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맨’
‘레인맨’은 정신질환자를 우호적 시각에서 바라본 영화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영화에서 정신질환자는 위험한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에서 접할 수 있는 정신질환자는 대체로 ‘사이코’나 ‘미저리’의 주인공에 가깝다. 대형 사고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범인이 으레 정신감정을 받는 것도 그런 통념에 한몫한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도, 대구 지하철 사건 때도 그랬다. 정신감정을 해보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과도한 편견이 형성된다. 즉 정신질환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형 사고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는 것으로 당연시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실 그런가. 우리나라의 성인 100명 중 8명은 한 가지 이상의 정신장애를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보건복지부의 발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든 사람은 조금씩은 정신질환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얘기도 있다.
정신질환자의 위험성에 대한 판단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정신질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천을 겪어왔다. 중세에는 정신장애인은 오히려 특별한 재능이나 예언적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광기는 사유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 광기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성의 이름으로 감금되고 격리됐다고 한 것은 미셸 푸코다. 그는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을 중심과 주변, 정상과 이상 같은 이분법에 의한 희생자들로 봤다. 푸코가 비판한 당시 정신병원의 풍경은 영화 ‘스위니 토드’에서 볼 수 있다. 악당인 터핀 판사가 스위니 토드의 딸인 조안나를 감금한 곳이 정신병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나라들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감금과 격리 위주 정책은 바뀌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게 하는 식으로 변하고 있다. 그래도 별문제가 없고 치료도 잘된다는 것이다. 반면 ‘스위니 토드’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나라다. 우리 사회에 ‘현대화’돼야 할 분야가 또 하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