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복 사장이 만든 원통모선을 설명하는 제일중전기산업 직원 김구찬 씨.
예감 때문인지 그와의 대화는 초입에서 파탄이 났다. 그는 문외한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차근차근 쉬운 말로 설명하지 않고 다짜고짜 기술용어를 빠르게 내뱉어 기자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러곤 대뜸 “직접 보는 게 이해하는 데 낫다”며 종종걸음으로 공장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새로 개발했다는 제품에 대해 설명하던 그는 사진기자가 “이쪽을 봐달라”고 하자, “내 얼굴은 찍지 마세요” 하면서 나가버렸다. “이런 사람이 다 있어!”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그렇게 불편해진 상황은, 마침 옆에서 작업하던 고참직원 김구찬 씨를 불러 대역 촬영을 시키고 설명을 들으면서 조금씩 반전돼갔다.
A4용지 한 장을 주고 “이 종이를 세우고 볼펜을 올려놓아보라”고 하면, 대부분은 “그게 가능한 일이냐”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나 영리한 사람은 원통으로 돌돌 말아 세우고 그 위에 볼펜을 올려놓는다. 재질은 그대로인데 모양만 바꿔줌으로써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해내는 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이재복 씨는 전기 분야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고전압 전기 220V 낮춰 나눠주는 설비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사람이 살고 일하는 아파트나 사무실의 전압은 220V다. 그렇다고 대형건물과 아파트 단지 전체로 들어오는 전압도 220V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 이는 착각이다. 아파트 단지나 대형건물에 들어오는 전기의 전압은 대부분 2만2900V다.
수돗물은 강한 수압으로 쏘아줘야 누수(漏水) 없이 목적지에 도달한다. 전기도 고압으로 쏘아줘야 ‘흘리는 것 없이’ 목적지에 이른다. 전기를 많이 쓰는 아파트 단지나 공장, 대형건물에 고압 전기가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 이러한 곳에는 고전압을 220V로 낮춰 가정 등에 나눠주는 배전반(配電盤)이 설치돼 있다.
그런데 건물이나 아파트 단지가 소비하는 전기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난다. 초기에 100 정도를 사용했다면 후기에는 150이나 200 정도로 늘어나는데, 이렇게 되면 100을 기준으로 만든 배전반에 ‘무리’가 생긴다. 전기에서 ‘무리’는 대개 열(熱)로 나타난다. 무리가 걸린 배전반에서는 큰 열이 발생하다 마침내 “퍽” 하고 터지는 것이다.
그 순간 전등은 나가고 컴퓨터와 통신기기 등은 먹통이 된다. 첨단 정보세계가 원시로 돌아간다. 이러한 사고를 막으려면 적절한 시기에 배전반을 개조하거나 큰 용량으로 교체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배전반 시장은 날로 커지고 있는데, 업계는 매년 1조원 이상의 시장이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배전반은 큰 전류가 흐르므로 특수한 전선을 사용한다. 전선은 클수록 많은 전기를 보낸다. 또 전기는 전선의 표면으로 흐르기에 표면적이 큰 전선이 좋다. 이 때문에 배전반에서 사용되는 전선은 납작한 막대기 모양이다. 그런데 구리보다는 은(銀)이 전도성이 좋고 미감(美感)도 좋으므로 배전반의 전선은 은도금을 한다.
기존의 배전반에 들어가는 막대 모양의 편모선.
영원을 맹세하고 잘 살아온 부부 사이에서도 싸움이 일어나듯, 같은 방향으로 전기를 흐르게 해놓은 편모선 다발에서도 ‘갈등’은 일어난다. 편모선 사이에 ‘간섭’이 발생해 예상보다 적은 전기가 흘러가는 것이다. 100을 전달할 수 있는 편모선 두 개를 붙여놓으면 200이 아니라 175 정도만 전달되는 것이다.
전기가 흐르는 곳에는 열이 발생하는데, 편모선을 여러 개 붙여놓으면 열이 빠지지 못해 배전반 전체가 뜨거워진다. 과열(過熱)은 사고를 부른다. 전기의 세계에서는 일정한 전기만 흐르는 ‘항상성(恒常性)’이 유지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두꺼비집’으로 불리던 각 가정의 차단기다.
편모선과 원통모선에서 일어나는 간섭과 열의 상호작용 비교
이 1초가 문제다. 1초는 과부하가 걸린 편모선에서 큰 열이 발생해 편모선 자체를 터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배(배전반)’보다는 ‘배꼽(차단기)’이 먼저 터져야 하는데, 배가 먼저 터지는 형국이다. 이재복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30여 년간 배전반 일만 해온 전기 기술자다. 이 때문에 배전반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다 파이프처럼 속이 빈 ‘ 원통모선(圓筒母線)’을 창안해냈다.
원통은 막대보다 표면적이 크므로 같은 양의 구리로 더 많은 전기를 보낸다. 건물에서 사용하는 전기량이 커지면 그림처럼 원통모선도 여러 개를 겹쳐놓는다. 그런데 겹쳐놓더라도 원통모선은 마주 보는 영역이 적으므로 간섭이 적고 열도 훨씬 적게 발생시킨다. 이 때문에 이상전류가 들어와도 차단기가 끊어질 때까지 버틸 수 있다.
경쟁자들 때문에 서서히 말라 죽는 형국
A4용지는 돌돌 말아 원통으로 만들면 볼펜을 이고 서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원통이 막대보다 훨씬 강한 구조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원통모선은 편모선보다 강하다. 이씨는 항공기와 배의 설계에 이용되는 3차원 설계기법으로 원통모선이 들어간 ‘제우스’라는 상표의 배전반을 제작했는데 이것이 큰 인기를 얻었다.
2006년 제우스는 산업자원부에서 ‘신제품인증서’를 받는 등 인증서와 특허를 독식해갔다. 그러자 LS산전 등 크고 작은 전기업체가 이씨 회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제일중전기에 유동성 위기가 닥쳐왔다. 거래처들이 일상적이던 금융거래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현상인데, 이것이 1년 이상 지속된 것이다.
제일중전기가 도산하면 경쟁업체들은 이 회사가 개발한 기술을 거저 가져갈 수 있다. 동종업체 분위기를 눈치챈 이씨는 “나는 혼자 잘 살 생각은 없다. 원하면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그의 고립은 깊어져갔다. 신기술 개발과는 다른 새로운 전쟁 때문에 이씨는 예민해졌다.
신기술을 개발하고도 경쟁자들 때문에 서서히 말라 죽어가야 하는 것이 한국의 기술세계다. 이씨 측 관계자는 “이재복 씨는 신기술을 독식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 기술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명예는 갖고 가고자 한다. 기업을 도산시켜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지워버리려고 하는 한국의 기술세계에서 그는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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