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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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 상승 올인 한·중·일 ‘올림픽 삼국지’

세 나라 20년 격차로 발전, 메달 사냥 … 국민 의식 변화 유도 근대화 지향도 닮은꼴

  • 이웅현 도쿄대 박사·정치학 zvezda@korea.ac.kr

    입력2008-08-04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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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운 상승 올인 한·중·일 ‘올림픽 삼국지’

    1964년 도쿄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 봉송을 하는 임춘애,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리허설(왼쪽부터).

    1960년 9월9일, 한 에티오피아 사나이가 전 이탈리아인을 전율케 했다. 로마올림픽 마라톤 경기. 콘스탄틴 개선문의 결승점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검은 피부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는 콜로세움 아래에 우뚝 서서 “25년 전 조국의 한을 풀었다”는 말로 우승소감을 대신했다. 에티오피아 왕실 근위대 소속의 이 마라토너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세인의 기억에서 흐려진 줄만 알았던 두 나라 사이의 구원(舊怨)이 여전히 존재함을 맨발과 짧은 소감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1935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 스포츠, 민족주의와 올림픽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민족주의와 올림픽 동거

    아베베의 집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년 뒤 이 맨발의 마라토너는 한 일본인 청년의 꿈을 무산시켰다. 1964년 10월21일, 도쿄올림픽 마라톤 경기. 결승점인 국립경기장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역시 아베베였다. 일본 자위대 소속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는 경기장에 2위로 들어와 그나마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던 그는 트랙 반 바퀴를 도는 사이 뒤따라오던 영국 선수가 결승점 앞에서 자신을 추월하는 대역전극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도쿄올림픽 육상 부문에서 일본이 획득한 유일한 메달이 바로 이 비운의 젊은이가 목에 건 동메달이었음에도, 일본인은 이 순간의 낭패감을 오래 되씹어야 했다. 3년 뒤 이 책임감 강한 젊은이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많은 일본인들은 국가가 젊은이에게 지운 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개최국 일본은 올림픽을 국격(國格) 과시와 국운 상승 그리고 민족의식 고양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1964년 일본은 분명 도쿄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에 더 이상 패전국이 아닌, 평화를 애호하는 선진 민주국가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려 했다. 10월10일 개막식 성화 봉송 최종주자는 1945년 8월6일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바로 그날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사카이 요시노리(坂井義則)라는 19세 젊은이였다. 일본이 전쟁 도발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파괴적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의 발신지임을 과시하려는 의도된 연출이었다. 일본인만이 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였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올림픽 개최국 선정 과정에서 유일한 경쟁 상대였던 일본 나고야를 누르고 아시아 국가로는 두 번째로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한국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씨를 개막식 성화 봉송 최종주자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했다. 성화 봉송 최종주자의 상징성을 통해 일본이 미국의 파괴적 행위를 암묵적으로 규탄했듯, 한국도 일본의 역사적 죄악을 은연중에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2008년 8월8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성화 봉송 최종주자는 관례에 따라 마지막 순간까지 기밀이겠지만, 서울올림픽 이후 꼭 20년 만에 아시아에서 열리는 세계적 행사의 개막식에서 중국이 40년 전의 일본과 20년 전의 한국처럼 과거 문제를 항의할지, 아니면 미래지향을 선언할지는 최종주자의 얼굴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은 거의 한 세대의 시간차를 두고 올림픽을 개최한 또는 개최하는 아시아의 세 나라다. 일본은 패전국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한국은 식민지와 독재국가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은 소외돼온 대국으로서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 올림픽 유치와 개최에 총력을 기울였다. 역사적 배경은 다를지언정 민족적 자존심의 앙양과 총체적 국가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는 공통적이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20년, 즉 한 세대의 시간차다.

    동아시아 3국의 올림픽 개최연도를 기준으로 도쿄 서울 베이징의 의식수준과 기본적 경제지표를 비교해보면 세 나라의 20년 발전 격차가 느껴진다. 1964년의 일본과 88년의 한국 그리고 현재의 중국은 국민총소득(GNI)이 5000달러 전후이면서 경제성장률은 절정인 시기에 해당한다. 물론 1964년의 일본 경제와 88년의 한국 경제에 비해 지금의 중국 경제는 훨씬 규모가 크며, 도시민의 실질 생활수준도 매우 높다.

    무엇보다 세 나라는 올림픽을 계기로 국민의 사회의식 변화를 유도했다. 1964년 일본 정부의 여론조사를 보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가장 힘써야 할 점으로 ‘국제감각을 익혀 일본의 모습을 바르게 이해시킨다’ ‘마을을 아름답게 가꾼다’ 등 사회적 매너를 중시하는 생각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차이나머니 시대’/ 노무라 증권금융경제연구소/ 전략과문화 근간).

    이는 1988년의 한국이나 현재의 중국인이 지향하는 사회의식과 일치한다. 1960년대 전반까지 도쿄 시내를 풍미하던 ‘가미카제(神風)택시’는 올림픽 개최 이후 자취를 감췄고, 80년대 중반까지 수도권의 명물(?)이던 ‘총알택시’는 서울올림픽 이후 질주의 추억만을 남겨놓았다. 2008년의 베이징 역시 성공적인 올림픽을 위해 교통시스템 정비에 주력하고 있다.

    국가의 스포츠 수준 그 나라 현주소 반영

    일본은 1964년 해외여행을 자유화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한국의 해외여행 자유화는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OECD 가입은 올림픽 이후로 다소 늦은 편이다. 그러나 한 세대의 격차가 있음에는 틀림없다. 64년 일본은 올림픽을 앞두고 ‘터키탕’을 일소하자는 자숙운동을 벌였으며, 한국 역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 혐오시설을 규제했다. 중국도 외국인이 기피하는 혐오문화 척결을 위해 2008년 여름을 더욱 뜨겁게 보내고 있다. 근면, 청결, 위생시설의 확대가 근대화의 한 지표라면 동아시아 세 나라는 올림픽을 계기로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 개최국 일본은 메달집계에서 종합 3위를 달성했고, 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은 종합 4위의 위업을 이뤘다. 이후 두 나라는 그 고지를 한 번도 밟지 못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종합 2위를 한 중국은 2008년 종합 1위를 노리고 있다. 인구 대국의 강점도 부인할 수 없지만, 한 국가의 스포츠 수준이 국민의 문화의식, 과학과 경제 발전 정도를 반영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중국은 20년 전의 한국이나 40년 전의 일본보다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세계적 축제를 치른다는 도쿄와 서울의 자부심이 베이징에는 없다는 사실도 중국의 ‘과격한’ 성장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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