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등 의사소통 수단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타인과의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장정일 시인의 시적 화자 또한 누가 라디오 단추를 누르듯 자신을 눌러줘 소통하길 갈구한다. 누군가에게 ‘전파-의미’가 돼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참된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연의 3행(‘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은 그것이 찰나적·공리적이란 것을 꼬집는다.
현대인은 기업체, 학교, 국가 등 거대한 조직에서 사원증, 학생증, 주민등록증 등의 문서로 소속감을 느끼라고 공식적 추궁을 받으면서 타자와의 접촉 기회는 ‘시골처녀 점순이’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여우와 어린 왕자처럼’ 서로를 길들이면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공리적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길들여진 척하다 쓸모없어지면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상대를 사물화·수단화한다.
“이제 우리는 사유재산, 이윤, 힘을 지주(支柱)로 삼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이 산업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양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한양대 1999년 정시
프롬이 진단한바, 산업화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을 상품화했다. 상품의 가치는 쓸모가 결정한다. 인간에 대한 판단도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쓸모가 있는가’다. “인류는 망해도 돈은 살아남는다”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긴다” 등의 명대사를 남기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 ‘쩐의 전쟁’도 인간이 만든 돈(錢)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소유양식의 삶’에 대한 풍자다. 이런 사회에서 만남은 ‘쩐의 관계’다. 개인은 결국 ‘현대문명’이라는 이름의 섬에 표류하고 있는 로빈슨 크루소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속도숭배와 물질만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자연과 교감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어하고, ‘느림철학’에 관한 책도 끊임없이 나온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한양대 1999년 정시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은 의사소통의 불완전성을 상징하고 있다(위). 돈이 만남의 형식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묘사한 드라마 ‘쩐의 전쟁’.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편’
노나라 임금의 인간중심주의, 즉 새는 새답게 살아야 하는데 ‘인간(노나라 임금)의 방식’을 강요하다 보니 새가 죽고 말았다. 이는 타자와의 ‘차이’를 먼저 긍정해야 하고, 그 ‘차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더 풍성한 만남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다. 여우의 말대로 ‘강요’가 아닌 ‘길들이기’가 바로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것인데, 이는 서양의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1906~1995)와 통한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 이래 서양은 타자를 ‘어떤 이상(서양적 가치)’으로 융합하는 자기동일시였다고 일갈했다. ‘나/너, 서양/동양, 남자/여자, 백인/유색인, 기독교/비기독교’ 등등의 이항대립 쌍을 상정하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경향이었다는 지적이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은 체질적으로 ‘다른 이’와 ‘다른 것’을 지배하려는 전체성의 철학, 또는 전쟁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에 대항해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他者)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타자성의 철학’ 또는 ‘평화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경희대 2006년 수시2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할 수 없는 ‘무한자’다. 그러므로 내 식대로만 타자를 자기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 타자의 단절과 차이로 인해 공리주의는 좌초하고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배가 닻을 올린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타자성)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구약성경은 과부, 고아, 빈자, 이방인을 대표적인 약자로 그린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그들에게 빗댄다. 타자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단지 ‘나와 다르다’는 사실, 바로 이 ‘타자성’으로 인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자를 사회 약자처럼 ‘나’가 먼저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와 연대의식의 강조다. 인간관계의 안정망인 만남의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는 공자의 말과 통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이 노나라 임금처럼 타자에게 자신의 규칙만을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한다. 서양제국주의의 식민정책과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레비나스는 타자와 잘 만나는 동기는 ‘주고받기(give · take)’ 같은 공리성이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에 교환이 불가능한 ‘어떤 도덕’이라고 한다. 예컨대 물에 빠질 위험에 놓인 아기를 구하거나 기아 난민, 이주노동자, 종군위안부 할머니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혜택이나 명예 등을 바라지 않고 그냥 윤리적 호소에 의해 타자를 배려해야 진정한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다르지만 서로 어울리고, 소인은 같지만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子曰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레비나스와 공자는 시공을 초월해 타자의 윤리학은 ‘나와 너’의 차이와 숱한 타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울리려 하는 ‘존재양식의 삶-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한 것이다. 여우와 장미꽃에게서도 배우는 어린 왕자의 군자(君子) 같은 화이부동이다.
- 추천도서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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