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3~27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2008 세계경제포럼’(WEF·일명 다보스포럼·www.weforum.org)이 열렸다. 마지막 날 전체 종결회의에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테러리즘, 기후변화, 물 부족 등 세계가 당면한 과제들을 극복하려면 기업, 정부,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새로운 차원의 협력적, 혁신적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88개국의 기업계, 정계, 학계에서 2500여 명의 글로벌 리더들이 참석한 올해 다보스포럼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두웠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이는 신흥시장의 성장이 세계경제를 견인할 것으로 낙관했던 지난해와는 확연히 달라진 것. 일차적 이유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로 빚어진 세계경제 침체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된 데 따른 여파를 들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행사의 창설자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올해 주제도 ‘협력적 혁신의 힘(The Power of Collaborative Innovation)’이었다. 갈수록 커지는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우려가 ‘공존의 강조’로 이어진 셈이다. 자본주의가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내세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연설은 이 같은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대변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보스에 모인 세계 정·재계 리더들이 느낀 ‘문제의식’은 좀더 근본적인 데까지 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동안 서방세계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던 세계화가 극소수 부자들만을 위한 도구는 아니었는지에 대한 의문 등이 그것이다.
윈-윈이라는 세계화의 오류, 그리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
달리 말하면 이는 각각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는 새로운 현상들이 기존의 ‘고정관념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인데, 세계경제의 주도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가고(중국 쿠웨이트 등이 주도하는 국부펀드의 영향력 확대가 비근한 예다) 선진국 내에서도 소득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는 현상(미국 풀타임 근로자들의 경우 2000년 이후 생산성이 18% 상승했음에도 소득수준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가운데)이 1월29일 오후 인천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을 방문해 공장을 둘러본 뒤 마이클 그리말디 사장(왼쪽)과 이남묵 노조위원장의 손을 감싸 잡으며 웃고 있다.
“지금은 시장과 국가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저울추가 방향을 바꾸고 있는 시기다. 2008년은 앞으로의 시대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끝낼 중요한 해인데, 우리는 보호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유무역의 이념적 변형을 찾아내야 한다.”(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우리는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하는 실마리를 보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승자가 누가 되든 당선자는 이전보다 더 평등에 신경 써야 할 것이고,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협약이 어떻게 결론 나든 그 실천을 위한 국제적 협력은 일찍이 볼 수 없던 규모가 돼야 할 것이다.”(케네스 로고프 미 하버드대 교수·국제통화기금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
“생산성 향상에 따라 임금이 오르고 모든 국가경제는 상대우위를 갖는다는 기존 이론의 정당성이 위협받고 있다. 서방세계가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품을 중국과 인도가 더 싼값에 공급하게 되면서, 최고 부자나라에서조차도 임금 정체현상이 계속돼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그룹 아시아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
요컨대 기존의 경제학 이론은 세계화를 모든 참여자가 혜택받는 윈-윈 게임이라고 가르쳤지만, 서방세계에서조차 그 이론의 오류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로치는 이에 대해 “세계화 이론은 지금과는 다른 시절에 수립된 것이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지금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제기되는 의문 한 가지. ‘실용’과 ‘경제’를 중시하는 차기 이명박 정부의 정책 방향은 과연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부응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세계의 톱 리더들이 한목소리로 ‘2008년 어두운 경제 전망’을 내놓는 상황에서 한국만 고도성장 신화를 재현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 더 근본적으로는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반성과 대안적 자본주의에 대한 모색이 활발한 세계적 흐름에 비춰본다면 이명박 정부의 정책적 지향점이 시대 요청에 뒤처진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다.
다보스포럼에 참석하고 돌아온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두 가지 모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는 연설에서 미국의 신약 개발 과정을 예로 들며 연방정부와 기업 간 협력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연방정부는 신약 허가과정을 단축해주고, 기업은 이를 통해 부가적으로 창출한 수익을 저개발국의 질병 치료 등에 쓸 수 있도록 하는 협력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과거보다 강화돼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차기 정부는 정부조직을 축소하려고만 들 뿐 이런 대목에 대한 설명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차기 정부가 시장만능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우려되는 부분이다. 세계의 톱 클래스 리더들이 모인 다보스포럼이 내세운 ‘협력적 혁신’이란 주제는 자본주의의 역기능을 치유해야 한다는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차기 정부가 전임 노무현 정권에 반대되는 쪽에 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이 같은 글로벌 트렌드에서 미아(迷兒)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차기 정부는 시장지상주의 아닌 성장우선주의 성향”
‘이명박 정부가 과연 시장만능주의인가’와 관련해 다른 한 경제학자는 좀더 신중한 해석을 내놓았다.
“차기 정부는 시장지상주의보다 성장우선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시장지상주의라면 정부조직 개편에서 기획(planning) 기능이 빠져야 하는데, 차기 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정부 통제를 강화하면서 효율을 추구하겠다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에 관여할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면면을 봐도 시장만능주의자들은 아니다. 그러니 차기 정부의 성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한다. 한편 우리에게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대목에 대해선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이것은 국가 전체의 역량에 관련되는 문제라 본다. 우리는 지금껏 세계의 흐름을 뒤쫓아 뛰기만 했지, 나름의 고민과 판단으로 세계적 흐름을 해석하고 행동해본 적은 없지 않은가.”
끝으로 세계화 주제와 관련되는 최근 풍경 한 가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1월29일 민주노총 방문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언론은 이를 민주노총 지도부가 불법 집회에 따른 경찰 출두를 거부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지난해 비정규직법 통과로 촉발된 이랜드 사태로 맞불을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차기 정부와 노동계가 예선에서 힘겨루기 한판 시합을 벌이는 듯한 모양새다.
노동계의 탈·불법 시위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고민해야 할 숙제다.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불거진 이 문제를 푸는 데 있어 이명박 정부도 ‘협력적 혁신’의 정신을 살려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