말하면 뭐 하리. 오늘은 무슨 국 끓일까, 어제 한 반찬 오늘 또 올려도 될까, 비도 오는데 그냥 부침개 부쳐 점심 때우면 노여워하시려나, 이런저런 신경 써온 게 4만 번이 넘으니 멀미가 날 만도 하지 않나.
그래서인지 오피스텔을 얻어 일탈을 감행한 한자의 첫 끼는 라면이었다. 라면을 끓여 맛있게 혼자 먹는 한자의 어깨가 어찌나 가뿐해 보이던지. 또한 한자는 남편에게 어째서인지 따로 살림 나고 나니 끝없이 잠이 쏟아져 자꾸 잠만 잔다 하지 않던가. 그런 걸 보면 한자는 아마 딱하게도 40년간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이다. 그런 세월을 보낸 한자에게 대체 누가 지나치다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엄마의 짐 고스란히 물려받은 며느리는 어쩌란 말인가
영민한 시아버지는 한자가 기진맥진해진 데 본인이 일조했음을 흔쾌히 인정하고 죽기 전 선물이라며 며느리의 안식년을 허락했다. 게다가 한자 남편의 대사가 일품이다. “니들 다 합쳐도 니 엄마 한 사람 못 당햐.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소원하는 걸 못 들어주겠냐. 그게 아니더라고.”
분가하려는 아내가 이해 안 돼도 사랑하니까, 소중한 사람이니까 들어주고 싶다며 오히려 자식들을 설득하는 한자 남편은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곤고했던 지난날 삶이 지겨워 잠깐이라도 혼자이고 싶은 한자의 마음을 이해하더라도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난데없이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수발을 도맡게 된 며느리(김나운 분)는 어쩔 거냔 말이다. 한자가 아직은 본인과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며느리의 고충이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나 보지만 마음을 추스른 뒤엔 부디 며느리도 존재감을 찾을 수 있게 곁에서 도와줬으면 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며느리가 한자의 전철을 밟는다면 그건 너무 딱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