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의 국가안보국(NSA) 본부.
9·11테러 정보 실패 이후 조직간 비효율성 비판받아
각 분야별로 운영되는 미국의 정보기구는 공식적으로 16개(실제 운영되는 정보기관의 숫자가 45개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에 이른다. 각각의 기구는 고유의 업무목표와 수행능력, 자신들만의 문화, 신조를 갖고 각개약진해 왔다. 이렇듯 촘촘하게 신경망을 뻗쳐놓았음에도 미국은 9·11테러를 막지 못했다. 9·11테러는 미국 정보기구의 대표적인 ‘정보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무리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다 해도 기관 간 공조와 조율이 부실한 상황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자명해진 것이다.
분야별로 기관을 운영하며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던 미국의 정보조직 운영철학은 9·11테러의 정보 실패를 계기로 180도 변화했다. 기관 간의 상호 운용성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중앙통제를 추구하던 개혁의 방향은 CIA와 펜타곤의 논란을 거쳐 요원 수준의 근본적 개혁으로 옮겨갔는데, 정보공동체 개혁에 나선 미국의 목표는 “정보기구 간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극단적인 효율성 추구가 군국주의의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정보는 인간정보(HUMINT·Human Intelligence), 신호정보(SIGINT·Signal Intelligence), 영상정보(IMINT·Image Intelligence)로 크게 나뉜다. CIA는 그중 인간정보(미국 내 인간정보는 FBI)에 치중했으며, 신호정보는 NSA가 획득했고, 적국의 시설과 움직임을 촬영하는 영상정보는 NRO의 몫이었다. ‘정보 독재’를 막으려면 인간·신호·영상정보가 각기 다른 기관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분리된 것이다. 그래야만 대통령이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이 ‘견제의 원칙’은 가장 먼저 비판받았다. 그물처럼 얽힌 조직이 정보분석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이 비등했다. 국내 정보 및 해외 정보의 수집과 정보분석을 통합·조정하는 기구가 세워져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CIA는 정보예산의 80%를 쓰는 펜타곤과 주도권 다툼을 벌였는데, 결과는 펜타곤의 ‘완승’이었다. 16개 정보기구를 지휘 감독하는 국가정보국(DNI)을 신설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맏형’으로서 CIA의 위상이 추락한 것.
그 결과 마이크 매코넬 현 DNI 국장은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스파이 중의 스파이’로 자리매김했다. 예비역 해군 중장으로 25년간 군 정보 분야에서 일한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매일 직접 보고한다. ‘포린 어페어스’ 7/8월호에 기고한 ‘정비되는 정보기관’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정보기관 간 통합을 강화하고 정보기관의 협력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어떤 정보기관도 독자적으로는 그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미국의 정보공동체는 하루에 수십억 건의 정보를 수집하는데 이들 정보는 분석관을 통해 모호함이 사라져야만 정책결정을 도울 수 있는 형태로 가공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CIA의 위상은 냉전이 종식된 이후 하향세를 걸어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9·11테러 이후 예산은 다시 늘었으나 숙련된 인력의 절대 부족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CIA에서 일하는 분석관, 공작관 중 절반가량이 9·11 이후 채용됐는데, 근무연한이 10~14년인 분석관은 근무연한이 4년 미만인 분석관 10명당 1명꼴에 그친다. 덜 숙련된 요원들이 내놓는 국가정보평가(NIE·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의 수준은 회의적이다.
“CIA에는 속사포처럼 빠른 아랍어를 공부할 계획이 있거나 외국의 재래시장에서 값을 흥정하며 입씨름할 수 있는 요원이 거의 없다. 미국의 젊은이 가운데서 이 같은 외국어 능력을 보유한 사람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숙련된 분석관과 용기 있는 공작관으로 구성된 새로운 정예부대가 필요하다.”(‘포린 폴리시’ 9/10월호)
DNI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보기관의 고용 관행도 바꾸었다. CIA는 한국어, 파르시어(이란), 파시투어(아프가니스탄), 우르두어(파키스탄) 등의 구사 능력을 가진 인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면서도 보안 누설에 대한 우려로 해외에 친인척이 있는 이민 1, 2세대를 채용하지 않았는데, 매코넬 DNI 국장은 “이민 1, 2세대 채용을 꺼린 관행은 정보 전문가를 끌어오는 데 장애가 됐다. 현지어에 능통한 미국인을 적극 채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DNI의 이런 방침에 따라 CIA는 아시아계 등 미국 내 소수민족 출신의 스파이를 적극 채용하기로 했다.
미국 정보기관 상당수 군 출신이 장악
DNI는 또 올 여름부터 유능한 분석관으로 구성된 RASER(Rapid Analystic Support and Expeditionary Response·빠른 분석과 신속한 지원이라고 명명된 분석가 집단)를 분석업무에 투입했다. DNI가 각 정보기관이 생산한 정보를 분석한 뒤 정책결정자에게 보고하겠다는 뜻이다. DNI는 북한과 같은 핵심 정보목표에 대해서는 각 기관 간 조율 기능을 맡은 정보조정관(Mission Manager) 제도를 도입했다. 북한담당 정보조정관(상당수 국내 언론에선 북한담당 관리관이라고 쓰고 있다)은 조지프 디트라니가 맡고 있다.
정보기관과 관련해 미국은 ‘군국주의 국가’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할 만하다. 매코넬 DNI 국장, 헤이든 CIA 국장을 비롯해 16개 기관 중 절반이, 그것도 핵심기관의 책임자가 군 출신으로 채워졌다. 군부가 미국의 정보기관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된 셈이다. DNI는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정보기관 위의 정보기관’으로 변모해가며, 자신의 기능을 확대함으로써 다른 기관의 관료적 기능을 넘겨받으려는 펜타곤의 압력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찰머스 존슨 전 캘리포니아대 교수(정치학)는 이를 “군국주의의 신호”라고 표현했다. 정보공동체의 ‘펜타곤 종속화’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군사적 해결 방안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마련인 펜타곤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16개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독점하려는 ‘공룡’의 등장이 위험의 소지를 안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증명하듯 ‘극단적인 효율성 추구’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敵)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