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에 납치됐다 8월29일 풀려난 고세훈 씨(가운데) 등 피랍자 5명이 가즈니 시에 도착해 적신월사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고 있다. 초췌한 얼굴에 아직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모습이다.
같은 시기, 독일도 한국과 비슷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피랍되기 하루 전인 18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남서부 와닥에서 독일인 토목기술사 뤼디거 디트리히(44)와 루돌프 블레히슈미트(62)가 이 지역 갱단에게 납치됐다. 이중 디트리히는 얼마 못 가 숨지고 말았다. 갱단은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과 협력관계에 있는 무장단체였다. 탈레반은 이 사건을 이용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3000여 독일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고, 심지어 독일의 비타협적인 협상 태도를 이유로 인질 두 명을 살해했다고 거짓 주장까지 했다. 치밀한 심리전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에 직면해 독일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한국 정부와 달리 사뭇 강경했다. 피랍 나흘 뒤인 22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아프간 주둔 독일군을 철수하라는 탈레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심지어 현재 10월 만기로 아프간에서 평화유지 활동 중인 독일군의 주둔 연장건과 인근 해역에서 실시될 대(對)테러 활동에 해군 1300명 추가 배치, 최신예 토네이도 전폭기 6대 실전 배치 등에 대해 연방의회에 승인을 요구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인질의 안전석방’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협상에 전력을 다했다. 일각에서는 독일과 대조되는 한국 정부의 유약한 태도를 비판한다. 독일은 국익을 위해 설령 희생자가 생긴다 해도 테러단체와의 협상을 단호히 거부하는데, 한국은 나라 체면을 구긴 채 탈레반에 끌려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한국 정부가 어느 나라보다 피랍 국민의 안전 귀환을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독일이 피랍자의 안전석방에 대해 한국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평가는 그리 틀리지 않아 보인다. 독일의 피랍자 가족들은 정부가 국민의 생명보호 의무를 소홀히 한다며 쾰러 대통령에게 탄원하는 등 백방으로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실제 독일인 피랍사건에 대한 독일 내 관심은 미미하다. 최근에는 언론 보도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탈레반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이가 “독일인 인질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다”고 말했을 정도다. 당황한 탈레반 측은 독일 여론을 환기하고자 자신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인질 블레히슈미트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제작, 유포하기까지 했다.
獨, 테러단체와 협상 단호히 거부
독일은 왜 이토록 냉정하게, 혹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피랍사태에 대처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미 비슷한 사례를 여러 번 경험한 데서 터득한 노련함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11월 취임 이후 거의 하루도 자국민 납치와 관련된 고민을 접어본 적이 없다. 취임 직후인 11월25일, 고고학자인 수잔네 오스트호프가 이라크에서 피랍된 것을 시작으로 연말에는 피랍사건 최고 전문가였던 전직 외무부 차관 위르겐 크로보그와 그의 가족이 예멘에서 납치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듬해인 2006년 1월에는 두 명의 기술자가 이라크 북부에서 피랍됐다가 5월경 풀려났다.
올해 2월에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독일 여성과 그의 아들이 무장세력에 끌려갔다. 5개월 뒤 여성은 풀려났지만 아들은 지금까지도 납치범에게 붙잡혀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프간 피랍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은 이미 1970년대에 ‘납치범의 협박에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확립했다. 1975년 좌파 테러단체가 베를린 기민련 의장이던 페터 로렌츠를 납치했을 때 정부는 그를 구하려고 수감 중이던 5명의 좌파 인사를 풀어줬다. 당시 연방총리인 헬무트 슈미트는 이런 결정에 대해 크게 후회했다. 정부가 테러단체의 협박에 굴하는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납치사건 여러 번 경험 노련한 대응
슈미트 총리가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2년 후 찾아왔다. 1977년 9월, 적군파 2세대는 수년 전 체포된 적군파 1세대를 석방하기 위해 당시 독일고용자협회장이던 한스 마틴 슐라이어를 납치한다. 그러나 슈미트 총리가 이끄는 독일 정부는 이번만큼은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결국 더 강도 높은 압박수단이 필요했던 적군파는 한 달 뒤 82명의 승객이 타고 있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피랍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슈미트 총리는 협상 대신 특공대를 출동시켜 피랍 여객기를 공격, 납치범 4명을 제압하고 승객과 승무원 전원을 구해내는 쾌거를 거둔다. 납치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적군파 1세대는 전원 자살했고, 잔여 적군파 세력은 인질 슐라이어를 살해한 뒤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 흔히 ‘독일의 가을’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을 교훈 삼아 독일은 ‘어떤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강경노선을 수립했다. 바로 이것이 향후 독일이 자국민 피랍사건에 대처하는 원칙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아프간에서 벌어진 자국민 피랍사건에 대해 한국과 독일은 외양상 상이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정부는 저자세를 취하며 직접 협상에 성의를 기울인 반면, 독일은 강경하고 비타협적 태도를 고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삼자를 통한 물밑 접촉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한국이나 독일이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납치와 관련한 국제 상황이 이처럼 심각하고 해결이 어렵기에 차후 불미스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치 보험에 든 양, 위험지역을 활보해서는 안 된다.’ 한때 독일 최고의 피랍사건 처리 전문가로 인정받던 위르겐 크로보그의 말을 되새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