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현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9월 17일 고려대 일민 미래국가전략 최고위과정에서 한 강연을 발췌 정리한 내용입니다. ‘세계 속의 한국경제 : 내일을 위한 국정 어젠다’를 주제로 이뤄진 이날 강연에서 사공일 전 장관은 세계경제의 네 가지 큰 흐름 속에서 한국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은 세계화 시대의 국정과제에서 최우선 순위는 해외 기업 유치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한다. 수출을 위해 선적을 기다리는 국산차들.
그러면 현시점에서는 과연 무엇이 국정 어젠다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을 찾는 길은 우리 경제를 둘러싼 국제 여건을 둘러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초에 나라를 잃었던 망국의 설움도, 20세기 말에 겪었던 환란과 경제적인 고통도 바깥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해 벌어진 일들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국정 어젠다, 올바른 전략을 선택하려면 바깥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경제를 둘러싼 국제 여건을 결정하는 흐름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흐름을 통해 현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흐름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입니다. 세계화는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는 기술혁신에 따라 하나의 조그만 마을(global village)이 되는 현상입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화의 함축성은, 기업이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을 찾아 아무 데나 가서 입지한다는, 다시 말해 일자리가 국경 없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바로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엄청난 기술혁신 시대 세계화에 동참하라
그러면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은 어떻게 만드는가. 보통은 경제 여건을 먼저 생각합니다. 국제 수준에 맞게 적정 수준에서 금리가 유지돼야 하고, 자금의 공급이 충분해야 하며, 법인세 등 각종 세금도 경쟁국들에 뒤지지 않게 하는 등 경제 변수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도 물론 돼야 하지만, 기업이 경제 여건 속에서만 영위되는 건 아니잖아요?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일들이 모두 기업 하기 좋은 조건을 만드는 일환입니다.
또 중요한 것이 법치입니다. 법치화가 되지 않은 나라에 투자가 잘될 수 없습니다.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은 법치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신문에 난 한국개발연구원(KDI) 자료를 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우리나라의 준법수준, 즉 법을 지키는 나라의 순위가 밑에서부터 세 번째였습니다. 우리 밑으로는 멕시코 터키밖에 없어요. 흥미로운 것은 준법수준을 OECD 평균만큼만 올리면 1년에 국내총생산(GDP)을 1% 이상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것을 사회 지도층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경제정책입니다.
정부가 정책수단으로 활용하는 규제와 간섭도 시대 여건에 맞게 설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국토 균형발전은 분명 국정에서 우선순위로 둘 만한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위한 수단은 시대 여건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과거 국경이라는 칸막이가 높이 쳐져 있을 때는 수도권 투자를 못하게 되면 그 투자가 지방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투자가 지방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어요. 이것이 미국 중국, 심지어 슬로바키아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법인세율도 내리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최근 OECD 학자들이 법인세율을 누가 내느냐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결론은 근로자들이 지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은 회사가 내는데 실제로는 근로자가 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지금 같은 세계화 시대에 기업에 세금을 많이 매기면 자본은 그 나라를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투자가 되지 않고, 근로자들의 생산성 향상이 안 되며, 이에 따라 임금이 안 오르고 일자리가 줄어듭니다. 그래서 거시적으로 보면 근로자들이 법인세를 내는 셈이라는 겁니다. 거꾸로 말하면 법인세를 낮추는 것은 근로자를 돕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경쟁적으로 법인세를 인하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흐름은 중국의 재부상입니다. 중국은 청나라 중기부터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을 하기 이전까지 150년 기간을 제외하고는 과거 2000년 동안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이었습니다. 세계 GDP의 20% 이상을 중국이 생산했어요. 최근 조사를 보면 1820년 당시 중국의 GDP가 세계 GDP의 33%, 즉 3분의 1이었습니다. 그만큼 중국은 과거에 큰살림을 해본 나라입니다.
물론 지금의 중국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시장경제 체제와 공산당 위주의 정치체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연안지역과 내륙지역의 소득격차는 어떻게 할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는 은행의 부실채권 문제, 국영기업의 비효율성 등등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학자들 중에는 중국의 미래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적어도 소득수준이 3000~4000달러에 다다를 때까지 중국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봅니다.
중국 경제성장의 ‘이웃효과’ 최대한 활용해야
우리는 인구 13억의 중국이 앞으로 잘 나갈 것이라는 전제 아래 대응해야 합니다. 지금 중국의 GDP는 세계 전체의 4%입니다. 순위로 보면 지난해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4위, 즉 미국 일본 독일 다음이 중국인데 머지않아 독일 일본을 제치고 2050년 이전에 미국도 제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 군사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다간 지난 5000년 역사를 되풀이해 또다시 중국 변방의 중소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 옆에 있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우리에게 기회가 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기회를 활용할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웃효과’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를 하루빨리 기업 하기 좋은 여건으로 만들어서 중국을 겨냥한 세계적 기업들이 우리에게 오게 해야 합니다. 또 중국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우리가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금융허브가 되자, 물류허브가 되자 하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것도 먼저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일례로 최근 신문에 ‘싱가포르 태국 같은 나라들이 의료, 보건시장을 개방해 세계화 이점을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저는 우리도 의료, 보건 허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3억 중국 인구 중 잘사는 사람을 1%로만 봐도 1300만명입니다. 이들이 급한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여건만 갖춰져 있다면 2시간 비행거리인 서울에 올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병원이 영리법인화도 되지 못하고 있어요.
지식기반 경제시대, 교육이 살 길
중국 옆에 자리한다는 것으로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면은 이것 말고도 많습니다. 서비스 분야나 첨단산업 분야에서 중국시장을 겨냥하는 해외 기업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베이징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고, 중국보다 먼저 자본주의 체제를 경험했습니다. 중국이 제공할 수 없는 사회간접자본 등 유리한 요인이 많습니다. 국내 여건만 만들어준다면 우리와 손잡고 기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큰 흐름은 지식기반 경제시대의 심화인데, 그래서 교육개혁이 중요합니다. 지식기반 경제시대에는 지식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지식은 교육을 통해 축적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라는 얘기입니다. 즉, 지식기반 경제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창출하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국정의 우선과제가 돼야 합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 우리는 ‘국토도 좁고 자연자원도 없고, 가진 것은 사람밖에 없어 큰일났다”고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지식기반 경제시대에는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과거에 큰일났다고 했던 것이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모처럼 좋은 기회가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단군 이래 우리가 이렇게 유리한 고지에 서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공교육부터 바로 세워야 합니다. 특히 초·중등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공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굉장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중 하나가 가난의 대물림입니다. 과거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학원에 갈 필요가 없었어요. 학원은 학교 공부를 못 따라오는 사람들이 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공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돈이 있어야 더 좋은 학원에 가고 유학도 가고, 그러면 결과적으로 가난한 학생은 경쟁에서 불리해집니다. 그러니까 공교육부터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평준화는 정말로 이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떨어지는 학생은 그들대로 안전망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그러나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향평준화만 부를 뿐입니다. 제가 항상 드는 예입니다만, 마라톤 대회를 보면 수천명이 함께 뛰지 않아요? 그런데 기록보유자를 다른 사람들과 같은 라인에서 뛰게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막 엉키고, 기록이 나오겠어요? 기록보유자는 출발에 방해가 안 되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Fast Track입니다. 공부 잘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Fast Track에서 뛰게 해야지 똑같이 뛰게 하다간 사회 전체가 하향평준화됩니다.
제가 과거에 정부에서 일해보았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지식기반 경제사회에서 경쟁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정 최우선 순위를 여기에 둬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책적 함축성을 주는 마지막 큰 흐름은, 세계경제력의 균형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대응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일입니다.
지구촌 전체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대 말 냉전 종식 때까지의 미국처럼 보스가 하나였을 때는 협력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중간 보스가 많아져 어떤 일이든 합의하기가 힘들어졌어요. 이게 바로 세계무역기구(WTO)가 잘 안 되는 이유입니다. 다자주의보다도 끼리끼리 지역주의가 성립하게 되는 겁니다. 힘의 균형구조 면에서 볼 때 우리처럼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나라는 다자주의가 더 좋은 겁니다.
얼마 전 정부가 성공적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끝내고 국회에 비준동의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물론 미흡한 점은 있지만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비준동의를 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경제가 낙관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듭니다. 미 의회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인데, 민주당은 상당히 반(反)FTA 성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현 행정부 때 미국 의회에서 통과를 받아내야 하는데, 낙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국회 비준동의를 받고 적극성을 보여야 합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