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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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을 강용석 당선자 外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8-04-30 13: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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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30일 임기가 시작되는 18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금배지를 다는 초선의원은 137명. 그중 ‘차세대 리더’ ‘주목받는 초선’으로 꼽히는 28명을 7주에 걸쳐 소개한다.
    서울 마포을 강용석 당선자 外

    1969년생<br>경기고<br>서울대 법학과<br>변호사<br>

    서울 마포을 강용석 당선자 “내가 흘렸던 서민의 눈물 잊지 않겠다”

    강용석 당선자는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공동화장실을 쓰는 주택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교도소를 밥 먹듯 들락거렸고 살림살이는 늘 팍팍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장학퀴즈에 나가서 장원을 했다. 그때 받은 장학금으로 서울대 법대에 등록했다. 그리고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공군 법무관을 마치고 대위로 예편한 뒤 그는 판사가 되고자 했다. 사법연수원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터였다.

    그러나 그는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목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다는 게 이유였다. 공직에 나가겠다는 꿈이 좌절되자 그는 절망했다.



    “인생에서 실패해본 적 있어요?”

    “실패한 공직의 꿈을 이루겠다” “서민을 어루만지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서울 마포을에 출마한 그에게 한 유권자가 물었다. 지난했던 삶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 △서울대 대학원(법학석사) △공군 대위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법학석사) △넥스트로(Next Law) 법률사무소 변호사….

    그의 이력은 더없이 화려하다. ‘엘리트 중 엘리트’다. 그를 직접 만나보지 않고는 유년시절의 어려움과 화려한 이력이 오버랩되지 않는다.

    “군에서 제대하기 전까지 제 인생의 절반 가까이 아버지가 교도소에 계시는 바람에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서민의 눈물을 잘 아는 만큼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지난해 대선 때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회 법률지원단 팀장을 맡아 당시 범여권 공격의 선봉장 구실을 했다. 대선 후보 경선 때는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청년본부장으로 일했다. 그는 18대 총선에서 정청래 의원과 리턴매치를 벌여 45.9%의 지지율로 ‘여유 있게’ 승리했다. 마포을은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의 득표율이 서울지역 48개 선거구 중 41위였던 곳이다.

    “정 의원의 부상과 몰락을 보면서 배운 게 많습니다. 겸손하게 낮추고 또 낮추겠습니다. 생활밀착형 정치를 하고자 합니다. 소소해 보이지만 서민의 삶을 실제로 개선하는 그런 일을 뚜벅뚜벅 해나갈 겁니다.”

    서울 마포을 강용석 당선자 外

    1969년생<br>대전고<br>서울대 정치학과<br>중앙일보 기획위원

    서울 양천을 김용태 당선자“대통령 눈과 귀 막는 세력과 싸울 터”

    김용태 당선자는 MB 측근 그룹 가운데 가장 덜 알려진 인물에 속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캠프 내에서 ‘집권계획서’를 완성할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예 브레인이다. 20대 중반 민중당으로 정치에 입문한 직후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를 거쳐 10년 만에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됐다.

    -어떤 정치철학을 갖고 있나.

    “정치가 욕먹는 시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누구도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없다. 20세 이후 줄곧 정치를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누군가는 정치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지 않겠다. 언제 어디서라도, 특히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치를 하겠다.”

    -국회에서 무슨 일을 할 생각인가.

    “무엇보다 지역발전의 염원에 힘입어 국회의원이 됐다. 양천을 지역의 주택·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건설교통위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 나의 전문성을 내세운다면 ‘방송통신 융합’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IPTV와 같은 뉴미디어는 국가적 도전이자 기회라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를 정비해 대한민국의 먹을거리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닦고 싶다.”

    -MB 직계로 분류되는데 당면과제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두 가지 소명이 있다. 첫째는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로막는 세력과 싸워야 한다. 민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야 한다. 둘째, 대통령이 반드시 추진해야 할 숙명적인 과업들이 있다. 교육개혁이나 한반도 대운하처럼 인기 없는 정책일 수도 있다.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가 나서 목숨 걸고 지원해야 한다.”

    김 당선자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총선 와중엔 이상득 불출마론을 제기했던 수도권 55인 가운데 “실무를 총괄했다”고 표현될 정도로 강경파로 분류된다. 그런데 그간 박 전 대표에 대한 생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박 전 대표의 협력이 절실하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의회권력이 중요한데, 손을 내밀어서라도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다. (친박 의원들의) 복당이든 정책연대든 적극 검토해야 한다.”

    서울 마포을 강용석 당선자 外

    1966년생<br> 성동고<br>서울대 법학과<br>검사, 변호사

    경기 용인기흥 박준선 당선자“국민 살림살이 위해 법과 시스템 수정”

    -왜 검사를 그만뒀나.

    “정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검사로서 나쁜 사람 잡아넣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소극적인 방법보다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검찰조직엔 나보다 검사 일을 잘할 사람이 많다. 그런데 정치권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습이었다. 부도덕한 정치인, 부적절한 정치인이 많았다. 내가 뛰어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준선에게 정치란?

    “국민한테 위임받은 권력을 갖고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란 국민을 더 잘살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절묘한 방법을 연구해내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게끔 법과 시스템을 고치겠다.”

    박준선 당선자는 ‘잘나가던’ 공안검사 출신이다. 법무부에서 WTO(세계무역기구) 협상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검사 시절 일화 한 토막.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에서 일하던 2000년 10월 그는 체포영장을 들고 여의도 한나라당사를 찾아갔다. 정형근 의원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것. 한나라당의 반발로 체포는 무산됐으나 이 같은 시도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원칙대로 일했을 뿐”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 당선자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에서 일했으며, 대선 때는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회에서 법률지원단장을 맡아 BBK 사건 소방수로 활약했다. 클린정치위원회는 그가 대표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 홍윤 사무실을 빌려 쓰기도 했다. 물심양면으로 이명박(MB) 대통령의 당선을 지원한 셈이다.

    박 당선자는 ‘MB 직계’로 불리는 안국포럼 출신 인사들과도 가깝다. 안국포럼 시절 MB의 비서실장을 지낸 백성운 당선자(경기 일산동구)의 초청으로 4월14일 열린 안국포럼 출신 당선자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날 회동은 그냥 밥 한번 먹자는 모임이었다. 정치세력화 운운하는 표현은 과장된 것이다. 국회로 들어간 뒤엔 일 중심으로 꾸려진 모임에만 참여할 것이다. 특정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모임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곳은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서울 마포을 강용석 당선자 外

    1960년생<br>전주고<br>서울대 외교학과<br>정읍시장

    전북 정읍 유성엽 당선자“한-미 FTA 비준 저지에 총력”

    유성엽 당선자는 전북의 당선자 11명 가운데 유일한 무소속이다. 그러나 지역 정가에서는 20년간 정읍의 맹주인 김원기 전 열린우리당 대표의 뒤를 이을 만한 정치거목으로 자질을 인정받아왔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공무원 생활을 하며 전북도청 경제통상국장을 지냈고, 2002년 이후 줄곧 정읍시장으로 일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전북도지사 후보에 출마하기도 했다.

    -왜 무소속인가, 당내 파벌 갈등의 희생양인가.

    “솔직히 잘 모른다. 민주당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3배수 후보군에도 끼지 못했다. 각종 뒷말이 나돌았지만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기에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느 계파도 아니다.”

    -행정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행정부에서 법과 제도만 다루는 일을 하다 지방자치의 주역이 되고자 시장 선거에 나선 것이 정치입문의 계기가 됐다. 민선시장으로 일하다 보니 정치의 영역을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방분권과 지역발전이 필수적이기에 좀더 종합적인 차원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나섰다.”

    -희망하는 상임위원회는?

    “당연히 농림수산위원회다. (만약 18대 국회로 넘어온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저지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선진화를 말하는데, 농촌을 방치하고 농업을 포기한 선진화 개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난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보다 더 센 ‘농촌 중시’ 정치인이다.”

    -낙후된 전북의 비전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기업 유치를 말한다. 그러나 시장으로 일해본 결과 내 생각은 다르다. 전북도 발전의 해법은 ‘다시 농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농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야 정체성 있는 발전이고 차별화된 전략이라 말할 수 있다.”

    -민주당이 부르면 달려갈 것인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최악의 경우 무소속으로 활동할 수도 있다.”

    유 당선자는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는 정치’를 선언하면서 4년 임기 동안 KTX로 정읍에서 여의도로 출퇴근 정치를 펼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정읍에서 재학 중인 두 딸도 전학시키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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