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자주 사과하면 안 된다. 대통령의 말은 곧 법만큼의 영향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법이 흔들리면 국가의 근간이 흔들린다.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면 국민이 불안을 느낀다. 물론 대통령도 사람이므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그에 대해 사과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로 연거푸 사과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윗사람의 권위가 산다.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하나의 문제로 한 달 동안 연거푸 두 번의 사과를 했다. 대통령 취임 100일을 즈음해 했던 첫 번째 사과는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의 전형이었다. 대통령은 대(對)국민 담화로 국민과의 소통 잘못을 사과했다. 대통령은 실제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의 말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국민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사과의 방법과 내용 때문이었다.
사과는 사과를 받으려는 쪽이 요구하는 것을 최소한으로라도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놓고 “미안하다고 했잖아?”라고 따지듯 말하면 절대 그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과가 받아들여지게 하려면 가시적으로 내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사과엔 그런 것이 없었다.
윽박과 따지는 듯한 말투 절대 금물
또한 사과를 잘하기 위해서는 사과를 한 뒤 바로 다른 것을 요구하면 안 된다. 그 경우 사과의 의미는 묻히고 요구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사과는 오히려 약 올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통령의 1차 사과에서는 국민과의 소통 부족을 시인하는 간단한 사과말과 함께 그보다 몇 배 길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도와달라는 요구를 덧붙였다. 마치 내가 이렇게 사과했으니 이것은 반드시 받아줘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 사과방식이었다.
이때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로 국민적 불안을 잠재우려 했다면 굳이 FTA 문제를 길게 거론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부로선 이미 협상을 끝낸 일로 미국 정부로부터 광우병이 발생하면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편지를 받아낸 것도 상당히 어려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강을 우려하는 국민에게 이미 잘못을 저지른 정부 측의 수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의 사과는 적어도 과거의 잘못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언급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덧붙여 청와대나 정부 쪽의 희생양 하나쯤은 골라내 가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사과했어야 했다. 조금도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잘못했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거기다 쇠고기와 단단히 연계된 FTA 문제를 더 길게 요구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한 번의 사과로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려면 “소통의 부재를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어서 더욱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정부는 책임을 지는 의미로 그의 다른 수많은 능력을 아까워하면서도 ○○에게 책임을 묻고 ○○조치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의 노력을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말하고 “FTA 문제는 쇠고기 협상과 별개로 생각해주십시오. 국회에서 그것을 잘 알고 있으니 알아서 잘 처리해주리라 믿습니다” 정도만 말해도 됐을 것이다.
두 번째 사과는 첫 사과를 거절당해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에는 첫 사과의 실패 때문인지 마치 반성문처럼 감상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늦은 밤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수없이 자신을 돌이켜보았습니다”라는 표현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러한 감상 일변도의 사과나 “어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등의 자책성 사과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국민은 언제나 자기 손으로 뽑은 대통령과 애증의 관계를 이룬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내 안전이 무너지니 화를 내긴 하지만, 내가 뽑은 사람이니만큼 좀더 잘해주길 바라고 좀더 당당하게 행동하길 바란다. 그런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면서 머리부터 조아리는 모습은 보기에도 초라하다. 특히 그에게 표를 던진 국민은 더욱 허탈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두 번째 사과에서는 첫 번째보다는 사과의 기술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 후보자 시절부터 일관되게 밀어붙여온 대운하 포기와 청와대 수석 및 내각 개편 등 가시적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쇠고기 추가 협상이 어렵다는 식의 발언을 함께 해 또 다른 문제를 만들 가능성이 남아 있다.
비단 대통령뿐 아니라 사과를 잘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사과를 못하는 경영인은 직원들의 근로의욕을 꺾어 회사에 손실을 끼치고, 사과를 못하는 가장은 가족의 화합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적 문장이 효과적
사과는 타이밍과 방법에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 몇 가지를 익히면 엉뚱한 오해로 감정과 시간, 돈을 낭비하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사과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잘못을 저지르면 상대방은 항상 사과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을 때 사과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나를 무시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사과를 하지 않으면 “혼을 내줘야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 모양이군” 식의 폭력적 사고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피해자는 사과를 기다리는 동안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과장되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적절한 사과 타이밍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면 간단한 사과만으로 마무리될 일이 점차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잘못을 저지르고 바로 사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못 된다. 잘못을 저지르자마자 사과하면 고의성이 있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상대방의 표정이 어두워질 때가 사과의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보면 된다.
둘째, 사과의 방법도 중요하다.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사과하면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롱한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웬만하면 직접 만나서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과해야 한다. 마음의 창인 눈에 진정성을 담아 말하면 사과를 받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기가 쉽다.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는 진정성을 보여줄 수 없는 차가운 매체여서 글의 맥락을 잘못 이해하면 사과가 조롱으로 바뀔 수 있다. 단, 부득이하게 만나기가 어렵다면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괜찮다. 편지는 이성보다 감성을 건드리기 쉬워 감성적인 문장을 선택하면 사과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셋째, 사과는 내용이 중요하다. 사과 내용이 변명일색으로 장황하거나 사과보다 요구사항이 많으면 사과로서 가치를 잃는다. 윗사람의 경우 사과하면서 상대방이 했던 지난 일을 들추거나 훈계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 경우 사과를 받는 아랫사람은 사과 내용은 귀담아듣지 않고 훈계와 과거 들추기만 기억한다.
넷째, 잘못의 정도에 따라 사과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양보를 보여줘야 한다. 하다못해 술을 한번 사거나 식사 대접을 하더라도 잘못을 인정하는 후속 조치를 해주는 게 좋다. 이때 “이 사람이 진짜로 사과하려는 모양”이라고 해석하게 되며, 사과가 사과로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으로, 한 번 사과한 일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일로 연거푸 잘못하면 “일부러 그런다”“나를 놀린다”는 해석이 뒤따라 점점 사과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사람들은 한 번의 실수는 이해하지만 두 번 이상의 실수는 실수가 아닌 고의로 보게 마련이다.
어느 때보다 사과할 일이 많아진 세상이다. 아랫사람도 윗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는다. 사과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의 단절까지 부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겠지만 그와 더불어 타이밍, 진정성, 가시적 모양새가 중요하다는 기술적인 면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이 사실은 이번 대통령의 두 번의 사과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하나의 문제로 한 달 동안 연거푸 두 번의 사과를 했다. 대통령 취임 100일을 즈음해 했던 첫 번째 사과는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의 전형이었다. 대통령은 대(對)국민 담화로 국민과의 소통 잘못을 사과했다. 대통령은 실제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의 말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국민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사과의 방법과 내용 때문이었다.
사과는 사과를 받으려는 쪽이 요구하는 것을 최소한으로라도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놓고 “미안하다고 했잖아?”라고 따지듯 말하면 절대 그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과가 받아들여지게 하려면 가시적으로 내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사과엔 그런 것이 없었다.
윽박과 따지는 듯한 말투 절대 금물
또한 사과를 잘하기 위해서는 사과를 한 뒤 바로 다른 것을 요구하면 안 된다. 그 경우 사과의 의미는 묻히고 요구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사과는 오히려 약 올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통령의 1차 사과에서는 국민과의 소통 부족을 시인하는 간단한 사과말과 함께 그보다 몇 배 길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도와달라는 요구를 덧붙였다. 마치 내가 이렇게 사과했으니 이것은 반드시 받아줘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 사과방식이었다.
이때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로 국민적 불안을 잠재우려 했다면 굳이 FTA 문제를 길게 거론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부로선 이미 협상을 끝낸 일로 미국 정부로부터 광우병이 발생하면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편지를 받아낸 것도 상당히 어려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강을 우려하는 국민에게 이미 잘못을 저지른 정부 측의 수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의 사과는 적어도 과거의 잘못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언급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덧붙여 청와대나 정부 쪽의 희생양 하나쯤은 골라내 가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사과했어야 했다. 조금도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잘못했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거기다 쇠고기와 단단히 연계된 FTA 문제를 더 길게 요구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한 번의 사과로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려면 “소통의 부재를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어서 더욱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정부는 책임을 지는 의미로 그의 다른 수많은 능력을 아까워하면서도 ○○에게 책임을 묻고 ○○조치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의 노력을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말하고 “FTA 문제는 쇠고기 협상과 별개로 생각해주십시오. 국회에서 그것을 잘 알고 있으니 알아서 잘 처리해주리라 믿습니다” 정도만 말해도 됐을 것이다.
두 번째 사과는 첫 사과를 거절당해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에는 첫 사과의 실패 때문인지 마치 반성문처럼 감상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늦은 밤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수없이 자신을 돌이켜보았습니다”라는 표현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러한 감상 일변도의 사과나 “어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등의 자책성 사과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국민은 언제나 자기 손으로 뽑은 대통령과 애증의 관계를 이룬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내 안전이 무너지니 화를 내긴 하지만, 내가 뽑은 사람이니만큼 좀더 잘해주길 바라고 좀더 당당하게 행동하길 바란다. 그런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면서 머리부터 조아리는 모습은 보기에도 초라하다. 특히 그에게 표를 던진 국민은 더욱 허탈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두 번째 사과에서는 첫 번째보다는 사과의 기술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 후보자 시절부터 일관되게 밀어붙여온 대운하 포기와 청와대 수석 및 내각 개편 등 가시적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쇠고기 추가 협상이 어렵다는 식의 발언을 함께 해 또 다른 문제를 만들 가능성이 남아 있다.
비단 대통령뿐 아니라 사과를 잘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사과를 못하는 경영인은 직원들의 근로의욕을 꺾어 회사에 손실을 끼치고, 사과를 못하는 가장은 가족의 화합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적 문장이 효과적
사과는 타이밍과 방법에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 몇 가지를 익히면 엉뚱한 오해로 감정과 시간, 돈을 낭비하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사과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잘못을 저지르면 상대방은 항상 사과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을 때 사과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나를 무시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사과를 하지 않으면 “혼을 내줘야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 모양이군” 식의 폭력적 사고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피해자는 사과를 기다리는 동안 상대방이 사과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과장되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적절한 사과 타이밍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면 간단한 사과만으로 마무리될 일이 점차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잘못을 저지르고 바로 사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못 된다. 잘못을 저지르자마자 사과하면 고의성이 있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상대방의 표정이 어두워질 때가 사과의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보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5월2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쇠고기 파문에 대해 사과하고 한미 FTA 협조를 당부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셋째, 사과는 내용이 중요하다. 사과 내용이 변명일색으로 장황하거나 사과보다 요구사항이 많으면 사과로서 가치를 잃는다. 윗사람의 경우 사과하면서 상대방이 했던 지난 일을 들추거나 훈계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 경우 사과를 받는 아랫사람은 사과 내용은 귀담아듣지 않고 훈계와 과거 들추기만 기억한다.
넷째, 잘못의 정도에 따라 사과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양보를 보여줘야 한다. 하다못해 술을 한번 사거나 식사 대접을 하더라도 잘못을 인정하는 후속 조치를 해주는 게 좋다. 이때 “이 사람이 진짜로 사과하려는 모양”이라고 해석하게 되며, 사과가 사과로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으로, 한 번 사과한 일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일로 연거푸 잘못하면 “일부러 그런다”“나를 놀린다”는 해석이 뒤따라 점점 사과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사람들은 한 번의 실수는 이해하지만 두 번 이상의 실수는 실수가 아닌 고의로 보게 마련이다.
어느 때보다 사과할 일이 많아진 세상이다. 아랫사람도 윗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는다. 사과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의 단절까지 부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겠지만 그와 더불어 타이밍, 진정성, 가시적 모양새가 중요하다는 기술적인 면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이 사실은 이번 대통령의 두 번의 사과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