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준공된 가락시영아파트 단지 전경.
1980년 준공된 가락시영아파트(6600가구)는 현재 조합이 설립돼 재건축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노인은 “가장 바라는 것은 재건축을 반납해버리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분담금이 예상외로 높게 나왔기 때문이다. 가락시영2차 56㎡(17평)를 가졌을 경우 재건축 후 138㎡(42평)로 넓혀가기 위해서는 분담금으로 4억5000여 만원을 내야 한다. 강북의 웬만한 30평형대 아파트 한 채 값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참여정부 때 도입된 각종 규제에 따라 단지 안에 학교 및 임대·소형 아파트를 포함해 설계한 것이 ‘눈덩이 분담금’의 주원인. 이 때문에 주민들은 현재 안(案)대로 재건축을 추진하자는 쪽과, 재건축 규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자는 쪽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다.
상황이 지지부진하자 아예 집을 처분하고 나가겠다는 조합원들도 생겼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다. 재건축 수익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게 밖으로 알려진 데다, 인근에 대규모 신규 물량이 대기하고 있어 ‘사겠다’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락시영에서 2km 남짓 떨어진 잠실역 일대 잠실 1단지, 2단지, 시영아파트 단지는 재건축 공사를 마치고 7~9월 입주 대기 중이다. 이 세 단지를 합쳐 신규 공급되는 가구 수는 1만8105가구에 달한다. 가락시영 단지 내 한 부동산 사장은 “9억원에 거래되던 56㎡(17평)가 7억원에 급매물로 나왔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귀띔했다. 비싼 분담금에 훗날 부담해야 할 개발이익환수금까지 고려하면 골치 아픈 재건축 아파트를 사느니 잠실의 새 아파트를 구입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불패신화’를 자랑하던 서울 강남지역이 ‘굴욕의 계절’을 맞았다. 올해 들어 서울 전역의 주택 매매가격이 상승함에도 강남·송파·서초·강동구 등 강남지역만 매매가격이 떨어지는 ‘역주행’을 했다(40쪽 표 참조).
강남 재건축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도곡동 도곡렉슬의 경우 2006년 12월 14억8000만원에 거래된 109㎡(33평)가 올 4월에는 2억7500만원이 떨어진 12억500만원에 거래됐다. 대치동 동부센트레빌 148㎡(45평)는 5월 20억원에 거래돼 두 달 전보다 가격이 13%나 떨어졌다(3월 매매가격 2억2900만원).
6월25일 오후 서울 송파구의 한 부동산 사무실. 마포구 공덕동에 사는 정모(32·여) 씨는 잠실 재건축 아파트 전세를 알아보러 왔다가 매매를 권유받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부동산 직원은 보름 전까지만 해도 9억원에 나왔던 잠실 시영아파트 109㎡ 한 채가 8억7000만원까지 가격이 낮아졌다면서 이참에 구입할 것을 권했다. “종합부동산세 납부가 부담이 돼 새 아파트 등기가 시작되기 전에 처분하려고 내놓은 물건이래요. 강남 입성을 할 좋은 기회라고요. 강북 아파트를 팔고 대출받으면 가능은 하겠지만, 요새 높아진 금리 때문에 갈등되네요.”(정씨)
낡은 아파트는 전세도 안 나가 ‘빈집’ 속출
이처럼 요즘 거래되는 물량은 주로 ‘세금 부담’때문에 나온 매물이다. 잠실동 K공인중개사 노모 부장은 “잠실 1·2단지의 경우 올해 들어 매달 40~50건씩 거래됐다”며 “금융이나 세금 부담이 큰 사람들은 거의 다 팔았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물론 떨어지는 집값 때문에 손해 보고 떠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노 부장은 “2006년 1단지 구입을 시도했던 한 고객은 집주인들이 매번 1000만원씩 올리는 바람에 네 번이나 매입을 실패했다가 11월에 109㎡를 12억3000만원에 샀는데, 최근 이자 부담을 못 이겨 9억 중반에 팔았다”고 귀띔했다.
역시 재건축이 추진되고 있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 4단지. 이곳에서 15년간 살았다는 박모(50) 씨는 1998년 1억 초반에 43㎡(13평)를 사서 2000년 3억 중반에 팔았다. 2년 만에 집값이 두 배 이상 오른 것을 박씨는 ‘거품’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후 집값은 그의 예상이 무색하리만치 수직 상승해 9억원까지 올랐다가 현재는 8억원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6월24일 아파트 단지 안에서 만난 박씨는 “요새 강남 집값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간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이 아파트 단지의 재건축조합 설립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덕환 씨는 오히려 최근의 집값 하락을 조심스럽게 반겼다. “집값 하락이나 안정 추세가 더 길어져서 정부가 (재건축 관련) 각종 규제를 풀어줬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잠실, 반포 등 올해 입주가 예정된 새 아파트의 물량 공세는 강남권 일대의 기존 아파트 값뿐만 아니라 전세가격도 끌어내리고 있다. 2007년 8월 준공한 잠실 3단지의 경우 입주 한 달 전 109㎡의 전세가는 3억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재 입주까지 한두 달 남은 잠실 1·2단지의 109㎡ 전세는 2억5000만원에서 2억8000만원 사이에서 거래되고 있다. 3단지의 현재 전세가가 3억3000만~3억6000만원인 것과 비교할 때도 매우 저렴하다. 잠실시영아파트 109㎡ 아파트 전셋값은 2억2000만원 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1980년에 준공된 진주아파트 109㎡의 전셋값(2억1000만원)과 거의 비슷한 꼴이다.
서울 및 강남 4개구 월간 매매가 상승률 추이 | ||||||
지역 | 2008년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강남구 | 0.31 | -0.03 | 0.09 | -0.03 | -0.11 | -0.20 |
강동구 | -0.05 | 0.10 | -0.25 | -0.00 | -1.33 | -0.36 |
서초구 | -0.04 | 0.15 | 0.04 | -0.07 | -0.07 | -0.11 |
송파구 | 0.04 | 0.04 | -0.28 | -0.83 | -0.64 | -0.40 |
서울 | 0.24 | 0.21 | 0.46 | 0.73 | 0.47 | 0.26 |
(6월24일 기준, 자료 : 스피드뱅크)
올해 말부터 입주가 시작되는 판교신도시는 현재 공사가 한창이다.
이 때문에 이 일대 낡은 아파트에는 ‘빈집’도 속출하고 있다. B부동산 사장은 “잠실 5단지 112㎡(34평)가 전세 2억원에 나왔는데 팔리지 않아 집주인이 2000만원을 낮췄는데도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빈집으로 있다”며 “다들 새 아파트 입주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많게는 2억원씩 집값이 하락했음에도 강남 주민들은 ‘집값 폭락’에 대한 불안감은 없어 보였다. 최근의 현상이 대규모 신규 물량과 다주택자의 주택 청산, 그리고 종부세를 견디지 못한 서민들의 집 줄이기 차원에서 발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처럼 ‘여력’ 없는 사람들이 청산(?)되고 나면 참여정부 시절처럼 ‘화려한 비상’은 없더라도 다시 꾸준한 상승세로 돌아서지 않겠냐는 것이다.
집값 하락의 ‘슬픈’ 뉴스는 비단 서울 강남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판교를 거쳐 분당, 그리고 용인으로 이어지는 속칭 ‘경부 라인’. 2월 이후 이 라인에서 ‘아파트 가격이 1억~2억 떨어졌다’는 얘기는 뉴스 축에도 끼지 못한다. 중대형의 경우 “급매에서 2억~3억은 후려쳐라”는 얘기도 들린다. 한때 ‘천당 아래 분당’ ‘용의 기운이 숨겨진 명당 용인(龍仁)’이라는 등의 용비어천가 역시 시나브로 사라졌다. 대신 ‘분당 아래(용인부터)는 지옥이다’ ‘용인에서 용써봐야…’라는 새로운 레토릭이 나돈다.
“용인은 사실상 이제 전쟁 분위기예요. 분양가가 3.3㎡에 1726만원이 말이 됩니까?”
지난해 말 용인에 입주한 최태웅(42) 씨는 불과 3~4년 사이에 두 배로 올라버린 용인지역 아파트에 거품이 ‘심하게’ 끼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언급한 1726만원은 2007년 상반기에 분양된 동천지역 삼성래미안 아파트를 얘기한다.
한동안 ‘미니 판교’로 불렸던 동천지역은 서울로 향하는 교통이 용인지역에서 가장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판교 분양가와 엇비슷한 1700만원대의 고분양가가 책정됐다. 분양은 성황리에 이뤄졌지만 이후 신도시 부동산 경기가 급락하자 최근 인근의 성복·신봉지구에서 분양된 아파트의 분양가는 3.3㎡당 1500만원으로 낮춰 책정됐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서초동 ‘삼성타운’ 주변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분당과 용인은 서울 송파구와 판교에서 쏟아지는 대규모 물량공세의 직격탄을 맞았다. 최근 분당의 부동산들은 가격표를 일제히 거둬들였다. 초기 입주자들보다는 1억~2억씩 빚을 내 분당으로 거처를 옮긴 30, 40대 직장인들의 피해가 크다는 게 주민들의 하소연이다. 최근에는 ‘로또’라고도 불리던 판교신도시에서 첫 분양권 전매가 나오기도 했다. 최근 분당 등 주변 집값이 하락하자 ‘대박’의 꿈을 버리는 사람들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다.
6월24일 오후. 평일 낮임에도 경부고속도로는 쉽게 뚫리지 않았다. 그래도 분당에서 동탄까지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무렵 동행하던 부동산 전문가는 “출퇴근 시간을 경험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부고속도로는 물론 서울로 향하는 인근 주요도로 모두 오전 7시에서 9시까지는 전쟁을 치른다는 것. 강남까지는 1시간 이상, 비 오는 날에는 1시간 30분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지금이 바닥 … 마지막 기회라는 주장도
총 6864가구의 잠실시영아파트 재건축 단지는 8월 입주를 앞두고 있다.
“피곤한 것은 둘째 치고, 이제는 자동차 유지비로 한 달에 100만원 가까이 쓰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한 달 기름값만 50만원을 넘고, 주차료 16만원에 톨게이트비 7만원, 거기에 세금과 각종 딱지까지 생각하면, 어유….”
또 다른 골칫거리는 어디가 바닥인지 모르는 신도시 아파트 가격하락과 형편없이 낮게 형성된 전세가격이다.
“지난해 말 호가가 5억(109㎡)까지 갔던 동탄시범아파트 가격이 4억원대 초반으로 떨어졌어요. 전셋값은 1억원 정도에 불과하다는데, 여기 전세 놓고 서울에 전세 얻으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죠.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에요.”(조씨)
동탄 중앙공원과 맞닿아 있는 한화시범단지 옆 부동산 골목. 아직은 베드타운에 불과한 여느 신도시의 일상처럼 주택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1년 전만 해도 부동산들로 가득했다던 골목에는 부동산이 거의 다 빠져나간 후 비어 있는 상가가 눈에 많이 띄었다.
“시범단지 109㎡는 4억2000만원에 급매물이 나와 있네요.”(L부동산)
“서울도 5억 정도면 살 물건 많은데…. 연말이면 가격이 더 떨어질까요?”(기자)
“모르는 소리 마세요. 이게 바닥이에요. 인근에 있는 삼성전자가 확대되고, 서울로 향하는 교통이 갈수록 좋아지니 동탄의 가치는 빛을 발할 겁니다.”(L부동산)
“그럼 전세는 어떤가요?”(기자)
“사실 1억만 있으면 왕처럼 골라잡을 수 있어요.”(L부동산)
문제는 인근에 동탄2 신도시뿐 아니라 용인 수원 오산 평택까지 분당급 신도시를 꿈꾸는 평당 800만원대 주택이 향후 몇 년간 10만 채 이상 공급된다는 사실이다. ‘제2의 분당’을 확신하며 입주했던 동탄 주민들의 고민이 날로 깊어질 만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