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에서 바라본 형제섬.
이미 남녘의 화산섬은 때 이른 봄빛이 제법 싱그럽다. ‘제주의 봄’이 머지않았음을 예고하는 전령사는 단연 수선화다. 수선화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서양에서 들여온 관상용 개량종을 떠올린다. 하지만 제주와 여수 거문도에도 수선화가 자생한다. 토종 수선화는 개량 수선화보다 향기가 진하고 정갈하며 우아한 빛깔을 자랑한다.
특히 추사 김정희(1786~1856)가 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제주도 대정읍 일대의 들녘과 바닷가에 야생 수선화가 많다. 자동차가 분주하게 오가는 도로변이나 양지바른 바닷가 언덕에서 발견할 수 있고, 들녘의 밭둑이나 무덤가에서도 은밀하게 피고 진다.
수선화가 피는 대정 들녘은 제주도 최대 평야지대다. 이곳은 섣달이나 정월에도 한겨울을 실감하기 어렵다. 한라산과 중산간지대의 드넓은 초원이 은빛 설원으로 탈바꿈해도 이곳은 초록빛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산방산이 보이는 대정 들녘에 핀 야생 수선화.
게다가 이 들녘은 제주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만든 군사시설이 지금까지도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가미카제 특공대와 중국 본토를 폭격한 비행기의 발진 기지였던 알뜨르비행장이다. 지금도 상모리 일대 들녘에는 20여 개의 격납고를 비롯해 지하 벙커, 관제탑, 진지동굴, 카이텐(자살특공어뢰정) 기지 등이 산재한다.
알뜨르비행장 부근 송악산 아래의 해안 절벽에 뚫려 있는 일오동굴도 일제의 잔재다. 모두 15개에 이르는 이 인공동굴은 일본군이 군수품과 어뢰정을 감춰두기 위해 파놓았다. 몇 해 전 드라마 ‘대장금’의 마지막 촬영지가 된 뒤로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주도 맨 남쪽 바닷가에 우뚝 솟은 송악산(해발 104m)은 368개의 오름 중 꼭 한 번 올라봐야 할 곳이다. 정상에는 둘레 500m, 깊이 80여 m의 거대한 이중 분화구가 형성됐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일 듯한 분화구의 위용이 보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압도적이다.
성산 일출봉이 제주도 동부 해안의 천연 전망대라면, 송악산 정상은 서남부 해안 제일의 전망대다. 동쪽으로는 멀리 서귀포 앞바다의 지귀도와 섶섬, 서북쪽으로는 차귀도와 비양도 그리고 한라산 정상까지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송악산과 산방산 아래 사계리를 잇는 해안도로는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답고 운치 있는 해안 드라이브코스로 손꼽힌다. 전체 길이는 5km도 되지 않지만, 그 길에서 만나는 풍광과 정취는 제주도 어느 해안도로 못지않게 다채롭고 풍부하다. 웅장한 산방산과 서정미 넘치는 사계마을, 쪽빛 바다와 작은 무인도, 고운 모래언덕과 늘 푸른 해송숲…. 바다와 나란히 달리는 길은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빨려들 듯 이어진다. 또한 동쪽 해안이 아닌데도 겨울철에는 형제섬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송악산과 사계리 바닷가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흰 눈을 머리에 인 한라산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한라산 정상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눈이 쌓여 있지만, 가장 근사한 설경은 역시 1월에 볼 수 있다. 특히 폭설이 내린 뒤 맑게 갠 한라산 풍광은 알프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현재 한라산 등산코스는 모두 4개인데, 그중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가 비교적 수월하다. 해발 1280m의 영실휴게소에서 해발 1700m대 윗세오름대피소까지 약 4km 구간을 오르는 데는 2시간쯤 걸린다.
윗세오름 직전의 해발 1500~1600m에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구상나무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하지만 한겨울에는 구상나무의 자태를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구상나무숲 전체가 눈에 덮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뜻언뜻 푸른 잎을 드러낸 구상나무의 늠름한 기상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이 등산코스의 반환점이 되는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사발면으로 요기한 뒤 다시 해발 970m의 어리목광장으로 내려서기까지는 1시간30분쯤 더 소요된다. 숱한 등산객의 발길에 다져진 눈길을 내려가는 것은 오를 때보다도 힘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따금 ‘엉덩이 썰매’를 지치면서 겨울 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기에 육체의 곤함은 금세 잊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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